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처음에는 그저 레말리트를 열성적으로 따르던 장교들이 불만을 드러낸 것 정도였지만, 그들은 은밀히 군대 내부에서 동조자를 구하기로 했다. 지금의 상황에 불만을 품은 혁명가들은 적지 않았기에 포섭되는 이들이 많아져갔다. 그러던 중, 한 장교가 이 제안을 듣고 혁명 동지이기도 했던 시라노를 찾아와 제안을 털어놓고 상의했던 것이다.
“시라노 경.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뭘 물어보는가! 이건 반란이야!”
시라노는 즉각 아르투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아르투르는 조레스를 비롯해 자신에 대한 확고한 지지, 혹은 충성을 드러내는 병사들만 이끌고 현장을 습격해 그들을 검거했다. 소수 몇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루자 가운데 장교만 열둘이 넘었다. 그들은 모두 얼마 전까지 아르투르에게 경례하며 서로 군인으로서 의기투합해온 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아르투르의 심정은 처참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무엇을 잘못 하였기에 배신을 했단 말인가? 나는 항상 그대들을 친구로서 대했고, 두라노의 전통을 최대한 존중하고자 했건만.”
아르투르의 떨리는 눈동자에 그들 역시 지지 않고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이건 당신의 명예나 선의에 대한 것이 아니오. 그보다 높은 차원의 것, 사람들을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한 문제지. 이대로 가다간 두라노는 일인 군주국이 되고야 말 거요. 우린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고.”
“여론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것 역시 자네들이 말하는 민의의 선택이 아닌가?”
“우리가 그런 꼴이나 보고자 평생 모든 것을 바쳐 싸워 온 것이 아니오. 죽이려면 죽이시오. 이미 목숨은 각오한 일이니.”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다시는 반란을 꿈꾸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은 뒤, 풀어주고 싶었다.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고자 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가오는 전쟁에 그들이 너무 중요했다.
‘다들 요직에서 부하들의 존경을 받으며 일하던 자들이야. 전쟁을 앞두고 대체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고. 기사들처럼 복종의 맹세를 받고 풀어준다고 지킬 자들도 아니야. 이들은 개인의 명예보단 이념을 따르니 말이야.’
가장 쉬운 선택은 이들의 반역을 공개적으로 폭로한 후 반역죄로 처형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반대파를 한 번에 쓸어버린 자신은 전권을 한 손에 쥘 것이고, 그 뒤에는 사실상 두라노의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 수행도 훨씬 쉬워지겠지.
하지만 아르투르는 대의를 위해 싸우던 자들의 삶을 그렇게 끝내기를 원치는 않았다. 아르투르는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의 대의는 뭔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자들을 존중했다.
때문에 아르투르는 자진해서 어려운 길을 택했다. 일단 감옥에 감금해두고, 처분은 나중에 내리기로 했다. 현실 정치를 논하는 여러 조언이 있었지만 모두 물리쳤다.
‘어차피 모험을 시작한 뒤에, 내가 해온 일 중에 쉬운 길을 택한 적이 있던가? 천만에. 그랬다면 지금 루이스 형님과 싸우거나 도파뉴를 다스리고 있었겠지.’
여전히 군대 내부에는 옛 혁명가들이나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래서야 군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선제공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아르투르의 군대는 도시 안에 갇혔고 피오레 가문의 군대는 소집을 마쳤다. 적어도 4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대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날, 두라노에는 최후통첩이 도달했다.
***
강대한 네 도시에서 온 사절단은 정복자와 같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눈의 탑에 들어섰다. 그들은 각각 제라니아와 카니아, 랑트리뷔아체와 피오렌치아의 대표였다, 이들은 레무리아의 일곱 보석이라고 불리는 강대한 도시들이었고, 그 중 랑트리뷔아체와 피오렌치아는 어지간한 왕과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평가되었다.
평소에는 서로 손톱만한 이권을 위해서 물어뜯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한마음으로 합심하여 두라노에 동일한 요구를 하러 온 참이었다.
“두라노의 독재관은 시민들의 안녕을 위해 무장을 해제하고 즉각 항복하라. 이것은 최후통첩이며, 이를 무시하고 벌어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독재관과 그를 지지하는 두라노 인들에게 있다.”
아르투르는 오른팔을 괸 채로 삐딱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네 명의 사절 가운데 전사다운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제대로 싸울 줄 모르는 먹물들이었다.
“별일이 다 있군. 평소에 사사건건 견제하고, 증오해마지 않던 네 도시가 서로 손을 잡다니. 내가 그렇게 두려웠는가?”
피오렌치아의 대표인 굴리엘모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어리석은 놈.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걸 모르는 구나. 네 건방진 태도가 얼마나 가나 보자.”
굴리엘모의 말은 레무리아에 한정해서는 결단코 맞는 말이었다. 이익만 된다면 부모님의 원수와도 손잡고 평생지기도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곳. 그런 것을 모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땅. 음모와 협잡의 땅에서 기사도를 주장하는 아르투르는, 한낱 광대로 보였을 뿐이다.
다음은 카니아 사절이었다. 그는 예스러운 복장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구릿빛 피부색은 그녀의 혈통이 레무리아 토착민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굴리엘모와 달리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말의 억양을 들어보니 동부 대륙에서 온 모양이었다.
“고귀하신 아르투르 공이여, 저희가 듣기로는 본디 두라노 출신이 아니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만큼, 공께서 목숨을 다 바쳐 싸우실 이유는 없습니다. 세력이 기울었으니 조건을 수용해주십시오. 그리 하면 저희도 공에게 충분한 보상과 호의를 베풀겠습니다.”
고개를 가로 젓는 아르투르.
“거부하오. 나는 독재관에 취임할 때 두라노 인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해주기로 맹세했소. 이 땅에선 맹세를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알지만, 내게는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것이오. 오히려 이 명분 없는 싸움에 가담한 카니아 인들이 자진해서 물러나는 것이 합당해보이오.”
“명분은 없을지 모르나 국익은 있지요. 아르투르 공도 어떤 길이 귀 공께 더 이득이신지 고려하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아르투르는 불쾌한 시선과 침묵으로 답했고 카니아의 사절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나선 자는 위풍당당한 체구를 지닌 노장으로 예복을 입은 다른 사절들과 달리 굉장한 품질의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연합군의 총 사령관이자 가장 위대한 공화국 랑트리뷔아체의 대표인 아그나델로 델 리오날이오.”
아르투르도 자세를 고쳐잡으며 아그나델로를 마주 보았다. 그는 다가오는 싸움에서 이 자가 가장 큰 난적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아그나델로에게선 수많은 전투를 치룬 노기사들과 흡사한 분위기가 흘렀다. 비록 지금은 늙었지만 한때는 위대한 용사였을 것이고, 지금도 지휘관으로서는 분명히 걸출한 인물일 것을 확신했다.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다시 말씀 드리겠소. 사생아 경. 우리의 최후통첩은 네 가지 조건을 요구하오. 첫째, 두라노는 모든 군대를 해산할 것. 둘째, 도시는 황금백조 은행에게 진 모든 빚을 즉각 상환할 것. 셋째, 영토의 절반을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에, 나머지 반은 카니아와 피오렌치아에 할양할 것. 넷째, 독재관 아르투르는 2주 내로 반도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아르투르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수용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거부한다면 우리는 두라노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릴 생각이오. 그런 미래를 감당할 수 있겠소? 만약 이 조건에만 동의한다면 우리는 가급적 선정을 펼칠 것이고 공에게는 큰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겠소.”
굴리엘모는 아그나델로의 뒤에서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계속 아르투르를 비웃었지만 그는 오직 아그나델로에게만 신경을 썼다. 급이 맞아야 상대를 해줄 것 아닌가. 어차피 전장에서 만나면 단번에 두 동강 날 놈이었다.
“한 가지 묻겠소. 장군. 당신은 뛰어난 전공과 명예로운 행동으로 내 고향에서도 이름이 높은 분이오. 내 아버지를 상대로도 무승부를 이뤄낸 적도 있고, 포로도 학대하지 않고, 민가에 대한 약탈도 엄금한다고 하더군. 그런데 어째서 그런 무도한 위협을 하는 것이오? 의견이 맞지않아 전쟁을 치르더라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아그나델로 역시 절도 있는 자세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가지요. 첫째는 피오렌치아가 내건 전쟁 명분이 합당하오. 채무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하고, 갚을 수 없다면 무엇이든 해서라도 변제하는 게 사람의 도리요. 왕족인 당신에겐 돈이 하찮아보일지 모르나, 돈은 곧 우리의 피요 목숨이니 누군가의 목숨을 빚졌다면 어떻게든 갚는 것이 합당한 도리외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우리의 경제 체제는 근본부터 무너질 수 밖에 없소.”
아르투르의 표정은 점차 싸늘히 변해갔다.
“그렇다고 칩시다. 둘째는?”
“국익이오. 우리의 경쟁국인 두라노를 멸망시킬 기회인데 어째서 사양하겠소? 나의 명예는 개인의 것이지만, 국익은 공공의 것이니 국익이 우선되어야 마땅하오. 무엇보다, 데네토르의 왕족인 당신이 두라노에 있는 것 자체가 우리 시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위협이오. 당신의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쓰러졌는지 아는가?”
“정당한 명분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명예롭게 싸우다 쓰러진 자들이오. 이제 와서 일방적인 학살이었던 것처럼 호도하지 마시오.”
비웃음을 짓는 아그나델로.
“애초에 전쟁이란 모두 악에 불과하고, 당신네 왕조는 우리에겐 무도한 침략자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소? 우리의 병력은 8만이 넘고 보급품과 공성 장비도 충분하지. 당신도 뛰어난 지휘관이니 승산이 없다는 건 알 터인데?”
“그건 싸워봐야 아는 일이지. 더 이상 논의할 것도 없겠소.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 이권이라면 두라노 인들을 설득해보고자 했지만, 당신들이 바라는 건 그게 아니야. 두라노를 완전히 짓밟고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지. 그건 아무리 전쟁이라 한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아그나델로는 단숨에 표정을 찌푸렸다.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든 이곳의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소. 이곳은 네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다. 애송이. 현지의 문화도 모르면서 함부로 까불지 마라.”
“문화는 시대가 변하면 달라지기 마련이지. 당신들의 행동은 아주 불명예스럽소. 내 뜻을 꺾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 무력으로 나보다 강하다는 걸, 당신들의 기만적인 정의를 강요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보시오.”
아르투르의 말을 들은 사절단은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곧장 뒤돌아섰다.
“서로를 위한 최선의 방안을 제안하러 왔건만, 모욕만 받고 돌아가는군. 이래서 기사 놈들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아그나델로의 말에 굴리엘모가 맞장구 쳤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장군? 저 자는 실로 오만한 자이니 우리가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떠나간 사절단을 보며, 아르투르는 곰곰이 대화를 되돌아 봤다. 명예를 추구하는 자신과 다르게, 그들이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건 분명했다. 자신이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러 하리라.
그렇다고 한들 자신의 것을 저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기사도는 자신의 길을 비추는 길이요 명예는 삶의 나침판이니, 저 무도한 상인들에 맞서 결단코 지켜내고 말리라! 무장을 마친 아르투르는 성벽으로 나가 까마득하게 몰려온 적군들을 바라봤다. 4개 도시의 연합군은 사방에서 두라노를 포위하고 있었고, 수십 개의 용병단이 각자의 깃발을 나부끼며 막사를 차리고 있었다. 완벽한 열세였지만, 뭐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 이겨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르투르는 예리한 시야로 사방을 돌며 적들의 진영을 살폈다. 그들은 오랜 시간 행군 해 와서 지쳐있었고, 도시를 포위하느라 군대를 분산시켜두었다. 아르투르의 발걸음은 북쪽 성벽에서 멈추었다. 피오렌치아의 백합 깃발이 휘날리는 수많은 군대가 진영을 꾸리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관찰하던 아르투르는 믿을 수 없다는 탄성을 내뱉는다.
“이야, 정말 대단하군. 과연 피오렌치아야!”
아르투르를 보좌하던 조레스가 불안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역시 적들이 너무 많은 겁니까?”
아르투르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조레스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니! 생각 외로 피오렌치아 놈들이 형편이 없어서 그렇다네! 조레스, 도시 내에 있는 기병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게! 지금 당장!”
아르투르는 진심으로 상황이 우스워서 피오렌치아의 군대를 보며 마구 웃었다. 그렇게 표독을 떨어내던 놈들이 내보이는 군사로는 너무 형편이 없던 것이다! 데네토르의 농부들을 데려다놔도 저놈들보단 나은 병사일 터였다.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기로 했다. 물론 전쟁에 공짜는 없었다. 아르투르는 해가 저물 무렵 정예병들을 이끌고, 북쪽 성문을 열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