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84화 (84/248)

84

아르투르는 자신을 포위한 적들을 차분하게 쓰러뜨려갔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일은 워낙 많이 해본 터라,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적진으로 맹렬히 돌격해 적들이 대응하기에 앞서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고, 도망치지 않는 자들을 먼저 쓰러뜨렸다. 아르투르는 무도회장의 신사처럼 우아하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적들을 베어나갔다. 그는 항상 단 한번만의 공격으로 적들을 쓰러뜨렸다.

사방에서 창과 화살이 날아들었다. 아르투르는 날아오던 창은 왼손으로 잡아내 떨구어버리고 화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철판 갑옷의 경사면에 맞아 바닥에 나뒹굴 뿐이었다. 하나, 둘 적들이 쓰러져감에도 적병들은 눈에 불을 키며 아르투르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맹렬히 증오하는군.’

“죽어어어어어어어!”

자신에게 달려와 철퇴를 휘두른 덩치 큰 바보는 눈빛에서 맹렬한 증오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어리석은 놈.’

너무 굼뜨고 느린 공격이었다. 아르투르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놈의 좌측으로 움직여 공격을 피해낸 후, 여명을 슬쩍 휘둘렀다. 날이 번득이고, 놈의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여명은 피를 머금은 채 번득였다. 참주파 병사들은 여전히 흉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대열을 맞춰 자신을 포위해왔다.

‘어중간한 타협은 힘들겠군.’

사방에서 공격이 날아들었지만 아르투르는 차례로 공격을 쳐냈다. 쉬지 않고 날아드는 공격이었지만 아르투르의 완벽한 방어 자세는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은 채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적들의 공격이 멈추자, 아르투르의 시간이었다. 창대와 검을 맞대고 있던 그는 힘을 가득 주어 적병을 무기와 함께 밀어낸 후,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정면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고, 앞을 가로막던 적병 두 명이 허리가 쪼개져 죽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르투르는 거친 파도가 모래사장을 휩쓸 듯 적병들을 휩쓸어버렸다. 그의 힘은 태산 같고 분노는 폭풍과 같았다. 그렇지만 참주파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쓰러진 전우의 시체를 매워나가며 공격해왔을 뿐이다.

아르투르는 양손에 각각 여명과 황금의 검을 뽑아든 채로 공격에 맞섰다. 그는 양손을 모두 익숙하게 다룰 줄 알았고, 마치 두 개의 몸을 가진 것 마냥 능숙하게 각각의 장검을 사용했다. 한 손으론 공격, 다른 손으로는 방어를 하며 공수를 능란하게 전환했고, 혹여 빈틈이 생겨 두 검이 모두 공격에 사용되면 워낙 빠르고 현란한 지라 적들은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

아르투르는 도전적인 고함을 사납게 외치며 적들을 밀어붙였고, 나머지 적병들이 쓰러지는 데는 채 일분이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적병은 갓 수염이 난 소년이었다. 그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쓴 아르투르를 보며 공포에 질렸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근방에 숨어있는 민간인 여성을 발견했다. 소년은 살 길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잽싸게 달려가 칼날을 여성의 목에 겨눈 채, 아르투르를 보며 애처롭게 외쳤다.

“다, 다가오지마! 괴물! 더 이상 다가오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그, 그러지마세요! 전 싸움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아르투르는 차분히 적병과 인질을 번갈아보았을 뿐이다.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저 녀석이 등을 보이고 달아나거나 목숨을 애원했다면 살려주었을 것을. 그는 적병과 자신의 간격을 살폈다. 다가가기엔 꽤 멀었고, 접근해서 놈의 목을 베기 전에 인질이 먼저 죽으리라.

하지만 민간인을 협박하는 병사를 살려둘 수는 없는 법.

“그래. 널 무사히 보내주겠다.”

휑 - !

아르투르의 손에서 던져진 강철이 쏜살 같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놈은 눈을 크게 뜨며 그게 무엇인지 보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시력을 잃었다. 여명이 그의 이마를 꿰뚫고 나온 뒤였다. 적병은 뒤로 쓰러졌고, 아르투르는 터벅터벅 다가가 놈의 시체에서 검을 회수했다.

“네 동료들의 곁으로 말이다.”

민간인 여성은 자신의 몸에 피가 가득 튄 후 몸이 얼어붙었지만,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전투가 끝날 때 집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게.”

아르투르는 민간인 여성이 현장을 떠날 때까지 지켜본 후, 냉정한 눈으로 도시의 길거리를 바라봤다. 불길과 바리케이트가 두라노의 시내에 가득 했다. 사람들은 편을 갈라 서로 죽고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건물을 점하고 손에 잡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던져대었다. 각 골목과 큰 건물마다 참주정과 공화정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폭도들은 가정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고, 사람들에게 어느 편에게 충성을 바치는 지 묻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대답을 한다면 일가족이 모두 참살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마침 한 가정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던 이들을 뒤 따라 갔다.

가정집 안에는 한 노부부와 그들의 손자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있었고, 그들을 심문하는 무리는 수십 명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몽둥이와 단검 등으로 무장한 폭도였을 뿐, 제대로 된 군인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할아범. 당신이 은퇴하기 전에 루드비코의 경비병으로 일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심문하는 무리의 선두에 선 청년은 멋들어진 옷을 입고, 허리춤에 장검을 찬 사내였다. 그는 기세등등하게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두려움에 떤 채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교외에 살다가 노후에 은퇴한 농부일뿐입니다요. 나으리.”

청년은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었다.

“시치미 떼지 마. 이미 네가 젊은 시절에 어디서 일했는지 알던 사람들이 다 말해줬거든.”

심문하는 사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가, 흉흉히 눈동자를 뜨며 노인을 노려봤다.

“부정하려해도 소용없어. 과거의 업보가 당신을 따라잡았군. 당신과 일가족은 이곳에서 처형 될 거야.”

청년대원이 장검을 들어 내리치려했고,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머지 가족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 쯤 하지.”

군중들 사이를 거칠게 헤치고 나온 아르투르가 나지막이 말하자, 그의 손놀림이 멈췄다. 고압적인 눈동자로 청년을 내려다보는 아르투르의 어깨에는 핏방울이 떨어지는 여명이 있었다.

“너흰 공화파 행동대원들이군. 술자리에서 본 기억이 나. 너희, 내가 누군지 알테지.”

“…”

청년과 그의 동지들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왜 자신을 가로막고 있냐는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두라노의 해방자로서 명하니, 당장 이 미친 짓을 그만둬라. 더 이상의 무법 지대는 용납하지 않겠다.”

아르투르의 선언에 그를 둘러싼 군중들은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들을 이끄는 청년들은 반발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루드비코가 얼마나 악랄한 놈인지 보셨잖습니까! 그놈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도 우리 지도자를 죽이고, 공화국을 전복시키려했지요. 이번에 모두 죽여버려야 다음에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아르투르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는 달래는 표정도, 힐난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은퇴한 노인네와 그 가족이 너희에게 무슨 위협이 된 단 말이냐?”

“저 꼬맹이들이 커서 참주파가 될 겁니다!”

“이런 겁쟁이들이 있나!”

아르투르는 분노가 담긴 고함을 내질렀고, 기세등등하던 청년조차 일순간 몸을 떨었다.

“그만! 너희가 바라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복수다. 아직도 모르겠나?”

상대도지지 않고 씩씩거리며 장검을 굳게 쥐었고,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친다.

“복수가 곧 정의입니다! 두라노의 정의요! 우리의 분노는 정당하고 복수는 합당한 권리이니 비켜서십시오! 아르투르 공! 우리의 친구였던 그대를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두라노 인이 아니니 우리가 루드비코에게 가지는 설움을 모를 테지. 그에게 당신의 가족과 친구가 죽었어도 그런 한가한 소리나 했을 거요?! 말해보십시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지 말이오!”

아르투르는 자신의 표정에 드러난 격한 감정들을 거둬들인 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답했다.

“좋다. 너희에게 참주파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의 말에 청년과 그의 무리들은 내심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희가 복수의 권리가 있듯, 나 역시 기사로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약자들을 보호할 권리가 있어! 나 역시 내가 보호하고 싶은 자들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다는 점도 알아둬라! 이 혼란에 어느 편도 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들, 이전 세대의 죄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 그저 인생의 소탈한 행복을 꿈꿀 뿐인 소시민들!”

감정이 북 받쳐 오른 아르투르는 여명을 서서히 내리며, 청년과 그의 무리들을 향해 겨누었다.

“나는 그런 자들을 위해 싸우겠다. 그러니, 이건 너희의 권리와 나의 의무의 싸움이다. 너희가 복수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겠다. 단, 나 역시 내 의무를 다할 것이야. 그리 하겠느냐?”

아르투르의 목소리엔 힘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체격을 갖춘 중무장한 기사는 인간 흉기인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수가 많다고 한들, 결코 부딪히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특히 홀로 정권을 전복시킨 명성을 가진 자라면 더더욱.

아르투르의 존재감이 수십 명의 군중을 짓눌렀다. 중압감에 휘말린 군중들이 주춤대는 것을 보고 아르투르는 대범하게 그들 사이로 걸어서 노인 가족을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은 절로 옆으로 비켜섰으며, 아르투르가 등 뒤를 보였음에도 누구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때 겁이 많은 누군가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해, 해방자님 말이 맞는 것 같아! 난 그만 둘래!”

“나, 나도!”

그들을 필두로 수십 명에 달하던 군중들이 모두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을 이끌던 청년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디가! 돌아와!”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초라해 보일 뿐이었기에 오히려 군중의 해산을 가속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반쯤은 겁에 질린, 반쯤은 분노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안 가나?”

아르투르가 여명을 허공에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뒷걸음질쳤다.

“제기랄! 두고 보십시오! 지금은 물러가지만 결코 참주파 놈들이 활개 치는 일을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겁에 질린 청년들이 떠나려할 때, 아르투르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한번 더 이런 짓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땐 죽이겠다.”

그들은 움찔대며 뭐라고 항변하려다가, 그들 중 눈치가 빠른 자가 팔을 끌며 재촉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아르투르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곤, 노인 가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해왔다.

“감, 감사합니다. 아르투르 공. 저 청년들이 무언가 오해가 있나 봅니다. 저는 참주군에서 일한 적이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단숨에 알았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네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내게는 관심 없는 일이다. 손자들을 구하고 싶은 할아버지를 보았을 뿐이니까.”

“….”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 가족을 데리고 나를 따라와라. 아직 무기 다루는 법은 알고 있겠지?”

“네! 따르겠습니다!”

노병은 집에 고이 보관해둔 낡은 검을 꺼내서 아르투르에게 합류했다. 그 뒤로 아르투르는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키며 여러 난관이 닥쳐오긴 했다. 일부는 아르투르의 명성만 듣고도 스스로 물러났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해오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증오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참주님을 위하여!”

“공화국 만세!”

그들이 외치는 구호나 내세우는 명분은 달랐지만 아르투르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의 대의가, 자신에겐 자신의 대의가 있는 법이었다.

해가 저물기 전, 여명은 피와 살점을 가득 포식하며 서른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