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93화 (9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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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노의 북쪽 성벽 너머에선 피오렌치아의 백합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북쪽에만 수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넓게 모여든 모습은 큰 장관이었다.

“중대장님, 이거 싸워볼 필요도 없겠습니다. 이 정도면 두라노 놈들이 알아서 항복할 것 같군요!”

보초를 서는 청년은 위풍당당한 연합군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중년의 장교는 심드렁하게 막사 안에 누워있었고, 그는 건성으로 답했다.

“그러겠지. 상식적으로 왜 싸우겠나. 그보다, 안토니오, 자네 떠나기 전에 소꿉친구한테 고백했다던데, 그건 잘 되었나?”

장교의 말에 안토니오는 얼굴을 활짝 폈다.

“네! 그녀도 제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 하더군요! 날아갈 것 같습니다!”

안토니오의 말에 백인대장, 레니에는 자신의 일인 것마냥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정말 잘 되었군! 잘됐어! 그녀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더니 아주 잘되었군! 집에 마침 남는 검은달 극단의 표가 있는데, 자네에게 주도록 하지!”

“아앗, 괜찮습니다. 그게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친구야. 줄 때 받아. 자네가 잘 되었는데 내가 그것하나 못해주겠나?”

“역시 백인대장님밖에 없으십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안토니오의 연애를 두고 한창을 떠들다가, 저무는 석양을 보며 불현 듯 말을 멈추었다.

“이 시각이면 근무 끝나고 선술집에 모여 술 한 잔 할 시간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윗 놈들의 욕심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두라노 놈들도 미련하긴 마찬가지야. 그냥 피오레 가문이 시키는 대로 하면 편해질 것을… 어차피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받아들일 것이지.”

레니에는 한숨을 쉬었다. 피오렌치아의 군대는 도시를 지키는 군대였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건만 왜 이곳에 와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에 집권한 두라노 참주가 왕의 사생아라던데, 현실 감각 없는 도련님이어서 이 사단이 난 거 아닙니까? 두라노 놈들도 참, 왜 그런 놈을 지도자로 모셔서 이 난리를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놈들 특이한 거야 옛날부터 그랬지. 아무튼 전쟁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 결국 조금 싸워보면 두라노 놈들도 역부족이란 걸 알게 될 거고, 그럼 항복할거야. 전쟁 배상금이 나오면 우리도 푼돈이나마 좀 챙길 수 있을거고…. 그렇게 자네도 그렇게 알뜰살뜰 모아서 장가갈 준비 해야지.”

“어우, 너무 이르십니다! 갓 시작한 교제인 걸요!”

“하하하. 십대도 아니고, 스물 둘이나 되었으면 결혼을 전제로 만나야 되는 거야. 특히 여자 입장에선 더 급할 거라고. 그럼 근무 잘하게. 신임 장교 와있으니까 조심하고.”

“아, 그 십인 대장님. 너무 빡빡하시던데요. 아무튼 잘 하겠습니다!”

그들은 서로 깔깔 웃은 뒤에 헤어졌다. 안토니오는 보초 근무를 섰고, 레니에는 부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고충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와중, 젊은 장교가 격분한 표정으로 레니에를 찾아왔다.

“백인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병사들이 모두 풀어져선 제대로 근무를 서지 않습니다. 목을 베어, 본보기를 보이시지요.”

그러나 젊은 장교의 모습을 보며 레니에는 느긋하게 손을 저었다.

“워, 워. 진정하게. 갓 부임해서 의욕이 넘치는 건 알겠네. 하지만 그건 너무 과해. 우리도 군대에서나 상급자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면 같은 동료 시민인걸.”

“사형이 과하다면 끌어내서 채찍질을 하겠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근무시간에 투구를 벗어두고 졸지는 않을 겁니다!”

한숨을 쉬는 레니에.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게. 지금 다들 힘들고, 지쳐있다고. 행군해온 지 이주나 지났어. 풀어줄 때는 풀어줘야, 애들도 싸울 의욕이 나지.”

젊은 장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항의한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젓는 레니에.

“이보게. 마르코. 일에 충실한 건 좋지만 너무 심취하진 말게. 자네만 군인도 아니고, 군대가 삶의 전부인 것도 아니야. 어차피 두라노 놈들은 조금 싸워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항복 할 텐데 뭘 그러나?”

표정을 찌푸리는 마르코.

“너무 낙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 안일한 자세로는 패배 할 지도 모릅니다.”

“뭐, 솔직히 우리 알반가? 이 전쟁 어디까지나 피오레 가문의 이익을 위한거지,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뭐 하러 목숨 걸고 싸우려고 해?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월급 타먹고, 무사하게 돌아가면 되지. 자네 출세하겠다고 병사들 너무 들볶지 말게. 정도껏 하라고. 정도껏.”

마르코는 이를 아득 간다.

“그게 할 소리입니까? 이번 전쟁이 우리 조국, 피오렌치아가 강대국이 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시는 겁니까?”

냉소를 짓는 레니에.

“자네도 뭐 위대한 피오렌치아, 국가 만세. 그런 거 믿나? 요즘 젊은 친구들답지가 않군. 피오레 가문 놈들 헛소리는 진지하게 듣지 말게. 내가 전쟁 하루 이틀 해본 줄 아나? 결국 다 돈 있는 놈들 싸움에 돈 없는 놈들만 죽어 나가는 거지. 어차피 진짜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지면 다 목숨 아깝고 돈 아까우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밀리겠다 싶은 쪽에서 손 내미는 게 전쟁일세. 분란 일으키지 말고 돌아가게. 명령이야.”

마르코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백인대장이 이래서야 사병들에게 자기 말발이 먹힐 리가 없었다. 특히 레니에는 사병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경을 받았다.

‘한심한 놈들. 자기들에게만 잘해주면 다 좋은 지휘관인줄 알지.’

더욱 환장할 것 같은 일은, 대부분의 장교들이 마르코보다는 레니에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르코가 투덜거리며 막사를 나섰을 때, 두라노의 성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완전무장하고 군마에 올라탄 기사 한명이 도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항복 사절인가?’

하지만 말을 달리는 기사의 뒤로 마상창을 쥔 수십 명의 기수들이 뒤따라 나왔다. 마르코는 즉각 병사들을 집합시키려 했지만, 병사들은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아, 별 일 있겠습니까? 정찰이나 좀 하다가 돌아가겠지요.”

“이놈들이 감히! 항명이냐! 당장 무기 챙겨서 모여!”

그에 짜증 섞인 말투로 답하는 안토니오였다.

“아! 백인대장님 지시도 없지 않습니까? 옆 백인대도 보십쇼. 모두 느긋하게 있는데, 왜 장교님만 그러십니까?”

피오렌치아 군대가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아르투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아무런 방해 없이 적진의 한복판을 향해 나아갔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선두에 서서 말을 달렸고, 점차 적진에 가까워지자 에쿠잘루스를 재촉했다.

“들어라! 두라노의 가장 용맹한 전사들이여! 저 한심한 놈들은 우리의 숫자를 보고 방심하고 있다! 영광을 위해, 도시를 위해,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 너희는 나의 형제들이다! 나를 따르라. 너희에게 기필코 승리를 가져다주리니! 저 한심한 자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자!”

“두라노를 위하여! 아르투르를 위하여!”

태평한 모습의 피오렌치아 군과 달리, 아르투르와 그의 직속 기병대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대지를 달려 나갔다. 백여 명의 기병들은 무방비 상태인 적군들 사이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고,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놓고 걸어온 기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습이다!!!”

피오렌치아 병사들은 상황 변화를 급격히 받아들였다. 아, 적들이 정찰을 하러 나온 게 아니었구나! 저놈들은 죽을 게 뻔한 사지로도 돌격해오는 미친놈들이구나! 실전 경험이 풍부한 피오렌치아의 장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즉각 깨달았다.

“후퇴! 후퇴하라! 후퇴해서 재정비한다!”

“옙!”

피오렌치아의 애국심 넘치는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안토니오는 걱정스럽게 레니에에게 물었다.

“백인대장님, 저희가 물러나면 사령부는 누가 지킵니까?”

태평하게 답하는 레니에.

“꼭 우리가 지켜야하나? 아군이 3만 명은 있는데, 알아서 지켜주겠지.”

“그도 그렇군요! 도망갑시다!”

“어허! 도망이라니! 전열을 재정비하는 걸세!”

피오렌치아 병사들은 전열 재정비건, 후퇴건, 도주건, 아무튼 아르투르를 피해 부리나케 달아났다. 피오레 가문이 싫은 자들, 월급이 적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냥 겁이 나는 자들, 동기는 다양했다. 아무튼 그들은 모두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싸워야하긴 하겠지만, 자기가 먼저 싸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적들의 상태가 이상해서 한번 찔러보러 나온 건데, 예상 외로 환영을 받는군.’

적들이 기회를 주었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아르투르는 이제 적병에게서 말머리를 돌려, 적의 사령부를 향해 여명을 내밀었다.

“형제들이여! 도망치는 겁쟁이들은 내버려둬라! 나를 따라오라! 적장의 목을 가지러간다!”

“와!!!!!!!!”

질풍 같이 달려나가는 에쿠잘루스의 뒤를 따라 기병들이 질주했다. 모두가 도망치던 건 아니었다. 엄격한 훈련을 받은 피오레 가문의 사병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굳건한 대열을 이룬 장창의 벽이 아르투르를 맞이했다.

“멈추지 마라! 돌격!”

“피오레 가문에 이 목숨 바치리!”

전투 의지가 충분한 두 무리가 부딪히자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가로 막는 창대를 모조리 짚단마냥 베어내며 돌격했고,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 적들을 도살했다. 그가 여명을 휘두를 때마다 두 명, 세 명씩 쓰러져나갔다. 모든 기병들이 그와 같은 묘기를 보이진 못했으나, 적어도 아르투르가 열어준 승세를 타고 승리를 얻어낼 정도의 기량은 있었다.

“침략자들에게 피로서 대가를 치르게 해라!”

“피오레 가문에 충성을!”

피오레 가문의 사병들은 처절할 정도로 싸웠지만, 미쳐 날뛰는 아르투르를 상대로는 패색이 짙어져만 갔다. 사병 부대의 지휘관은 주변의 아군을 향해 처절하게 외쳤다.

“다들 뭘 하느냐! 우릴 도우란 말이다! 당장 움직여! 머뭇거리는 놈은 군법으로 베겠다!”

하지만 다른 부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피오레 가문의 사병들이 정면에서 버텨주고 있으니, 측면과 후방을 노린다면 자신들은 비교적 안전할 것임을. 하지만 그들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피오렌치아의 병사들이 본 건, 적군에게 악착 같이 버티면서 쓰러져가는 아군들이 아니라, 끔찍한 백병전의 현장 그 자체였다. 피와 살이 쏟아지는 현장을 배경으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내장을 쏟으며 울부짖는 소리와 고통스럽게 잘려나간 사람의 머리가 눈과 귀를 지배했다.

“배, 백인대장님? 돌격을 명령하셔야….”

호전적인 십인 대장, 마르코조차 검을 빼어들고는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사람을 죽여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출세에 눈이 먼 장교가 그 모양이니, 나머지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르투르는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병들을 쓸어가면서도, 머뭇거리는 자들의 눈빛을 바라봤다. 이들은 그저 훈련 받은 민간인일 뿐, 전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서면 그때서야 가세할 것이니, 덤비는 놈만 박살내면 끝나는 일이었다,

백인대장 레니에는 쯧, 하고 머리를 긁었다.

“제 1 기병대장님께 돌격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고 오게.”

얼마 뒤, 전령이 돌아왔다.

“제 1 보병 백인대장님께서 돌격하시면 뒤따르겠답니다! 선배님께서 모범을 보여달라고 하시더군요.”

“에헤이, 젊은 사람이 앞장을 서야지!”

피오렌치아 장교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동안 사병 부대는 완전히 붕괴했다. 아르투르는 그들을 돌파해서 지휘 막사로 질주했다. 최고 사령관인 굴리엘모와 그의 참모들이 경주마에 올라 허겁지겁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한심한 놈들.”

아르투르는 한번 비웃어주고는, 지휘막사에 걸려있던 피오렌치아의 상징, 백합 깃발을 뺏어들었다. 부관 조레스는 막사를 뒤져서 금고를 챙겨들었다. 전리품을 챙긴 아르투르는 뒤로 돌아 빠져나가려고 했고, 그제야 피오렌치아의 병사들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머뭇거리며 앞길을 막았다. 모든 피오렌치아의 병사들이 그들을 둘러싼다면, 이곳이 그들의 무덤이 되리라.

그러자, 아르투르는 말을 멈추고 도망치던 굴리엘모를 가리켰다.

“피오렌치아 인들이여, 너희 대장이 칼 한번 맞대지 않고 도망치는 모습을 봐라! 저런 겁쟁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러 왔느냐? 피오레 가문을 위해 나와 칼을 맞댈 각오가 되어 있느냐?”

여명의 날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흥분한 에쿠잘루스는 아르투르의 말만 떨어지면 모두를 짓밟을 태세였다. 피오렌치아의 병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사이, 아르투르는 질주를 시작했고 적병들은 양 옆으로 흩어지며 사실상 길을 내주었다.

“백인대장님. 적들이 우리 도시의 깃발을 가져갑니다!”

국기가 빼앗기는 것을 본 안토니오가 용감하게 창을 들고 나서려는 순간, 레니에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끌었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러지 말게. 깃발이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자네 목숨은 하나라네. 여기서 죽어봐야 개죽음이야. 무사히 여자친구에게 돌아갈 생각이나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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