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82화 (8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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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자 시민들은 시내의 모든 구역에 군대가 배치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참주가 오늘 처형될 것이오! 어떤 소란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오!”

분명히 공개 처형식은 일주일 뒤였건만, 일자가 갑자기 앞당겨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시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길거리로 나왔다. 서로 다른 심정을 품은 채 말이다. 레말리트는 모여든 시민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친구이자 부관인 시라노는 경악한 눈빛으로 레말리트를 바라봤다.

“자네, 제정신인가? 아르투르 공께서 협상을 위해 떠나신 게 어제일세.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일단 참주는 살려두고 협상으로 평화를 얻는 게 우선이라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 사생아 왕자가 우리 일을 훼방 놓았을 테니까. 언제까지 그 놈에게 휘둘릴 순 없어.”

“제기랄, 지금 자넨 미쳤어.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싸웠어! 그런데 지금 자넨 뭘 하고 있나? 사람들을 위험으로,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잖아!”

따지듯 물어오는 젊은 기사, 시라노를 향해 레말리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싸우는 게 두렵나? 이건 우리가 일궈낸 혁명이고, 우리가 지켜낸 도시야. 그러니 외국 놈들이 뭐라고 하건, 사생아 왕자가 뭐라고 하건 우리 알 바가 아니야. 똑똑히 듣게. 우리는 무력으로 두라노를 해방했어. 두라노를 지킬 수 있는 것도 무력뿐이야.”

레말리트를 차분히 바라보던 시라노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자네는 변했군. 더 이상은 자네를 따를 수 없네.”

“그것도 자네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이 일이 끝날 때까진 보내줄 수 없네.”

“뭐?”

순간, 엔조가 이끄는 병사들이 나타나 시라노를 포위하며 창을 겨누었다.

“자네….”

레말리트는 고개를 돌린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감옥에 있어주게. 나도 자네를 해치고 싶진 않아.”

***

“죄인의 행차다!”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군중은 긴장했다. 한 때는 눈도 함부로 마주칠 수 없고,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던 공포의 존재였다. 신세가 변했다한들 이제 와서 편히 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작 참주의 행렬이 나타나자, 그들이 느끼던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군중들이 상상했던 것은 패배했을지라도, 한때는 공포로 도시를 다스리던 강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사내는 나약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한 때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던 참주는 닳고 헤진 넝마 같은 죄수복을 입은 채, 온 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왜소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오직 독기가 가득 서린 눈과 죄수의 이름이 적힌 명패만이 한때 그가 두라노를 통치하던 공포의 독재자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작은 한 용감한 소년이었다.

“살인마!”

그가 용감하게 들고 있던 돌멩이를 집어던지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경외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에게 원한을 지닌 자들은 원한과 분노를 담아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 던져대었고, 참주의 옛 지지자들조차 그를 외면하고 같이 비난하는 길을 택했다.

“우리 아버지를 돌려줘!”

“참주를 죽여라!”

쇠사슬에 묶인 참주와 그의 측근들은 삽시간에 오물과 돌멩이, 썩은 음식을 뒤집어썼다.

“질서, 질서를 지키시오!”

경비병들은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좀처럼 효과가 없었다. 마침내 레말리트가 나타나서야 그 흥분이 진정되었다.

“걱정마십시오! 여러분의 집정관, 레말리트가 오늘 정의를 실현할 것입니다! 참주의 피로, 우리의 목을 적십시다!”

“와아아아아아아! 레말리트! 레말리트! 레말리트!”

그 뒤로도 시민들은 아우성을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오랫동안 쌓였던 분노의 표출이자, 자신들이 떠받들던 자들이 가장 비천한 자가 된 것에서 느끼는 미묘한 쾌감이었으리라. 참주 행렬은 곧 광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미 오물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광장에 모여 든 수만의 인파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지를 찢어서 개먹이로 주자!”

“산 채로 태워버려라!”

경비병들이 죄수들을 형장으로 인도하는 사이, 레말리트가 연단 위로 올라섰다. 한껏 집정관의 위엄을 뽐내는 화려한 옷을 입은 그는 군중의 시선을 한 눈에 끌었다.

“두라노의 시민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지도자, 레말리트가 참주에게 죽음을 고하기 위해 왔다!”

“레말리트! 레말리트! 레말리트! 레말리트!”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레말리트.

“여러분 사이에 참주의 잔당들이 외국의 지원을 받아 도시를 전복하려고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을 것이다. 그 소문은 사실이다.”

순간 군중이 조용해졌다. 군중은 흥분했지만,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가 현명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내게 와서 제안하길, 참주를 살려둔 채 협상을 통해 평화를 얻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두라노 인이 아니기 때문에! 참주에게 억압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다!”

강경파들이 소리쳤다.

“옳소!”

“그래서 나, 레말리트는 여러분을 대표해서 말한다. 정의는 지체 없이 실현될 것이다. 전쟁? 그들이 전쟁을 바란다면 오라고 해라! 참주의 피를 시작으로 우리에게 맞서는 모든 자들에게, 두라노 시민들에게 거역한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노라!”

레말리트는 평생에 걸쳐 참주에게 대항해온 지도자였고 시민들은 그의 삶을 잘 알고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연설자에 대한 공감과 그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전해지자 시민들은 다시금 들끓었다.

“두라노 시민들이여! 우리가 외국의 압제자들이 두려워 정의의 실현을 피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두라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의의 대변자이며, 자유의 실현자다! 누구도 우리를 속박하지 못하리라! 내가 여러분의 대변자로서 옳은 일을 실현하겠다!”

“레말리트! 레말리트! 레말리트!”

연설을 마친 레말리트는 단두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올 때, 대부분의 죄인들이 살려달라며 빌거나, 울먹이곤 했지만 참주는 그저 뒤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드베코 델 레코레는 반란을 주모해 공화국을 전복하고, 국가의 아버지를 사칭했다. 이는 공화국에 대한 반역이다. 사형에 처한다.”

“바보같은 놈들. 이제 너희는 모두 외세의 노예로 전락할거다. 이 허약한 도시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지도자가 누군지, 너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나의 피를 시작으로 두라노에는 끝없이 피가 흐르리라! 두라노와, 두라노의 시민과, 두라노의 삶 모두를 저주하노라!”

그의 저주 섞인 아우성이 끝나기도 전에, 레말리트의 도끼가 단두대의 줄을 잘랐다.

덜커덩 -

참주의 몸에서 목이 단숨에 분리되며 레말리트의 얼굴에 피가 가득 튀었다. 그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목을 들어 올려 군중들에게 내보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루드비코의 일당이 하나씩, 하나씩 잘려나갔다. 총 열 두 명을 모두 처형하고 나자, 레말리트는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정의가 회복되었노라! 우리는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레말리트의 외침에 화답하는 수만 명의 군중.

“두라노! 두라노! 두라노! 두라노!”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군중을 보며 레말리트는 미소를 지었다. 되었다. 자신은 이제 진정으로 모든 두라노 인들의 지지자가 된 것이다. 엔조나 아르투르가 아니라, 혁명을 이끌었던 자신이 말이다. 레말리트는 군중이 피에 굶주렸음을 알았고, 일부러 시체를 방치한 채 현장을 떠났다.

“놈들이 편히 쉬게 두지 마라!”

몰려든 군중들은 처형된 시체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루드비코의 시체는 수십 조각으로 나뉘었다. 누군가는 그걸 기념품으로 삼았고, 개먹이로 던져주는 자도 있었다. 교회의 사제들은 죽은 자의 안식을 방해하는 일을 막아야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지만, 흥분한 군중을 말릴 만한 배짱을 지닌 자는 없었다.

“두라노 만세! 두라노 만세! 적들은 모두 쓰러지리라!”

군중은 루드비코의 뜯겨나간 사지를 창에 꽃은 채 거리를 행진했다. 레말리트는 행렬의 맨 앞에 서서 정의를 외침과 동시에, 누가 동조하지 않고 있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생각대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증오가 담긴 눈빛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자신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불만을 품은 자들도 그저 노려보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레말리트는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중과 함께 도시를 행진했다. 그들이 두라노 전체를 총 세 바퀴 돌고 나서야 날이 저물 무렵이 되었다. 루드비코의 유해는 도시 곳곳에 내걸려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군중의 공포와 존경을 동시에 받게 된 그는, 연단으로 올라가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내면의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겁쟁이들과 옛 참주의 추종자들에게 경고하겠습니다. 새 정부에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이 루드비코에게 했던 것과 같은 충성을, 민의의 대변자인 제게 바치십시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는 비애국적인 시민으로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혼란의 시기에는, 오직 한 명의 리더 만이 지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부로 의회는 해산입니다.”

군중은 감히 반발하지도, 동조하지도 못한 채 레말리트를 그저 바라만 봤다.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도시 곳곳으로 가서 집정관의 전언을 전하십시오. 시민 동지들이여. 날이 밝으면, 누가 모든 시민들은 자신이 애국자인지 아닌지 밝혀야만 할 것입니다!”

참주정 시절을 거쳐 온 두라노 시민들은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제 신정부는 모든 시민들에게 공개적인 충성 경쟁을 시킬 것이고, 응하지 않거나 미달하는 자들을 살생부에 올릴 것이다. 단명했던 공화국은 끝이 났고, 그저 새로운 질서가 들어선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

군중은 해산해 집으로 돌아갔다. 군중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들은 이전과 달리,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기뻐했고, 누군가는 절망했으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있었다. 옛 지도자들은 사지가 찢겨서 도시에 내걸렸고, 폭동이 벌어졌을 때 경비병들은 자신들이 당하게 내버려두었다. 날이 밝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너무 뻔했다.

“불이야!!!!!!!!!!”

그 날의 화재는 한밤중에, 경비병들이 가장 순찰을 적게 하는 시간에 시작되었다. 빈민가에서 시작된 그 화재는 사고라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고, 너무 빠르게 다른 구역으로 번졌다. 화마가 두라노를 휩쓸기 시작했다.

***

그 시각, 아르투르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 머물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참주군과 어떻게 협상을 이끌어나갈지 궁리 중이던 아르투르는 촌민들의 아우성에 여관 밖으로 나가보았다.

마을 주민들은 웅성이며 도시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손가락질하며 가리켰다.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아르투르는 즉각 마구간으로 가서 에쿠잘루스에 올라탔다.

“에렌! 수행원들을 데리고 뒤따라오는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두라노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아르투르는 질풍과 같이 밤중의 평원을 뚫고 나가 두라노에 도달했다. 성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도시의 풍경은 처참했다. 불길이 하늘까지 치솟으며 검은 연기가 도시를 뒤덮고 있었고,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피 냄새도 진동해서 끊이질 않았다. 내부는 완전한 아비규환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 분명히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레말리트… 무슨 짓을 벌인건가.”

아르투르는 입을 질끈 깨물며 굳건히 닫힌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 때, 성벽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라노는 더 이상 당신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생아 경.”

엔조의 쌀쌀 맞은 목소리였다. 그는 성문 위에서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옆에선 대형 석궁을 든 경비병들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지금은 적이 되었다고 하나, 두라노의 해방에 기여한 자를 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얌전히 떠나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수 명의 석궁병들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에도 평온한 태도로 엔조를 바라봤다.

“레말리트의 명령인가?”

“그렇습니다. 당분간 도시에서 떠나계시면, 일이 끝난 뒤에 사례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거기 동의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르투르는 왼편에 차고 있던 여명을 뽑아들었다. 고대의 강철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엔조는 황급히 들고 있던 오른손을 내렸고, 석궁병들이 시위를 놓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쇄도하는 석궁 화살들을 피해, 아르투르는 성문을 향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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