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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아르투르 만세! 두라노 만세!”
아르투르와 백인의 기병대가 피오렌치아의 군기와 군자금을 챙겨 도시로 돌아왔을 때, 시내의 시민들은 열렬한 환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불패의 기사! 불패의 기사! 불패의 기사!”
단 백 명의 기병대로 수만 명의 적 사이를 헤집고 돌아온 지도자를 달리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개전 초기의 전쟁 열기와 달리 두라노의 사기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끝을 모르는 연합군의 군대가 성벽을 사방에서 포위했을 때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가진 자들도 있었고, 내심 아르투르가 지나치게 무모한 전쟁을 시작했다고 여기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보라! 시민들이여! 독재관께서 이뤄내신 승리를!”
하지만 아르투르가 획득한 군기를 모두가 볼 수 있는 광장에 전리품 삼아 전시하였을 때, 불신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시내의 시민들은 전투에서 이길 수 있으리란 진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반면 절대 패배할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부풀어 올랐던 연합군은 불의의 일격에 당해 당혹스러워했다. 그날 밤,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의 아그나델로 장군이 근위대를 데리고 피오렌치아 군의 지휘부에 나타났다.
“굴리엘모 공!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제대로 싸워 보기 전에 군기부터 뺏긴 거요?”
아그나델로는 굉장히 화가 난 표정으로, 질책하는 어조를 담아 피오레 가문의 후계자를 노려보았다. 굴리엘모는 그의 부하들에게 해왔듯이 어디다 대고 따지냐고 화를 내려다가, 백전노장의 기세에 압도되어 고개를 돌렸다.
“우리 체면에 좀 금이 가긴 했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군의 실제 피해도 그다지 크지 않고, 기껏해야 군기 몇 개 털린 게 전부인데, 그렇게까지 화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장군. 다시 잘 싸워서 이기면 그만인 것 아닙니까?”
아그나델로는 굴리엘모의 말을 들으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아니,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명해본 자라면 저런 말이 나올 턱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싸우는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길 것 같은 전투에서만 열심히 싸운다는 걸 누구나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사기는 지휘관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하는 요소였다.
‘피오렌치아 놈들, 미쳤어. 미쳤다고. 아무리 피오레 가문의 후계자라지만, 도시의 운명이 걸린 대전에 이런 도련님을 내보내?’
흥분으로 머리까지 달아올랐던 아그나델로였지만, 모략이 판치는 정치판에서 수십 년 간 국가 원로의 자리를 지켜온 자였다. 조금 머리를 굴려보니 이 같은 상황은 당연했다.
‘하기야 이런 대군을 보내면서 피오레 가문의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앉힐 수도 없었겠지. 쿠데타라도 일어나면 끝장이고,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군공을 세워 도시의 영웅이 되면 피오레 가문의 권좌가 위태로워 졌겠지. 그렇다고 돈방석에 눌러앉은 피오레 가문에서 고생해가며 군무를 배우겠다는 놈이 있었을 리도 없군.’
흥분을 가라앉힌 노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다시 잘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그건 곤란합니다. 대책이 있겠지요?”
아그나델로가 표정을 풀자, 굴리엘모도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 대책은 있습니다. 장군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진 압니다. 군무에 무지한 애송이가 자리에 버거운 자리를 맡았다고 여기겠지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 대신 일을 해줄 전문가를 불렀지요.”
“전문가?”
그런 자가 있었다면 애초에 그 자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 될 것 아닌가?
“네. 명성 높은 기사들로 이뤄진 용병대, 금괴기사단의 단장 만프레드를 고용했습니다. 고용비가 제법 들었지요. 그가 사흘 뒤에 도착할 것이니 우리 군의 사정도 나아질 겁니다. 그러면 장군 맘에는 들겠지요.”
아그나델로는 입을 크게 벌렸다. 용병을 아무리 많이 고용하더라도, 최고 지휘권만큼은 넘기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거늘, 이놈들 뭐하는 짓이야?
‘이제 보니 피오렌치아 놈들, 돈만 많고 뱃살만 튀어나온 호구새끼들이었군?’
아그나델로는 마음속에서 절로 웃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지난 수십 년 간 피오레 가문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해왔구나! 피오렌치아 인들은 부유함에 찌들어버린 나머지, 거칠고 힘든 일을 남들에게 맡겨오기만 했던 시절이 너무 길었던 것이 분명했다.
‘두라노를 멸망시키면 다음은 피오렌치아다. 그러면 나머지 도시들은 우리 적수가 못 돼. 그렇게 내 조국, 랑트리뷔아체는 레무리아를 통일하고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겠지. 나, 아그나델로는 황금시대를 연 국가의 아버지로 기억될 것이고.’
뭐, 어차피 피오렌치아 놈들이 삽질을 하건 말건 대세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실질적인 최고 지휘권은 자기에게 있고, 도저히 질 수가 없는 전력 차이였으니까. 더군다나 지금 그에겐 비장의 무기가 준비되어있지 않은가?
***
흥분에 빠져든 휘하 병사들과 달리, 이 시각에도 아르투르는 작전실 책상 위에 놓인 지도와 현장을 오가며 면밀히 이길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다. 전쟁 전의 예측에서도 그랬지만, 지금도 승산이 높아보이진 않았다.
양을 따지자면 적은 8만도 넘었고, 아군은 그 절반이었다. 질을 따지자면 아군은 급조한 민병대가 대부분인데, 적들은 나름대로 경험을 갖춘 병사들이 가득 했다. 다 피오렌치아 놈들 같이 형편없는 군대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특히 랑트리뷔아체의 군대는 모든 면에서 위험했다. 지형을 따지자면 사방이 탁 트인 평지인지라 방어하기도 나빴다.
‘믿을 것은 단 하나 뿐이군.’
위대한 장인들을 지닌 두라노의 전통이 만든 드높고 거대한 성벽! 고도의 축성술로 지어진 도시의 웅장한 성벽이야말로 두라노가 가진, 승리의 길이었다. 아르투르는 전쟁을 대비할 때, 모든 군사 역량을 그곳에 집중했었다. 해자는 깊게 파인 후 물을 들이부었고, 에렌의 지도 아래 장인들이 철야 작업을 했었다.
어마어마한 군수 물자가 쌓여있었다. 발리스타들이 성벽에 배치되었고, 끓는 기름과 화살, 볼트, 창, 칼은 끝을 모르고 창고에 쌓아두었다. 다만 식량이 문제였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식량을 비축해두었지만 두라노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이번 침략군을 피해 수많은 피난민이 도시로 올려온 터라 길거리가 붐비고 있었다.
‘입을 줄이기 위해 내쫓아?’
잠시 고민했던 아르투르였다. 하지만 이건 영주 개인 간의 분쟁이나, 국경 분쟁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침략자들은 두라노를 파괴한 후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가려는 놈들이었다. 안될 말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일을 한다면 당장 내부에서 붕괴될 염려도 컸다.
“올 테면 와봐라! 이 겁쟁이 놈들아!”
젊은 병사들은 자신감을 내비치며 도발하곤 했다. 그러나 경험 많은 사내들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나 성벽 뒤에서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는 필부도 용맹할 수 있었다. 시내로 불길과 돌덩이가 쏟아지고 식량이 없어 굶주리며, 질병이 퍼지기 시작할 때. 그 때부터가 진정한 공성전의 고통이 무엇인지 맛보게 될 터였다.
굴리엘모의 형편없는 패전 이후, 사실상 연합의 지휘권을 인수한 아그나델로 장군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도시를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충분히 시간을 들였고, 도시 인근은 토목 현장으로 변해갔다.
“놈들이 언제 공격을 해오겠습니까?”
조레스의 말에 아르투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랑트리뷔아체의 날랜 기병 부대가 모든 공성 현장을 순찰하고 있었으니 습격은 불가능했다.
“충분히 준비가 되면 오겠지. 우리도 할 수 있는 건 준비하는 것뿐이고. 어차피 항상 공성전은 공격자 측이 더 소모가 크니, 시간을 끌어주는 건 좋은 일이다.”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에렌이 보고해왔다. 그는 군사 전략의 전문가는 아니어도, 보급 분야만큼은 잘해낼 수 있었다.
“독재관 각하. 남은 물자를 계산해본 도시는 3개월의 포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있습니다. 하지만 반년이 넘어가면 하루에 한 개의 빵만으로 버텨야할 거고, 일 년이 지나면 그마저도 동이 나고 전부 굶어죽을 겁니다.”
“일 년이나? 저런 대군을 일 년이나 이곳에 주둔시킬 수 있겠나?”
“피오렌치아와 랑트리뷔아체의 금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실제로 저희 정보원들은 그들이 해외에서 막대한 보급 물자를 사들이고 있는 것을 전달 받았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그들의 재력만큼은 진짜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냥 시간이 흘러가는 건 우리에게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아르투르는 결심을 굳힌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도 배급을 반으로 줄이세. 나부터 솔선수범해보이지.”
곤란한 표정을 짓는 에렌.
“하지만 독재관님, 그렇게 했다간 도시 내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갈 겁니다. 적들의 첩자가 암약하고 있는 상황이니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겠지요.”
아르투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대부분 전사, 하다못해 싸울 의지가 있는 병사들을 이끄는 것을 전제로 군사 교육을 받아왔지 이 정도의 민간인을 데리고 싸우는 상황은 예상 외였다. 보조 인력으로도 쓸 수 없는 민간인들은 아무리 봐도 짐 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알겠네. 배급을 줄이는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답하도록 하지.”
언제나 그랬듯, 손쉬운 방법은 있었다. 당장 배급을 줄인 후, 불평불만을 내뱉으면 바로 내쫓거나 목을 매달면 금세 조용해질 것이다. 하지만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벌인 전쟁인데, 민간인을 희생시킬 순 없는 일이었고, 이대로 가면 앉아서 다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어느 쪽이 보다 승산이 있나? 나은 길은 없나?
“독재관 각하!”
도착한 전령이 그의 고민을 끝내주었다.
“서쪽 성벽의 적들이 정체불명의 무기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가운데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는 것인지라,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알겠네. 가보지.”
아르투르는 이번에도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두라노 인들이 공성탑이나 투석기를 보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서쪽에 도달하자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을 상징하는 황금 그리폰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깃발 아래로, 수십 정에 달하는 시커먼 쇠로 만들어진 것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쇳덩이의 중심부엔 원형 구멍이 파여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게 무언가를 쏘아내기 위한 구멍이라고 판단했다.
“공성병기의 일종 같군, 뭔가를 쏘아내는 것 같은데, 자네들 저게 무엇인지 본 적 있나?”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참모들을 돌아봤다. 유일한 기술자인 에렌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에렌조차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런 공성병기는 들어본 적도, 만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 전에, 구조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돌을 쏘아내려면 잡아당길 도르래가 있어야하는데, 어디서도 도르래도, 밧줄도 보이질 않습니다.”
일동은 모두가 불안과 의심 속에서 적들이 무엇을 하나 지켜보았다. 저 미심쩍은 장비를 다루는 인원들은 장교의 구령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굉장한 반복 숙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속도였다.
“사격 준비!”
랑트리뷔아체 장교의 호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옆에 쌓아둔 철로 만들어진 구슬을 들고 왔다. 어찌나 무겁고 큰 지 장정 넷이 동시에 들어야만 했다.
“저놈들, 설마 저 쇳덩이를 쏘려는 건가? 어떻게?”
“장전!”
다음 구호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막대기로 쇠공을 기계 깊숙이 쑤셔 넣었고, 그 사이에 병사들은 부리나케 기계 주변에서 달아났다. 아르투르는 그 순간 본능적인 위험을 직감했다.
“- 성벽 위를 비워! 당장!”
이어지는 랑트리뷔아체 장교의 목소리.
“점화하라!”
적병들은 기계 끝자락에 있던 심지가 횃불을 가져다댔고, 심지는 불에 타들어가며 흑색 가루로 옮겨 붙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육중한 철포가 불을 뿜으며 연기를 가득 피워냈고, 천둥 벼락과 같은 소음이 전장을 지배했다. 매서운 속도로 날아온 철구들이 성벽에 잇달아 처박혔다. 공격자와 방어자, 모두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수백 년을 버텨온 난공불락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병사들을 먼저 내려 보낸 아르투르는 아직 성벽 위에 있다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균형을 다 잡았다. 처음에는 버티고 섰던 아르투르지만, 점차 몸을 휘청거리더니 무너지던 성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방어자들이 그 광경에 모두 경악해서 입을 크게 벌리는 사이, 그리폰 깃발을 휘날리는 랑트리뷔아체 군대는 일사분란하게 도시로 접근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