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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95화 (9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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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 - !”

랑트리뷔아체의 병사들은 성벽이 통째로 무너지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다양한 공성 병기를 본 경험 많은 이들조차 이런 종류의 무기는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그나델로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자들이 신 무기를 기대해도 좋다고 호언장담할 때는 믿지 않았는데, 정말 그럴만했어.’

아그나델로는 경험 많은 장군이었다. 그는 무너지는 성벽을 보며 개인의 환호에서 그치지 않고, 눈에 잘 띄는 백마를 타고 병사들의 앞을 거닐며 소리쳤다.

“보라! 우리의 새로운 병기를 두려워하는 적들의 모습을! 이제부터 모든 도시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제군들이여, 영광의 시대가 우리를 기다린다! 가라, 조국의 아들들아! 전진하라! 불과 검으로서 우리의 적들을 정복하라!”

부관이 그의 신호에 맞추어 황금 그리폰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무너지는 성벽을 배경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국기의 모습은 병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와아아아아아아 - ! 돌격하라!”

“가라! 이 도시는 너희의 것이다!”

장군은 한껏 끓어오른 병사들의 감정을 고양시켰고, 이내 수천 명의 병사들이 무너진 성벽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이들은 숙련된 병사답게 흥분한 와중에도 대열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한편, 그 광경을 성벽 뒤에서 지켜보던 두라노 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적들의 발걸음 소리가 땅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너진 성벽에 망연자실한 시선을 내보냈다. 먼지가 휘날리는 성벽의 잔해 속으로 파묻힌 아르투르와 함께, 자신들의 희망도 사라진 것이었다. 절망과 부정적인 사고가 삽시간에 병사들의 나약해진 마음을 파고들었다.

‘어차피 도시의 함락을 피할 수 없다면, 달아나서 가족들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다들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아난 자라는 불명예를 무릎 쓸 용기를 가진 자가 아직 나타나지 못했을 뿐, 기회만 주어지면 이들은 순식간에 와해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또 도망칠 생각인가? 제군들?”

그들이 도망치기 직전, 아르투르가 성벽의 잔해를 걷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온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조금의 찰과상만 입은 채 멀쩡한 상태로 나타나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주에게 침묵하고, 내전도 방관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할 건가?”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라면 말리지 않겠다. 떠나도 좋다. 그대들과, 그대 가족들의 운명을 적들의 자비에 맡기는 것도 하나의 처세술이겠지.”

그들을 쏘아본 아르투르는 양손으로 여명의 손잡이를 꾹 붙잡은 채 걸어 나갔다. 부상당한 아르투르가 무너진 잔해 위에 서서 몰려오는 적들에게 검을 겨누는 모습을 보며, 병사들은 가슴이 끓어올랐다.

“고향을, 도시를 지켜라 - !”

많은 병사들이 수치심을 느꼈기에 그들은 이 불쾌한 감정을 털어내고자, 더욱 필사적으로 변했다. 도망치기 직전의 군대가 모여들어 대열을 형성했다. 창과 방패를 들고 아르투르의 곁에 서는 이들과 그들이 버티는 사이 성벽 너머에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는 이들이 나뉘어 각각 역할을 수행했다.

아르투르는 성벽의 잔해를 밝고 선 채, 몰려드는 적들을 응시했다. 적병들은 잘 훈련 받았으며 무장도 좋았고, 무엇보다 대단히 사나웠다. 여태까지 그랬듯, 이번에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두라노는 내 고향도 아니고, 영지도 아닌데, 내가 왜 여기서 싸우고 있지?’

남들은 자신을 보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기사라고 불렀고, 그 점엔 자신도 항상 자부심이 넘쳤다. 그러나 싸움이 두렵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봐야 불의의 일격에 맞아 쓰러질 수 있는 필멸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래 싸우면 지치고, 칼로 베면 선혈을 흘릴 뿐인 평범한 인간.

‘내가 겨울산에서 본 반신 같은 놈이었다면 이런 걱정도 필요 없었겠지. 베면 재생하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말이야.’

왜 여기서 싸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돌아서려면 돌아설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함락된 도시가 처해지는 운명은 익히 들었고, 보았다.’

불타오르는 도시, 잔인하게 살해되는 노인과 병자들, 겁탈당한 여인들, 노예로 팔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래. 기사에게 그런 참상을 막는 것보다 중한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침략자들이 우릴 기다린다! 돌격 - !”

“와아아아아아 - !”

아르투르가 이끄는 돌격 행렬은 랑트리뷔아체의 병사들과 강렬히 부딪혔다. 아르투르는 맨 처음 달려든 병사를 단칼에 두 동강내어 죽였다. 하지만 적들은 더욱 사납고 거세게 공격해왔다. 먼저 석궁 세례가 날아들었지만 아르투르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떨어져내릴 뿐이다.

“적장이 저기 있다! 놈을 쓰러뜨리는 자에겐 2계급 특진과 금화 천 잎을 약속한다!”

돌격부대를 지휘하는 젊은 장교가 칼날을 겨누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영광과 부를 원하는 젊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놈만 쓰러뜨리면 도시는 끝이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공격을 보며 자신감을 드러내며 웃었다. 진짜로 목숨을 거는 녀석은 여덟 정도고, 나머지는 기세를 탄 모양이었다.

“고작 천 닢? 왕자를 죽이는 덴 너무 싸지 않겠느냐?”

“사생아 놈에겐 그것도 비싸지 - !"

가장 먼저 달려든 적병은 두려움이란 모르는 우수한 병사였다. 꽤 체격이 큰 그는 양손대검을 들어 묵직하게 내리쳤다. 아르투르는 어떤 기교도 섞지 않은 정직한 일격으로 받아쳤다. 두 검이 부딪치자, 적병은 엄청난 힘에 손에서 검을 놓치며 바닥을 나뒹군 반면, 아르투르는 고고하게 자리를 지켜선 채 이어지는 공격들을 받아냈다.

압도적인 체격을 지닌 기사가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있으니 공격이 집중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할버드, 장검, 낫, 장창,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모든 방면에서 아르투르를 노리고 공격해왔다.

아르투르는 본능적으로 가해지는 모든 공격의 궤적을 읽어냈다. 각각의 공격은 도달하기까지 미세한 시간 차이가 있었고, 아르투르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현란한 발걸음으로 적진 사이를 자유자재로 누비며 공격을 피해내고, 틈이 날 때마다 가볍게 여명으로 찌르고, 베어냈다.

아르투르가 회피하고, 방어하는 도중에 간간이 내지르는 공격들은 아주 간결했지만 치명적이었다. 삽시간에 아르투르를 공격한 병사들 넷이 쓰러졌다. 정확히 모두 정확히 목이나 장기가 베인 자 들이었다.

“내게 맞설 자는 없느냐!”

아르투르는 쓰러진 병사들 틈으로 들어가 검을 크게 베었고, 적병들은 너무나 빠른 공격속도에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쓰러져갔다. 오른발을 한걸음 내딛고 베고, 피한 후, 몸을 되돌려서 측면에서 오는 공격을 받아내면서 찌른 후, 비어있는 왼손은 날아드는 창날을 잡아낸 후 구부러뜨린다. 다음엔 왼발을 내딛은 후, 자리를 지키고 선 채 크게 베었다. 갑옷채로 두, 세 명의 적병이 허리채로 잘려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것을 수차례 반복하니 아르투르의 주변에는 쓰러진 시체와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가 자욱했다. 그는 붉은 물감만 쓰는 화가였으며 여명은 그의 붓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인들은 피아를 떠나 순수한 경외심에 빠져 넋을 놓고 광경을 바라봤다. 아르투르의 몸놀림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었고, 공격은 재빠르지만 무게가 있었다. 이미 그의 몸과 정신, 기예는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뤄졌고, 하나의 동작은 다른 하나로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평화의 시대라면, 시대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무인들. 그들을 일컬어 세간 사람들이 부르는 칭호가 있었다. 백병전에서라면 홀로 전세도 바꿀 수 있는 불세출의 검사들. 검의 달인, 소드마스터들!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건 아르투르 자신이었다. 수없는 전투 경험과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노력들이 이 순간, 모두 발휘되고 있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기분을 음미하며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베고, 찌르고, 부순다! 가장 단순한 자세가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마스터에게 배웠던 가르침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며 의미를 되새겼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더 과감하게. 적이 절대로 신중히 생각할 수 없게!’

어느 사이 자신은 아군 대열에서 벗어나 혼자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검무가 멈추는 순간, 곧 죽음의 순간이 되리라. 그러니 멈추지 않는다. 더 빠르게! 더 정확하게! 더 격렬하게! 모든 생각을 내버린 채, 무아지경 속에서 전투의 흥분과 경험에 몸을 맡긴다. 아르투르의 타고난 체력이 행동을 뒷받침했고, 전투 감각이 그를 인도했다!

누구도 감히 그의 분노 앞을 가로 막지 못했다. 처음에는 고작 한명이라며 자신 있게 나서던 고참병들이 먼저 등을 돌려 달아났고, 쇠사슬과 그물까지 던져가며 움직임을 봉쇄해보려했지만 그것도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두라노 군을 밀어붙이며 시내 안으로 진입하려던 랑트리뷔아체 군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부상병들을 내버려둔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 대륙의 모든 음유시인들은 두라노의 무너진 성벽 틈에서 벌어진 전투를 노래했다. 역사가들은 두라노 성문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이 탄생했으며, 그 사내가 도시를 구해냈다고 전한다.

***

새로운 영웅의 분노를 눈앞에서 받아낸 랑트리뷔아체 군은 진영으로 돌아와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겼다.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었고,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전투였다.

‘오늘 저녁은, 두라노의 가정집에서 먹는다!’

돌격에 앞서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늘어놓았던 연설이었다. 성벽이 무너질 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그렇게 믿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랑트리뷔아체 군은 이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그저, 여전히 폐허 위에 굳건히 버티고 선 아르투르와 그가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그것을 따져야 할 장교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지 오래거나, 그들처럼 넋 놓고 도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기랄, 대체, 우리 군대가 이렇게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당신들은 뭘 하고 있던 거요?!”

아그나델로 장군 역시, 연합군의 다른 지휘관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다른 도시의 사령관들은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대답한 자는 제라니아의 참주였다.

“장군이 공격하겠다는 신호도 보내지 않고 먼저 들어갔잖소. 우리는 공격이 시작된다는 언질조차 받은 적이 없었는데, 어쩌란 말이오?”

제라니아와 카니아, 피오렌치아 세 도시의 대표들은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두라노를 분할하기 위해, 혹은 금전적 이득을 위해 뭉친 사이였지만 끈끈한 사이라곤 할 수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서로 전쟁도 해본 사이였으니까.

“우리를 배제하고 홀로 두라노를 함락시킨 뒤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저 무시무시한 신무기도 숨긴 것일 테고요.”

굴리엘모가 못미더운 눈빛을 보내며 추궁하는 어조로 말하자, 아그나델로는 격렬히 반응했다.

“그게 무슨 망발인가! 지금 우리,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의 명예를 의심하는 것이오?!”

“아, 진정하십시오. 설마 우리 명예로운 피오렌치아가 랑트리뷔아체를 의심하겠습니까? 단지, 드러난 정황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아그나델로와 굴리엘모가 말할 때, 다른 두 도시의 대표는 냉소를 지었다. 이곳, 레무리아 반도는 음모와 배신의 땅이고, 저 둘의 도시는 그들 중 최고였다. 그런 자들의 명예라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두 번이나 연달아 패하는 바람에 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에요. 이를 만회할 방법이 있습니까?”

카니아의 대표인 구릿빛 피부의 여성 의원이 말했다. 지금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연합군의 중추를 구성하는 두 군대의 패배 소식은 연합군 장병들 전체로 퍼져있었고, 이제 모두가 아르투르를 두려워했다. 무지몽매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그를 초월적인 무언가로 보고 있었다.

“내 부하 중에 그를 대적할 할 있는 능력을 갖춘 자가 있소.”

말을 꺼낸 것은 제라니아의 참주, 데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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