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90화 (9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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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에 있던 도시 참사회의 의원들도 군중의 연호를 들었다. 항복을 논하던 의원들은 시커멓게 몰려든 군중을 보며 몸을 떨었다.

“보십시오! 시민들이 몰려와서는 독재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당장 독재관을 지지하는 입장을 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성난 군중들이 몰려와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겁니다.”

참사회의 의원들은 대부분은 부유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자들로, 평범한 시민 개개인에겐 우월감을 가지고 지도하려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단결된 대중을 상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소시민은 별 것 없는 자기 고용주에게도 굽실거리는 소심한 자들일지 몰라도, 분노한 군중은 군주들을 상대로도 실력 행사를 하려고 하는 호전적인 자들이었고, 두라노의 정치가라면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에렌 의장! 당장 결의안을 씁시다! 의회는 전적으로 독재관의 결정을 지지하며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때, 상인조합장 라델로가 피를 토하는 듯한 열성을 담아 말했다.

“잠깐! 아무리 대중이 열광한다 한들, 이건 아니 될 말이오! 도시를 망국으로 몰고 갈 셈이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미 의원들은 겁에 질려있었다. 피오레 가문의 군대는 멀리 있지만, 저들은 단 오 분이면 자신들을 끌고 나가서 매질할 것이다. 사실상 자기네 목숨은 독재관의 결정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 나는 의견을 바꾸겠소. 에렌 의장. 나는 아르투르 공이 여전히 독재관으로 남으셔야한다고 생각하오! 피오렌치아의 무도한 사신에 맞서 두라노의 결의를 보여주신 위대한 행보를 칭송해 마땅하오! 이 점, 꼭 잘 전해주시오!”

“내가 먼저 말했잖소! 나를 좀 더 잘 말해주시오! 의장!”

하지만 에렌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다들 진정하시오. 여러분도 지금쯤이면 아르투르 공이 변덕에 따라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 분이란 걸 느꼈을 테니 말이오. 게다가 피오렌치아와의 전쟁이 무모한 일이라는 뼈아픈 지적이오. 이 점은 분명히 대책이 있어야 할 겁니다.”

라델로가 소리쳤다.

“다들 들으셨지?! 독재관의 측근인 에렌 의장조차 전쟁에는 반대한단 말이오! 이제 와서 군중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간 우린 모두 죽고, 재산을 빼앗기고야 말거요!”

하지만 에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렇다고 내가 독재관님을 몰아내야한다고 주장했던 당신 편을 드는 것도, 피오렌치아에 굴종하자는 이야기도 아니오.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을 궁리해야한다는 말이지.”

“하지만 의장! 당신은 누구보다 피오렌치아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잖소! 이 전쟁은 사랑하는 우리 도시를 파멸로 몰고 갈 거요! 잘 아시지 않소이까?!”

“나는 여전히 전쟁에는 회의적이오. 하지만 시민들의 뜻이 저러하다면 그것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민의를 대변하는 우리의 임무일거요. 분열되어 있던 두라노가 하나로 뭉쳤으니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외다.”

“아, 안 돼! 안된단 말이야! 이건 미친 짓이야! 당신들은 여태까지 이뤄 온 모든 것들이 아깝지 않은가?! 피오레 가문에게 대항하면 죽음뿐이라고!”

라델로의 호소는 이제 비명에 가까운 무엇인가로 변했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결국 에렌은 의원들의 청을 받아들여 독재관에게 비상 대권을 위임하고, 의회는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결의안을 작성해 나갔다.

결의안이 작성되자마자 의원들은 앞 다투어 자신의 서명을 써넣기 위해 서로 밀쳐대었다. 라델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리석은 놈들! 내가 돈까지 주면서 입장을 함께 해달라고 했건만, 이제 와서 입을 싹 씻는단 말이냐? 피오레 가문에 줄을 대기 위해 굽신거리던 놈들이 상황이 좀 안 좋아졌다고 이제 와서 날 외면한단 말이지. 두고 보자!’

라델로는 입술을 꽉 깨물며 의사당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두고 보자. 오늘 있던 일을 어르신께서 아시게 되면 너희를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거다!’

자신은 아르투르에 드러내놓고 반대 의견을 표명했으니 머지않아 체포될 지도 몰랐다. 아직 정신이 없는 사이 움직여야했다. 가족과 재산은 이미 해외로 빼돌린 뒤였으니 몸만 달아나면 될 것이다. 다만, 그 전에 아직 남아있는 공모자들을 만나야했다. 라델로는 사전에 약속해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수행원도 없이 골목 으슥한 곳에 이르자, 네,다섯 명 정도 되는 군복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레말리트의 혁명 동지들이었다. 라델로를 그들을 보자마자 따지듯이 물었다.

“다들 대체 뭘 한 겁니까? 군중을 선동해서 아르투르의 결정에 반대하게 만들고, 의회가 자진해서 피오레 가문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우매한 군중을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다고 그걸 못합니까?!”

하지만 공모자들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서로 강력한 공동의 적인 아르투르의 정부에 맞서고 있을 뿐, 결코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변절한 혁명가와 기회주의자의 공모라는 게 그 이상이 되기엔 아무 접점도 없었다.

“시끄럽다. 네놈 탓이잖나. 분명히 의회에서 여론을 주도해 놈이 도시에 환멸을 느끼게 하겠다고 했잖나. 네가 의회에서 여론을 흔들고, 우리가 군중을 움직여서 아르투르가 스스로 두라노를 떠나게 한 뒤, 정권을 잡는 게 우리 계획이었지. 그런데 네가 자리를 준 조레스라는 놈이 나와서 한 연설 한번으로 민심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어! 실패는 네놈 탓이다!”

라델로도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제기랄, 세상 물정 모르는 농부 놈 하나가 건방지게 내게 거역하는 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제까짓 놈, 참사회 의원 자리를 누가 가져다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까분단 말이야? 반드시 그놈에겐 벌을 줄 겁니다.”

“흥. 가난하고 못 배우면 다 네 꼭두각시처럼 조종할 줄 있을 줄 알았더냐? 이래서 기회주의자 놈들은 믿을 게 못 돼.”

변절한 혁명가들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정치적 입장만 달랐다면 오히려 라델로를 실컷 비웃으며 민중을 우습게 본 대가라며 기뻐했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한 듯이 항변하는 라델로였다.

“내가 단순히 도시를 팔아넘기려는 배신자인줄 아십니까? 나도 나대로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피오레 가문에 맞서선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 이상의 거대한 세력이에요! 그들의 우위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유일한 방법이란 말입니다!”

“네 쓸모없는 변명은 듣고 싶지도 않다. 이 뒤는 뭐지? 군중을 선동해 자진해서 도시를 바치게 하는 건 실패했으니, 이젠 암살이라도 할 건가?

라델로는 엄지를 깨물었다.

“아뇨. 아뇨. 그건 힘듭니다. 맨 손으로 사람머리를 부수는 고릴라를 단검으로 죽이겠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고, 음식도 항상 주의해서 먹는지라 독살도 힘듭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옛 혁명가들은 놈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못마땅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피오레 가문의 군대가 진격해오면 내응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군사 요직에 있으니 기밀 정보를 빼돌리고 거사에 참여할 병사들을 모아주십시오.”

“그건 빼도 박도 못할, 도시에 대한 반역 아닌가?”

“아, 대체 뭘 들었습니까?! 피오레 가문의 힘에 맞서선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그들의 충성스런 종복이란 걸 보여줘야만 두라노는 파멸을 피할 수 있습니다!”

혁명가들의 눈빛이 불신과 경멸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미 자신들은 잃을 게 없었다. 성공하면 두라노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죽는 것이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기밀을 빼돌릴 동안 넌 뭘할 것이냐? 뒷짐 진 채로 우리에게 명령만 내릴 건 아니겠지?”

“나는 피오레 가문의 어르신을 만나 뵙고 다음 지시를 받아오겠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건 절대 안전한 일이 아닙니다. 어르신을 단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테지요!”

혁명가들은 코웃음을 쳤다.

“늙은 노인네 한 명을 만나 명령을 받는 게 반역 모의보다 위험하다? 신기한 소리군.”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어쨌든 나도 이번 일에 내 목숨과 전 재산을 걸고 있습니다. 꼭 해내야만 하는 건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일처리에 차질 없도록 하십시오!”

혁명가들은 단숨에 인상을 팍 구기며 말했다.

“퍽이나. 네놈이나 잘해라. 발각되면 우리도 같이 목이 광장에 효수될 판국이다. 네놈의 엉성한 일처리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는다면 너는 물론, 네 가족들까지 전부 무사하지 못할거야.”

공모자들의 위협에 라델로는 분노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다가, 휙하고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변절한 혁명가들도 라델로를 욕하며 돌아섰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 마음 속 한 구석이 크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동지들, 우리가 잘하는 짓일까? 고향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거잖아. 지금 우리는 고향을 배신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그만 두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했다. 그러나 대장이 말했다.

“생각해봐라. 루드비코가 우리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사로잡으면 어떻게 했었는지 말이야. 우리의 지도자인 레말리트를 누가 죽였는지, 행동대장 엔조는 누구의 검에 쓰러졌는지 말이야.”

대장의 말에도 여전히 다들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참주를 따르던 마지막 한 놈까지 모두 죽여 없애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두라노 시민의 참된 긍지다! 진정한 두라노 인이라면 그래야만 해! 참주의 개들은 시민이 아니라 노예이고, 대중은 힘이 강한 쪽에 붙을 뿐인 축생에 불과하다. 우리야말로 마지막 남은 공화국의 수호자들이야. 약해 지지마. 동지들. 우리가 실패하면 두라노는 군주국이 될 거야. 그리고 두라노는 군주국으로 살아남느니, 공화국으로서 멸망해야한다.”

대장의 결의에 찬 목소리에 혁명 동지들도 마음이 점차 이끌렸다. 그들도 마음 속 한구석에선 불편함을, 머릿속 한 구석에선 궤변임을 깨닫고 있었다. 심지어 대장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향을 저버릴 구실로는 충분했다. 앞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구실.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왔건만, 그에 대한 보상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직접 보상을 받아낼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쟁취하면 그 뿐이었다. 여전히 자신들은 요직에 있었고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르투르가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을 말한 뒤에는 분열과 불만을 조장했고, 대장장이들이 쉬지 않고 무기를 만들면 그것들은 어딘가로 빼돌려졌다. 모든 민간인들이 나서 성벽을 보수하면, 그들이 밤중에 내용물을 빼서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엉성한 모습으로 바꾸어갔다. 전투가 벌어지면 아무 쓸모가 없을 터였다.

“이제 우리가 악당이 된 것 같은데.”

시내를 돌아다니며 격려하는 아르투르를 보던 한 참가자가 자조를 섞어 말했다.

“이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들려오는 냉소.

“교수대 아니면 권좌가 있지 않겠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그저,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을 뿐이다. 저 군중들이 저 사생아 왕자가 아닌, 우리를 두라노의 구원자로 대우해줬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겠지.”

모든 옛 혁명가들이 내통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시라노를 비롯한 여러 대원들은 여전히 아르투르에게 열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아르투르의 곁에서 함께 다니는 모습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그들은, 서로의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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