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89화 (8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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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재판이라고?”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굴리엘모.

“그건 미개한 너희 땅에서나 통하던 방법이고. 당연히 그런 식으로 정하면 고릴라 같은 너희 기사 놈들이 이기겠지. 그딴 걸 재판이라고 할 수 있나?”

“돈지랄 선거보다는 훨씬 공정하겠지.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도 잘 적어서 교회에 전달하도록. 두라노의 독재관은 결투 재판 외의 어떤 재판의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투의 방식과 날짜는 그쪽에서 정해도 좋다. 네가 직접 나오건, 대전사를 보내건 알아서 해라.”

굴리엘모는 키득키득 비웃었다.

“그래? 사생아 놈이라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네 아버지도 우리 가문을 감히 이렇게 대하지 못했거늘, 우리가 두라노 공화국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나보군.”

아르투르는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핏대를 올리며 외쳤다.

“네놈들이 인정하건 말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아르투르는 손에 쥐고 있던 채무 문서를 양 옆으로 거칠게 찢어버렸고, 굴리엘모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의 행동은 피오렌치아에 대한 선전 포고였다. 네 오만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오냐. 너희가 전쟁을 바란다면 기꺼이 받아주마. 빈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이곳의 전통이라면 그 전통은 내가 산산조각내주마! 검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계집애 같은 놈이 감히 내게 삿대질을 하며 전쟁을 위협해? 너희야말로 누구를 적으로 돌렸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굴리엘모는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분노한 아르투르를 보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저 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이는 건 잠깐이면 충분하리라. 빚을 져놓고 갚지 않겠다는 놈이니

사자라고 안전할 것이라고도 장담할 순 없었다. 결국 굴리엘모가 택한 것은 거칠게 뒤로 돌아서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대신에, 그는 사절단과 함께 도시를 떠나면서 시민들에게 외쳤다.

“너희 독재관이 무모한 전쟁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벌어질 모든 결과는 너희 두라노 인들의 책임이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빚을 꼬박꼬박 갚겠다고 서약하는 방법뿐이다. 황금백조 은행은 모든 채무를 돌려받는다는 것을 기억해라!”

전쟁을 경고하며 떠나가는 굴리엘모를 보며 시민들은 큰 불안감을 느꼈다. 이제 간신히 상황이 진정되어가나 했더니, 새로운 재앙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

굴리엘모가 전쟁을 위협하고 떠난 직후, 아르투르는 즉각 도시 참사회를 소집했다. 전쟁 준비를 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아르투르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많은 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오렌치아와의 전쟁이라니! 미친 짓입니다!”

특히 상인들의 반대가 극심했는데, 그들의 대표인 라델로는 아르투르의 지위도 잊은 채 격분해서 소리쳤다.

“당장 철회하십시오. 피오렌치아가 무엇을 요구하건, 우리는 그걸 들어줘야만 합니다. 레무리아 반도에서 그들의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걱정할 것 없네. 내가 그대들의 지도자가 아닌가? 나는 모든 싸움에 앞장 설 것이고, 확실한 승리를 거두어 놈들이 다시는 두라노를 겁박하지 못하게 하겠네.”

아르투르는 자신감 넘치는 호방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불안감을 자아냈다. 특히 나이가 많고, 정세에 밝은 자들일수록 그랬다. 심한 경우에는 원망에 가까운 눈빛을 내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원망하는 눈빛 속에 깃든 생각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자기 용맹에 취한 어린 기사 놈이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작정이구나. 애초에 저런 애송이에게 도시의 전권을 맡기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채무 상환 의사를 밝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여론은 마치 사전에 짜놓은 것 마냥, 아르투르를 은연중에 힐난하고 피오레 가문에 저항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아니, 아니에요. 피오레 가문을 모욕한 이상 그냥은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항복하고 그들의 통치를 받겠다고 나을 수도 있어요.”

“하기야, 피오레 가문이 너무 탐욕스러워서 그렇지, 도시는 잘 발전시킬 줄 알지요. 차라리 피오렌치아에 주권을 넘기고 그들의 통치를 받는 것도 고려해볼만 합니다.”

항상 자신의 편을 들어주던 에렌조차 이런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차마 아르투르의 결정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어놓을 순 없었지만, 피오레 가문과 싸운다는 것이 그에겐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아르투르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확, 그만둬 버릴까? 나는 지금 아무런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이 고생을 하고 있건만? 저딴 헛소리들이나 듣고 있어야 되는 건가? 대놓고 말하자면 난 피오레 가문이 내민 문서에 서명만 해놓고 떠나면 훨씬 편해. 보상도 두둑할거고.’

그리해서 아르투르가 마음을 굳히고 사임 의사를 밝히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아르투르 공께서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농민과 소상공인을 대표하는, 청년 의원 조레스의 목소리였다. 그는 의원들을 쏘아보며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제정신입니까? 피오레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되면 대대로 일궈온 농토를 잃고, 놈들의 상단이 골목골목마다 자리 잡아 일자리도 모두 잃게 될 겁니다! 과중한 채무 때문에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하겠지요! 피오렌치아에 가보신 분들이라면 알 거 아닙니까. 그곳의 빈민들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요. 아, 배우신 분들이 모를 리가 없지요! 알면서도 외면하는 거겠지. 그렇게 고향을 팔아넘기고 피오레 가문이 뒤에서 챙겨주는 이권만 받아먹으면 그만이니까!”

“조레스! 말이 너무 심하군! 우린 도시의 원로들일세! 젊은이인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순 없지!”

콧방귀를 끼는 조레스.

“원로요? 참주가 시민들을 개처럼 죽이고, 도시가 내전으로 빠져들었을 때 당신들이 뭘 했습니까? 그때는 숨죽이면서 목숨이나 챙기다가, 이젠 도시를 팔아넘기자니 어이가 없군요! 무능하고 염치도 없으면서 사사건건 발목이나 잡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인네들이 무슨 도시 원로란 말인가! 하루빨리 관 속에나 들어가야 할 살아있는 송장들이지!”

“옳소!”

조레스의 외침에 침묵을 지키던 젊은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그동안 전통의 권위에 짓눌려있었지만, 이젠 그것이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참주파를 대변하는 소년 의원 베르나르도도 조레스의 옆에 서서, 암묵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아르투르 공! 의회의 쉰 내 나는 노인들은 두라노 시민들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저희와 함께 직접 광장으로 나가시지요! 나가서 민심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조레스는 아르투르를 보며 소리치며 의회의 문을 활짝 열었다.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아르투르는 탑의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광장에 있는 수천, 수만에 이르는 시민들의 무리가 초조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중들은 서로 간에 쑥덕거리며 정보를 교환했다. 그들이 가진 불안은 과장된 사실과 허위로 이루어진 소문으로 급격히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피오레 가문의 사절단을 아르투르가 모욕했기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두라노에 군주정이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받고 싶어 한 이웃 자유 도시들의 사절을 그가 문전박대했다는 것들이었다.

“이미 의회에선 독재관을 탄핵하고 피오레 가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던데?”

“역시, 외국 왕자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어….”

“공화국 전통을 존중하는 피오레 가문 사람들이 훨씬 나을 것 같아. 게다가 생각해봐. 그렇게 부유한 가문을 일군 것에는 분명 대단한 수완이 있지 않겠어?”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대중의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탑에서 아르투르와 일부 의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좌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아르투르는 군중의 침묵을 비난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은 냉소로 이어졌다.

‘대중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야. 민심만큼 우스운 말이 없지. 까짓거, 음유시인에게 동전 몇 닢 던져주고 적당히 그럴 듯한 목소리만 내면 얻어지는 것이지. 그들은 그저 큰 목소리를 내는 자, 힘 있는 자를 따라갈 뿐이지.’

어쩌면 자신을 비웃던 동료 귀족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백성을 위해 싸우는 기사라고? 스승님이 들으면 코웃음 칠 소리였다.

‘그래. 애초부터 기사의 본업은 스스로의 영광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무지한 대중들에겐 과한 것이야. 그들은 남들에게 이끌릴 뿐, 이끌 줄 모르니까.’

아르투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무수히 모여든 군중 앞으로 조레스가 나섰다.

“두라노의 시민 동지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들을 대표하는 두라노의 의원들은 결정을 내렸다!”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광장의 모두를 짓눌렀다. 풍채 좋은 청년, 조레스의 목소리는 광장의 구석구석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

“우리 존귀하신 의원 나리들은 감히 피오레 가문의 요구를 거절해, 전쟁의 위기를 불러온 외국 왕족 출신의 독재관을 탄핵하기로 했다! 애송이 왕자가 자만심에 도취되어 도시를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었으니, 이 재앙을 어찌 해결 할쏘냐? 자신의 용력만 믿고 도시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죄다. 엄청난 죄다!”

군중 사이에 동요가 일었지만 조레스는 그들이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래서 지혜로운 도시 원로들로 구성된 참사회는 도시의 주권을 피오렌치아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의 하인이 되는 것이니 어찌 영광이 아닐쏘냐? 이제 우리는 피오레 가문의 어르신들께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두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지 않은 몇몇이야 처지가 나빠지겠지만, 모두가 잘 살 수는 없잖나?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는가?”

조레스의 목소리는 점점 빈정거리는 태도로 변해갔다.

“노예가 되면 어떤가? 전쟁만 피할 수 있다면 전부 되는 것 아니겠는가? 피오렌치아에 맞서선 아무런 승리의 희망이 없으니, 애송이 왕자는 우리 손으로 가져다 바친 후, 피오레 가문의 발이나 핥는 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의회의 결정이다.”

터질 것 같은 긴장감과 고요함이 광장에 팽배해져간다.

“시민 동지 여러분, 이게 여러분의 뜻인가?”

조레스가 던진 마지막 물음은, 점차 분노로 타오르던 군중들의 감정에 불을 지폈다. 발화점에 이른 물이 끓어오르듯이, 그들은 불타올라 한 마음으로 합창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진실로 묻겠다! 두라노 인들은 자유도 권리도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전부인 가축인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그렇다면 답하라! 기름진 뱃살을 두들기며 도시를 팔아먹으려는 배신자들과 참주를 무릎 꿇리고 자유를 가져온 도시의 해방자이며, 질서와 안정을 가져온 자 가운데 누가 우리의 대표로 적합한가?”

“해방자! 해방자! 해방자!”

“그분의 이름을 연호하라!”

“아르투르! 아르투르! 독재관 아르투르! 두라노 시민의 뜻은 독재관과 함께 한다!!!!!!!”

처음에 아르투르는 대중, 소위 말하는 “시민”들에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보호 해주어야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었다. 평민이더라도 부유하고 배운 것 많은 의원들이라면 모를까, 무지렁이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정하기 위해 들고 일어나는 모습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타고 나면서부터 고귀했던 자이며, 홀로 백인을 베어 넘기는 무패의 기사에게 사람이 동등하다는 사상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르투르는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손을 흔들어 대중의 연호에 화답했으며, 그럴수록 그들의 반응은 열광적으로 변해갔다.

사생아 왕자가 진실로 두라노 시민의 대표자가 된 순간이었다. 두라노 인들이 자신을 지도자로 여긴다면, 기꺼이 그 기대에 부응해주리라.

“적들이 오고 있다! 전쟁을 준비하라! 적들은 우리의 분노 앞에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 두라노 인들이여! 나를 따르라. 승리를 손에 쥐어주겠다!”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

시민들의 열광적인 함성이 도시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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