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91화 (91/248)

91

오랫동안 레무리아 반도는 서부 문명의 중심이었다. 세상 전체를 지배했던 옛 레무스 제국의 발원지였고, 지금은 구세주 신앙의 심장인 교황청이 자리 잡고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그런 상징성들보다도 경제력이야말로 레무리아의 진정한 가치라고 평가했다.

레무리아는 비옥한 땅이었으며, 양 대륙의 중앙에 절묘하게 위치한 곳이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세계 무역의 중계자라는 특수한 입지 아래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살았다. 기회를 쫒아서 대륙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땅. 그곳이 레무리아였다.

용병, 상인, 농부, 그 외의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땅이자 부의 상징인 곳.

이곳에선 황금과 황금을 만들 수 있는 구조야말로 진정한 권력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금으로 살 수 있는 무언가에 불과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 있는 땅이었으니까. 정말로 뭐든지 말이다.

그 냉혹한 체제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인물이, 바로 라델로의 앞에 있는 노인이었다. 라델로는 절을 하듯이 바짝 엎드린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반면, 노인은 노예의 등을 밟고 앉아,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 십 가지의 진귀한 음식이 깨끗한 유리그릇에 담긴 채 있었지만,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한 한 끼 식사에 불과했다. 노인은 음식을 조금만 음미한 뒤, 곁에 있던 용모가 뛰어난 여성 노예가 들고 있던 통에 퉤-하고 뱉어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노인은 라델로에게 시선을 주었다.

“오늘은 맛이 별로군. 요리사와 재료는 변한 게 없고, 메뉴는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 물리지도 않았건만. 왜 일까?”

독백하듯 중얼거리듯 노인의 목소리를 들은 라델로는 오금이 저려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짝 등을 엎드린 채 입을 달싹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

“왜일 것 같은가? 라델로?”

겨울서리만큼이나 차가운 노인의 목소리에, 라델로는 온 몸을 떨어댔다. 죽음의 공포가 온 몸을 엄습한 지, 사시나무 떨 듯이 떨게 되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오르마델로 어르신! 제발,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저는 항상 어르신의 충직한 종복이었지 않습니까!”

간절한 애원에도 노인의 차가운 표정은 미동도 않는다. 분노도, 실망도 담기지 않은 경멸만 가득한 표정.

“너는 이전에도 날 실망시켰지.”

노인이 무심히 말하며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자, 거구의 흑인 근위병들이 절도 있는 자세로 걸어와 라델로의 양팔을 각각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아, 아아, 안됩니다! 제발! 제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라델로는 무력하게 정원의 중앙에 있는 인공 호수로 끌려갔다. 호수의 물은 굉장히 투명해서 바닥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심은 깊지 않았지만 바닥에는 사람의 뼈가 가득 쌓여있었고, 사람의 살점을 파먹는 피라니아 무리들이 먹잇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델로가 오줌을 지리며 혼절하기 직전, 노인이 다시 손을 들었고, 노예 근위병들은 기계처럼 행동을 멈춘 뒤, 노인의 앞으로 라델로를 도로 끌고 왔다.

“가만. 널 죽이기 전에 내 며느리의 의견을 물어봐야겠구나. 어떻게 생각하느냐? 샤를로트.”

화려한 복장을 한 여인이 노인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드레스의 양 끝을 살짝 들어 올려 예를 표한 후, 정중히 몸 앞으로 양손을 모아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델 라이랜더 가문의 샤를로트가 가장 아름다운 도시 피오렌치아의 집정관이자 황금백조 은행의 주인인 오르마델로 델 피오레님에게 인사드립니다. 제 부족한 의견이 어르신께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서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시아버지와 예비 며느리 사이에 차리기엔 과한 예의였지만 오르마델로는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르마델로는 남들이 자신을 대하기 어려워할수록 권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말해봐라.”

“물으시니 감히 답하겠습니다. 아직 저 자는 어르신께 쓸모가 있는 인물이니 살려두시지요. 두라노 내에 연줄을 가지고 있으니 다가오는 전쟁에서 요긴할 것입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식사를 마친 노인은 포크를 내려놓으면서 무심히 라델로를 바라봤다.

“운이 좋군. 라델로. 마침 자애로운 내 며느리가 집에 들렀던 것을 다행으로 알게. 이번에도 실패하면 네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묻겠다. 눈앞에서 사라져라.”

라델로는 오르마델로의 자비에 깊이 탄복했노라 말하며 절을 했고, 그 뒤에는 울먹이면서 빠져나갔다. 오르마델로는 그런 라델로를 벌레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가 떠나자 샤를로트는 오르마델로의 건너편에 앉아 포도주를 한 잔 따라주었다.

“너는 저 돼지가 이번 경고를 제대로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샤를로트는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녀도 눈치 채었다시피 오르마델로는 진짜로 자신의 의견을 물은 게 아니었다. 단지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어르신께서 뭐라고 하셨는지는 알아들었을 겁니다. 다만 그럼에도 일을 잘 해낼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군요.”

“제대로 보았구나. 저 돼지는 자신의 간교가 뛰어나다고 믿지만, 실은 야비한 자일뿐이다. 오직 바보들이나 저놈의 충성심에 속겠지. 오늘은 무슨 용무로 왔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장부를 꺼내보이는 샤를로트.

“제라니아 수금에 대한 보고입니다. 참주 다네스는 올해의 이자를 보냈고, 원금 상환은 오년만 더 연기해달라고 하더군요. 무관세 협정, 광산 채굴권, 혹은 대농장 중 하나를 받기로 했고, 어르신의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어느 것을 받을까요?”

오르마델로는 무미건조한 태도로 포도주로 입을 적셨다.

“이번에도 깔끔하게 잘해냈구나. 너는 항상 가르쳐준 것 이상을 해냈지. 다만 상황이 변했으니 놈에겐 다른 걸 요구해야겠구나.”

샤를로트는 무릎에 손을 올린 채 오르마델로의 말을 기다렸다.

“상환을 늦춰주는 대가로 놈의 외인부대를 두라노 원정에 참가시켜라. 다네스는 형편없는 통치자지만 군사적 능력만큼은 볼만 하지. 해낼 수 있겠느냐?”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직접 제라니아로 다녀와야겠군요.”

말을 마친 샤를로트가 일어나려고 할 때, 노인이 다시 말한다.

“아니, 놈을 설득하는 건 대리인만 보내면 될 일이다. 그보다 네 능력이 필요한건 두라노의 새로운 참주 쪽이다. 네 약혼자인 굴리엘모가 놈을 구슬려서 채무를 받아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걸 기억하느냐? 어차피 그 자도 권좌에 앉고 싶어서 한 일이니 우리에게 대항하는 바보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 반면 너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설득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었지. 결과를 보자. 너는 옳았고, 굴리엘모는 처참히 틀렸다. 두라노는 단결해서 전쟁을 준비 중이야. 전쟁은 질 수가 없겠지만, 원정 비용은 손해가 클 거다.”

“과찬이십니다. 실은 굴리엘모의 말이 더욱 타당했고, 저는 단지 아녀자로서 충돌을 피할 것을 제언했던 것일 따름입니다.”

시종일관 표정을 드러내지 않던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누굴 바보로 아느냐? 내 아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려 했건만 그때마다 약혼자인 네가 더 많은 것을 배웠지. 두라노의 새 군주는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자기 형들은 왕국을 하나씩 받았는데, 사생아인 자긴 아무것도 받질 못했으니 남은 건 명예를 추구한다는 허영심뿐이지.”

샤를로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어가는 오르마델로였다.

“사생아 왕자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절대 남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일 놈이 아니다. 그게 자기 목숨이건, 다스리는 백성들의 것이건 말이다. 굴리엘모가 사람을 완전히 잘못 본 게다. 내가 협상에 앞서 상대부터 파악하라고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어떠냐? 너라면 어떻게 했겠느냐?”

“사정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원금의 일부라도 상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이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만약 상대가 우리와 같은 상인 귀족이었다면 세력의 차이를 보고 알아서 입장을 굽혔겠지만, 기사 군주들은 다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단 순간이지만 불명예는 영원한 것이고, 살아있는 백성들의 아우성은 시끄러울 뿐이지만, 후세 사람들이 찬미할 용맹은 갈구하는 것이니까요.”

“잘 보았다. 굴리엘모는 배웠던 대로, 자신이 경험했던 대로만 한 게다. 살아남아 권세를 누리는 게 목적인 놈들에겐 여태 그게 잘 통해왔으니까. 하지만 열등감에 가득 차 광적으로 명예만 추구하는 사생아를 궁지로 밀어붙여? 놈은 일신의 명예를 위해 동료 귀족 수십 명을 베어낸 미친놈이다. 살아 돌아온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샤를로트는 침묵을 지키다가, 조금 뒤에 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낸 까닭이 있으시겠지요. 여쭤도 되겠습니까?”

피식 웃는 오르마델로.

“눈치 빠른 아이라니까. 네가 우리 가문이 아닌 게 정말 애석하구나. 작은 목적은 굴리엘모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구세주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너무 넓어서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는 미친놈들이 있다는 걸 배워야지. 큰 목적은 바로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두 애송이들은 정확히 내가 원하던 대로 행동해주었다. 덕분에 이제 전쟁은 막을 수 없어.”

오르마델로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냉정함의 가면 뒤에 숨어있던 노인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을 모르는 탐욕과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야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노인의 표정은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요즘 따라 우리 가문의 위명을 잊은 자들이 많이 보이더구나. 특히 두라노의 통치자들이 그랬지. 다시 한 번 본보기를 보일 때가 된 거다. 두라노는 재기할 수 없도록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될 것이고, 땅에는 소금을 뿌려 아무것도 나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 것이다. 그 뒤에 살아남은 놈들을 모조리 노예로 만들어버리면 모두가 피오레 가문의 이름 앞에 전율하게 되겠지.”

노인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 왕자에게 쓰디쓴 교훈을 줄 수 있겠다는 표정으로 쾌감 섞인 표정을 지었다.

“피오레 가문은 모든 빚을 돌려받는 다는 걸 모두가 다시금 알게 되리라.”

오르마델로의 결정이 내려지자, 여파는 신속했다. 경주마를 타고 달려 나가는 피오레 가문의 사신들이 대륙을 가로 질렀고, 방방 곳곳에서 동맹을 소집하고 용병들과의 고용이 맺어졌다. 끝을 모르는 피오레 가문의 재력을 증명하듯, 일찍이 일개 도시 국가가 소집해본 적 없던 어마어마한 군대가 모여들었다.

***

아르투르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던 것도, 손을 놓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시민들의 전쟁 열기를 실질적인 군사력으로 바꾸어내고 있었다. 두라노는 발달하고 부유한 도시였으며, 시민들은 스스로의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의기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조국을 지켜라! 외국인인 아르투르 공조차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우리가 뒷짐 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청년들이 잇달아 군대에 자원하는 통에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할 정도였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각출하는 이들도 끊이지 않았다. 병기창에서는 장인들이 조금도 쉬지 않은 채 무기를 만들었다.

외교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피오레 가문의 부당함을 역설하는 전언을 교회를 비롯한 각지의 거대 세력에 보내는 한편, 실질적으로 피오레 가문과 적대하는 세력들에 대한 포섭도 이어졌다.

‘외교로 뭔가 해볼 수 있으리란 것엔 회의적이지만,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단 났겠지.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충분히 해볼 만 해.’

아르투르는 군대를 이끌고나가 과감히 선제공격할 작전을 세웠다. 적들의 수는 많았지만 아직 광범위한 범위에 퍼져있었고, 지휘부도 제각각이기에 뭉치기 전에 각개 격파할 수 있는 공산은 충분히 있었다. 출정하기 전날 밤, 시라노가 비밀리에 아르투르를 찾아왔다.

“아르투르 공. 당장 출전을 취소하셔야 합니다.”

“기사인 자네가 소수로 다수에게 맞서는 걸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시라노는 아르투르에게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일부 고위 장교들이 피오레 가문과의 내통을 준비 중입니다. 당장 조치를 취하셔야만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