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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86화 (8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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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조레스는 주변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다들 무엇을 우려하시는 지 압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분께 간청을 드려서라도 반드시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라델로는 불 같이 화를 냈다.

“제정신인가?! 우리 도시를 귀족에게 맡기자고? 아르투르 공이 명예로운 분인건 아네. 하지만 귀족이야! 머지않아 자유 도시의 전통을 폐지하고, 두라노를 군주국으로 만들 건 뻔한 일일세! 선조들이 귀족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건만, 다시 그들의 치하로 들어가자는 건가?”

“은행의 탈을 쓴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도시의 통치를 넘기자는 것보단 훨씬 나은 일입니다. 우리 고향의 혼란 속에서 당신은 뭘 했습니까? 참주정의 폭정에 신음할 때, 신공화파가 이성을 잃고 시민들을 억압할 때, 레말리트가 폭주하여 시내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진정으로 두라노 민중을 위해 싸우셨던 분은 아르투르 공뿐입니다. 나머지는 겁먹어서 숨어있거나 권력에 도취되었을 뿐이죠. 그런 지도자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분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원하시는 건 뭐든지 들어드려야 합니다. 독재관 직위가 아니라, 군주의 홀을 요구하시더라도요 이게 우리 농부들의 민심입니다.”

의원들은 이전보다 더욱 크게 웅성였고 몇몇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노려봤다.

“군주국이라니! 반역이다! 당장 재판에 회부해야만 한다!”

“난 지금 현실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중에 참주의 군대에 대적할 수 있는 자, 혼란에 빠진 두라노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자. 그 누가 있습니까? 군주로 모시는 한이 있더라도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논쟁이 지속되자 점차 많은 사람들이 조레스의 말에 설득되어갔다. 일부는 끝까지 격렬히 반발했지만 대세는 기운 뒤였다. 에렌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일단 해산을 명령했다.

***

아르투르는 시라노와 함께 병영에서 쉬고 있었다. 그는 이틀을 쉬지 않고 싸웠기에 피로에 가득 절여져있었다. 몸도, 마음도 적지 않게 지친 그는 편안한 휴식만을 간절히 바랬다. 에렌이 찾아와 상황을 설명하자, 아르투르는 한층 더 피곤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독재관이 되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르투르 공.”

아르투르는 팔짱을 꼈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군. 잠깐 레말리트를 도와 문제를 해결하면 편해질 줄 알았더니, 단단히 일이 꼬여버렸어. 거절하자니 내가 아니면 두라노를 구할 사람이 없고, 승낙하자니 온갖 피곤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졌는데 말이야.”

에렌은 연신 고개를 숙여보였다.

“부탁드립니다. 이미 두라노와 저는 많은 점을 빚졌지만, 아직도 공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르투르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비록 싸울 때마다 이기긴 했지만, 그때마다 목숨을 걸어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선, 악이 확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일은 그에게 정신적인 피로감을 주고 있었다.

“정황상 독재관이라는 직위는 참주에 버금가는 전권을 지닌 자리 같은데. 내게 맡겨도 되겠나?”

“맞습니다. 하지만 참주는 영원히 집권하지만, 독재관은 비상시국이 끝나면 권력을 내려놓는 것이 다릅니다.”

아르투르는 팔짱을 끼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혼란이 수습되고도 내가 독재관의 권력을 반납하길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에렌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다스리는 군주국이 되겠지요. 참주보다 더욱 강력한 권위를 지닌 권력자가 탄생할 테니까요.”

“하지만 자네는 고향이 자유 도시이길 바라지, 정말로 내게 이런 자리를 제안해도 괜찮겠나? 군주의 신하가 되자고 참주를 내몬 건 아닐 텐데.”

에렌은 입술을 깨물더니, 결심을 마친 후 말했다.

“…공께서 군주가 되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이미 저는 공께 너무 많은 것을 빚졌으니, 원하신다면 제가 신하가 되어 다른 사람들도 설득하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공을 주군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아르투르는 마음속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영지를 통치하고 싶은 건 그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는 건 자기 기만이었다. 두라노와 그 영토를 다 합치면 어지간한 공작들의 권세에 비견할 만 했으니, 대영주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잠시 가졌던 도파뉴 백작령보다 두 배는 컸고, 다섯 배는 부유했으니까. 새로운 왕국을 만들기에 충분한 기반이 되겠지.

‘하지만 혼란이 가라앉고 나면 그들은 나를 군주로 추대한 걸 후회하겠지.’

이곳은 자유 도시였고, 두라노 인들은 누구도 섬기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마지못해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겠지만, 결국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들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잘해주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들을 비난하며 탄압할 거야. 그쯤이면 나를 추종하는 자들도 많아질 테니, 그들을 앞세워 두라노를 공포로 다스리게 되겠군. 그렇게 더 강력한 루드비코가 되는 건가?’

자신의 명예를 그렇게 보잘 것 없이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군주로 추대하지 않아도 좋네. 모든 일이 끝나고도 자네들이 나를 군주로 원한다면, 그 때는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하지만 자유 도시의 불운을 틈타 그대들의 긍지를 꺾고 싶지는 않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독재관 지위 역시…”

“그건 받아들이지. 단, 나는 혼란을 바로잡고 평범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체제만 만드는데 중점을 둘 거야. 국익의 관점에선 손해를 볼 지도 모르네.”

“그렇게만 해주셔도 저희로선 깊은 은혜를 느낄 따름입니다.”

아르투르는 웃음을 머금었다.

“의회에 가서 이 대화를 그대로 전하게. 선의로서 독재관 직위를 받아들이겠지만, 그대들이 원하지 않는 한 군주가 될 일은 없을 거라고.”

아르투르의 대답이 의회에 전해지자 대부분은 크게 환호했다. 평화를 원하는 시민들도 이 소식에 기뻐하며 그의 이름을 재차 연호했다.

“해방자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가 대중에게 내건 구호는 “질서와 안정”이었으며 혼란이 수습된다면 독재관의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자들은 없었다. 어쨌든 아르투르는 곧장 정무를 시작했다.

아르투르의 첫 업무는 내전에 대한 처리였다.

“죄의 경중에 따라 내전을 일으킨 자들은 달리 처벌될 것이다.”

평범한 가담자들에 대한 대응이 첫 번째였다.

“그대들을 석방해주겠다. 대신 더 이상 과거의 원한으로 도시를 어지럽히지 말 것을 약속하라. 그것이 싫다면 재산을 챙겨 도시를 떠난 후, 돌아오지 마라. 죄목이 큰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 조치한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서약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음 조치는 주도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단순히 전투에 가담했던 자들은 감옥에 수감 조치하겠다. 단,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선동한 자들은 모조리 교수대로 보내도록.”

에렌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화파와 참주파의 지도자격 인물들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내전을 치룬 것은 그들의 권리겠지만, 무고한 민간인을 해치도록 선동한 일은 용서받을 수 없다. 법의 본보기를 보여 모조리 목을 매달도록.”

여러 반대가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대규모 사형을 감행했다. 그는 이제 두라노의 통치자였고, 백성들에게 질서를 되돌려줘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다. 여러 차례 강경한 조치가 이어지자, 두라노의 질서는 회복되었다.

하지만 참주파와 공화파는 여전히 모두 들끓고 있었고, 아르투르는 자신을 향한 강렬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아르투르는 루크레치아와 시라노를 불러 두 파벌을 달랠 방법을 상의했다.

“공화파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공께서 독재관이 된 것이 임시직 일뿐, 상황이 끝나면 떠날 것이라는 신뢰를 주시면 당장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엔조의 죽음에 분노하고, 레말리트의 죽음에 복수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르투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군. 자네가 최선을 다해 설득해보게. 루크레치아?”

조심스레 답하는 루크레치아.

“참주파를 확실히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해요. 하지만 공화파에서 반발할 수도 있어요.”

“일단 두 파벌 중 하나라도 조용히 시켜야겠지. 말해보게.”

“루드비코의 어린 아들과 아내가 남아있어요. 그들을 석방하고, 정권에 합류시키시면 참주파의 협력을 받아낼 수 있을 거예요.”

“의회에서 입에 거품을 물며 반대하겠군.”

시라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르투르 공, 저는 어떤 경우에도 경을 따를 것입니다만, 그런 조치는 공화파 의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올 겁니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요.”

아르투르는 한숨을 쉰 후, 시라노의 표정을 보며 답했다.

“하지만 도시 인구 삼분의 일이 지지하는 파벌을 무시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순 없어.”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싸워온 참주의 아들과 함께 정치를 해나가야 하는 처지가 되겠군요.”

입술을 질끈 깨무는 시라노를 보며 아르투르는 결심을 굳혔다.

“평화를 얻고 싶나? 그렇다면 과거의 원수들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만 하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임명된 사람이고, 그를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할 걸세.”

시라노는 머뭇거렸다.

“제 명예에 맹세코, 저는 끝까지 공을 따를 겁니다. 명예를 아시는 분이니까요. 하지만… 제 동지들은, 그렇지 않아도 공에게 원한을 가진 마당에 이번 일까지 겹쳐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렵군요. 동지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보겠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나를 독재관으로 임명한 건 의회와 두라노 시민들의 뜻이란 걸 명심하라고 전하게. 공화파 친구들의 의기와 울분을 모르지 않네만, 그들이 정말로 두라노를 위한다면 한 발 물러날 시간이라는 것도 말이야.”

시라노는 아르투르의 굳은 눈빛을 보며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일찍이 아르투르가 말했던 대로 두라노 인들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공화정의 가치를 믿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

눈의 탑은 두라노의 상징이자, 권력의 중심지였다. 탑에 누가 수감되어있느냐는 정권의 향방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였다. 그런 눈의 탑, 귀한 죄수들을 수용하는 방에 한 모자가 있었다. 검은 곱슬머리를 한 여인과, 남자 티가 아직 나지 않는 앳된 소년이었다.

여인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반면, 소년은 차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젊은 여인이었다.

“베르나르도, 너는 지금 걱정도 되지 않느냐? 한가롭게 책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갈 방법을 떠올려야 할 때란 말이다.”

소년의 표정은 담담했다.

“어차피 죽고 사는 일은 신의 뜻에 달린 일입니다. 어머니. 죽게 된다면 의연하게, 살아난다면 당당하면 되겠지요. 그게 루드비코의 아들다운 일 아닐까요.”

여인은 아들을 향해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래. 네가 너보다 더 어른스럽구나. 하지만 이 어미는 내가 죽는 건 걱정하지 않는단다. 그저 내 아들의 미래가 걱정될 뿐이구나.”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만 약조해주십시오. 혹시 제가 잘못되더라도 슬픔을 딛고 일어나주십시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영특한 소년, 베르나르도는 그저 슬픈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루드비코의 아들인 자신이 살아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제라니아 참주의 여동생이니, 새롭게 정권을 잡은 자들이 막 나가는 자들만 아니라면 목숨을 부지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터벅 - 터벅 - 터벅.

계단을 타고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올 것이 왔다고 판단했다. 아버지가 끌려 나가 처형되었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될 차례인 것이 분명했다. 언제고 아버지의 사람들은 자신을 구심점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었을 터였다.

마침내 발걸음 소리가 자신들이 연금된 방 안에서 멈추었다. 두 모자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라.”

거칠게 문이 열리며 창을 든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이니 만큼 호위가 엄중한 것이겠지.

“새 독재관께서 너희와 만나길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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