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87화 (8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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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주의 아들인 베르나르도 모자는 자신들이 머물던 참주의 거처 돌아와 있었다. 단, 거주자가 아닌 손님 혹은 포로로서 말이다. 아르투르와 만나자마자 어머니 조반나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베르나르도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어떤 대우를 보이냐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뒤의 대우는 이 차분하고 냉소적인 소년도 놀라게 했다. 공개 처형장이나 노예 시장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은 식사들을 대접받은 후 상상도 못한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네들이 의회에 정식으로 합류하는 것이 어떤가? 자네의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을 대표해서 말이야.”

“진심이십니까? 독재관이시여?”

“그래. 자네들로서도 쉬운 결정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보다는 신세가 나아질 것 같군.”

아르투르는 놓치지 않고 베르나르도를 바라봤다. 아직 성년에도 이르지 못한 소년이건만, 정제된 행동거지와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는 노회한 영주 같았다. 타고난 정치가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참주의 아내, 조반나는 엄지손가락을 깨물며 불안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일종의 함정이 아닐까? 귀족들도 죽이고, 자신의 남편도 죽인 저 사생아 왕자가 이토록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무언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흉계가 숨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베르나르도는 넙적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고귀한 왕자이시여. 저와 제 가족에 원하는 바가 이거든 말씀해주십시오.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네 주인이 아니다. 그저 공(lord)나 경(sir)라고 부르면 족하다.”

“아닙니다. 저와 제 어미의 목숨이 온전히 그대의 손에 달려있으니, 저희는 당신의 종이나 다름없습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부르는 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부르지는 마라. 원래는 네 어미와 협의를 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너와 이야기 하는 것도 좋겠다. 부인의 생각은 어떠시오?”

조반나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제 아들의 말대로 저희의 운명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소. 나는 기사고, 과부와 고아를 해치진 않을 것이오. 허튼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의 안전은 내가 보장하겠소. 묻고 싶은 것은, 그대들이 과연 증오를 내려놓고 나와 협력할 수 있는가에 관한 바요.”

베르나르도 모자는 침묵을 지킨 채 아르투르의 말을 들었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갈 수 있었으니.

“나는 그대들의 남편과 아버지, 친구들을 쓰러뜨렸소. 내 손으로 죽인 자들만 수없이 많지. 하지만 그대들의 지지 없이는 평화를 이룰 수 없기에 그대들을 불러 온 거요. 루드비코를 따르던 자들은 호시탐탐 날 죽일 기회만 노리지. 이번 주에만 두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지. 뱀과 단검으로 말이야. 그대들에게 의회의 한 자리를 내어준다면, 이런 짓을 멈출 수 있겠소?”

아르투르는 목이 뽑혀나간 뱀의 시체와 부서진 단검을 내보였다. 서투른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이기도 했다.

“델 레코레 가문의 가주, 베르나르도에게 묻겠다. 나와 협력해서 도시에 평화를 가져오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도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해라.”

아르투르의 질문에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베르나르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어머니의 안전만 보장해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르투르.

“좋다. 내 명에를 걸고 너희 모자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뿐만 아니라, 도시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은 내 보호 아래 있다. 너희의 신변에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다면 곧 나에 대한 적대 행위다.”

베르나르도는 생각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거짓말일거다. 우리 모자를 이용해 도시를 진정시킨 후, 상황이 정리되면 우릴 제거할거야. 이 남자가 원하는 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이니 전 참주의 가족은 눈엣가시가 되겠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의 평화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아르투르는 대견한 표정으로 베르나르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네 아버지의 원수다. 복수를 바란다면 남자가 된 후 날 찾아와도 좋다. 언제고 결투를 받아주마. 하지만 그 때까지는, 우리는 같이 협력해서 두라노의 사람들을 구할 것이다. 잘해보자. 베르나르도.”

소년도 불안감을 숨기며 아르투르의 손을 붙잡았다. 아르투르는 손수 열쇠를 들고 그들의 손에 묶인 족쇄를 풀어주었다.

“지금 도시 바깥에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네 아버지의 병사들이 있다. 그들에게 가서 해산을 명하는 일이 네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아르투르가 이 구상을 의회의 측근들에게 밝혔을 때, 거의 모두가 우려를 표명했었다. 베르나르도를 보내 참주군을 해산시킨다니 사실상 적장을 석방시켜주는 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르투르는 자신이 관리할 수 있다며 이 제안을 밀어붙이기로 했었다.

“명령만 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명령하겠다. 베르나르도 델 레코레. 가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네 외가에도 서신을 보내 상황을 설명 하거라. 나는 전쟁을 피하고 싶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누구와 함께 가면 되겠습니까?”

자신에게 누구를 감시로 붙이겠냐는 말이었고,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네가 원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라. 누구든지 상관없다.”

아르투르의 결정에 베르나르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빠져나왔고, 어머니를 비롯한 가문의 옛 충복들을 데리고 참주군을 만나러 떠났다. 아르투르는 성문을 빠져나가는 참주의 영특한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문대로 영특한 소년이군. 훌륭한 군주의 기질이 보이는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묻는 에렌.

“그는 가문의 잔당을 규합해서 도로 공격해올 수도 있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하셨는지요?”

“영특한 녀석이니 공화파의 반발까지 감수하며 그를 풀어준 의미를 모르지 않길 바랄 수 밖에. 만약 베르나르도가 내 신뢰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면, 그건 그것대로 받아쳐줄 생각이다. 그 때는 소년이 아니라, 레코레 가문의 가주로 대우해줘야겠지.”

아르투르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뒤로 돌아섰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건 상관없네. 어차피 나는 참주의 잔당이 얼마나 몰려오건 몇 번이고 격파할 수 있네. 소년도 그걸 모르진 않을 걸세. 기회를 주었으니 결과에 대해선 그가 책임질 일이지. 부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목숨을 귀히 여기길 바라는 수밖에.”

에렌은 굉장한 자신감을 내보이는 아르투르를 보며 불안했지만, 머잖아 그의 자신감이 근거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르투르는 두라노의 참주정을 무너뜨리고 갈등을 복합했으며, 자신이 보는 동안엔 부딪친 모든 적들을 이겼다. 설사 베르나르도가 기대를 저버리고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승리의 여신은 아르투르를 향해 다시 웃어 주리라.

***

베르나르도는 도시를 떠난 후, 추격대가 언제쯤 따라오나 싶어 뒤를 항상 살펴보고 있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풀어주는 척하고 부하들을 보내 일가를 살해할 생각이 분명했다. 그래놓고 “도적들에 의한 불의의 사고”로 위장해 원한을 사지 않고 자신과 마지막 남은 아버지의 충복들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닌가?

….

그런데 끝까지 추격대는 없었고, 그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참주군의 잔당들과 만나는데 성공했다. 아무리 정찰병을 보내봐도 추격대도, 매복병도 없었다. 아버지의 부하들은 자신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고, 소년의 어머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의 순진함이 우리를 살렸구나! 신께서 우리를 보우하고 계신다. 베르나르도. 이대로 외가로 달아나 네 외삼촌에게 합류하자꾸나. 네 권리를 위해 군대를 준비중이라고 하신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장수들, 이제는 자신의 장수들이 흥분에 들떠 서둘러 피하자고 말하는 도중에도, 베르나르도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자신이 아르투르의 입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위였으니까.

머지않아, 영특한 그는 아르투르가 자신을 보내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니요. 돌아가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화해의 의도를 밝힌 것이지, 마지못해 한 게 아니에요. 만약 그의 신의를 저버린다면 다음번에는 결코 이런 자비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기사 한 명의 분노를 피하고자 다시 널 증오하는 자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겠다고?”

황당해하는 어머니를 향해 베르나르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두라노에는 여전히 저희 가문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 그들을 책임지는 건 저희의 책무니까요. 그들은 지금 저희가 의회의 일원이 되었으니 처우 개선을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을 버린 후 삼촌의 군대를 몰고 온다면 우리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배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가문을 지지하던 자들은 등을 돌릴 것이고, 우린 영영 두라노를 잃겠죠.”

생각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말머리를 두라노로 돌렸다.

“도덕적으로 보나, 실리적으로 보나 저는 두라노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머니는 친정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어요. 신변의 위협을 무릎 쓰는 건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조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판단이 그렇다면 거기에 따르마. 하지만 내 아들을 홀로 위험한 곳에 남겨 두진 않겠다.”

모친을 말릴 수 없음을 아는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의 충복들과 함께 두라노를 향해 돌아갔다. 돌아온 모자는 아르투르의 큰 환대를 받았다. 아르투르 정권은 베르나르도를 풀어줬다고 여론의 표적이 되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여론은 다시 급속도로 변했다.

“평화! 평화가 왔노라!”

“평화 만세!”

평화를 바래온 두라노 인들에게 베르나르도의 처신은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소년은 아르투르의 기대에 부응해 내전을 종식시켰으며, 과거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악행들에 대한 개인적인 사과와 보상을 약속했다.

“델 레코레 가문의 가주가 내린 용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에렌은 베르나르도의 행동에 감격해 그에 화답하는 결단을 내렸다. 의회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인 화해 법안을 통과시켰고, 그 중에는 부자들의 재산을 일부 각출해 빈민들을 구휼하는데 사용하고 그들에게 교육이 제공될 기회를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가진 것이 없어 악만 남은 채 루드비코 일가를 강력히 지지해온 빈민들도 이러한 변화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화해가 자연스레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괜찮겠습니까? 아르투르 공. 사실 이번 방안은 공께서 제안하시고 성사시킨 일인데요. 두라노 민중들도 잘 알 수 있도록 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라노의 물음에 아르투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런 식으로 했다간 내가 떠난 뒤에 또 싸움이 일어날 걸세. 앞으로 이곳에 남아 도시를 다스릴 자들끼리 진심이 통해야 해. 정말로 내전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첫 출발로는 나쁘지 않네.”

아르투르는 공식적인 화해 선언을 외우는 에렌과 베르나르도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마침내 긴 사투 끝에, 정말로 두라노에 평화가 오는 듯 했다. 자신은 해줄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주었다. 이 뒤는 두라노 인들의 이야기가 될 터였다.

같은 시각, 같은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 중, 이빨을 꽉 깨물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옛 형제단의 생존자들이었다.

한 사내가 말했다.

“평화? 평화는 누구 마음대로 말인가? 이런 불의한 평화로 구차하게 살아남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군.”

다른 사내가 거들어 말했다.

“암. 두라노를 해방시키고자 인생을 바쳐온 우리건만, 저 사생아 왕자 놈과 참주의 아들놈이 모든 걸 다 가져가는군. 저 자리는 우리 거야! 우리가 정당한 두라노의 지도자지, 저런 놈들이 아니라고!”

“저 우매한 대중들을 봐라. 우리가 그들을 구해주었건만, 자진해서 외국의 왕자나 섬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대체 뭘 위해 싸운 것이냐! 수많은 동지들이 뭘 위해 죽어갔단 말이냐! 이런 배은망덕한 도시는 차라리 망해버리는 것이 낫다!”

그 때, 그들의 뒤로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 정말로 지키실 수 있겠소?”

사내들은 무기를 뽑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있는 것은 고급 옷을 입고, 두둑한 뱃살을 내보이는 중년의 사내였다. 두라노의 상인조합장, 라델로였다.

“당신이군. 우리를 놀리러 온건가?”

“아닙니다. 혁명 동지 여러분.”

혁명 동지라는 말에 그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라델로는 언제나 기회주의자였을 뿐, 누구의 편도 든 적이 없었다.

“단지 여러분이 말하신 바를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혁명에 대한 노고를 보상받고 싶지 않습니까? 마땅히 여러분의 것이어야 할 권력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배신자들에게 징벌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까?”

“너 같은 기회주의자의 말을 들을 쏘냐!”

한 사내가 성을 내며 자리를 떠나려는데, 그들 중 가장 발언권이 큰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당신은 정권이 변할 때마다 기생충처럼 붙어서 살아왔지. 이제는 누구에게 붙었는지 들어봅시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이건 기생충이나 할 법한 일입니다만.”

사내는 냉소를 지었다.

“이미 혁명은 끝났소. 내게 남은 건 텅 빈 가슴과 복수심, 권력에 대한 갈망뿐이오. 당신이 이번에 빌붙은 자가 악마여도 기꺼이 손을 잡겠소.”

라델로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악마까지는 좀 모자라고, 악당 정도는 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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