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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가 건넨 편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참주의 잔당이 군대를 모으고 있으며, 강력한 외국 세력들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도시 내부에는 배신자가 들끓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암살하라는 내용까지 담고 있지 않은가. 아르투르는 루크레치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진의를 의심했다. 그녀의 태도는 변함없이 떳떳했고 거짓 한 점 없이 맑아보였다.
‘함부로 믿어선 안될 사람이지. 최고의 배우 중 한 사람이니 진심을 연기하는 것쯤은 쉬운 일일거야. 하지만 편지가 사실이라면? 그녀가 정말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진실을 전달해주려고 한 것이라면?’
복잡한 생각들이 동시에 올라왔다. 아르투르는 고민하다가, 말을 건넸다.
“자네는 이 편지를 내게 왜 가져 온 건가?”
떳떳하게 답하는 루크레치아.
“아르투르 공께서는 참주군이 돌아와서 두라노 인들을 학살하는 일을 막아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니까요.”
“하지만 신정부는 자네가 아끼는 사람들을, 참주 정부의 지지자들에게 보복을 했네, 나는 자네에 대한 추방형을 주도했지. 복수를 바랄 거라고 생각하네만.”
“제게 내려진 조치가 관대한 것은 아니었고, 레말리트의 통치가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도시를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랍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의아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렇게 행동하진 않을걸세.”
“어째서죠?”
“그보다 훨씬 편하거나, 이득이 되는 길이 많잖나. 편지에 나온 대로 날 제거한다면 다시 공신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을 잊고 다른 도시로 떠난다면 그곳에서도 인기 좋은 삶을 누릴 수 있겠지. 좋은 혼처를 구하거나, 대중의 인기를 얻는 건 자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테지. 자네는 지금 본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길을 택하고 있어. 그게 자네를 믿을 수 없는 이유고.”
아르투르의 말에 루크레치아는 밝게 웃어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르투르 공, 앞서서 말씀하셨죠. 공이 제 입장이라면 저 같이 행동하지 않으셨을 거라고요.”
“그랬지.”
“다시 여쭙겠습니다. 공께서 제 입장이셨다면, 공께서 말씀하신대로 본인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셨을까요?”
다시 침묵이 흐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가장 비천한 자를 위해 싸우시는 기사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요. 공이 제 입장이셨다면 더 위험한 선택을 하셨지, 편한 길을 가시진 않았을 거예요.”
아르투르의 냉정한 표정이 깨져나가며, 눈가가 꿈틀거렸다.
“알아요. 저를 왜 믿지 못하시는 지. 공의 입장에서 저는 무척 못마땅한 사람일거에요. 항상 등 뒤에 독약과 단검을 숨겨왔고, 목소리를 이용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제가 믿는 바를 위해 이용했죠. 하지만, 가당치 않게 들리시겠지만 그것 역시 제가 살아남기 위해 갈고 닦아온 싸움법이랍니다.”
“- 그렇다면 루드비코의 쿠데타를 도왔다가, 다시 변절한 점은 어떻게 설명할거요?”
침묵을 지키는 아르투르를 대신 해서 에렌이 혼란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지지하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요? 마스터 에렌? 저는 루드비코가 도시를 바꿔 주리라고 생각해서 그를 지원했지만, 오히려 나쁘게 만들었죠. 그래서 다시 그를 저버렸어요. 문제가 있나요?”
루크레치아는 눈빛을 돌려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두라노에 닥쳐오는 위협은 진짜에요. 참주의 잔당이 도시를 다시 전복시킬 준비를 하는데, 공화국 정부는 내분에 빠져있습니다. 루드비코의 처형을 유예하고, 그를 인질로 삼아 참주군의 잔당과 협상해야 해요.”
아르투르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군. 루크레치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진즉에 참주를 체포할 때 배신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이 변할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면 애초에 공포스러운 참주 앞에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추방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싶은 것이었다면 루드비코가 처형당해 국제적인 위기가 발발하는 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밝게 웃어보이는 루크레치아.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대책으로 들어가지. 편지를 보낸 안토니오 델 그람시라는 자는 누군가?”
“그는 루드비코의 처조카에요. 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두라노 군을 이끌던 사령관이었죠. 아마 만나보셨을 텐데요.”
아르투르도 기억이 났다. 참주군의 잔당을 무장해제 시킬 때 그들을 대표해서 항복했던 인물이었다.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다시 참주군에 합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모양이었다.
“에렌. 나와 같이 의회로 가지. 루크레치아, 안전하게 머물 곳은 있나?”
“빈민가 출신이라 제 한 몸 간수하는 법은 잘 안답니다.”
“좋아. 우리가 대책을 마련해올 동안 적당히 숨어있게.”
아르투르와 에렌은 곧바로 채비를 하고 레말리트를 만나기 위해 집정관 관저, 눈의 탑으로 향했다. 그들이 건넨 편지를 받은 레말리트를 반신반의한 눈빛이었다.
“루크레치아가 아직 시내에 있나보군요. 분명히 떠나라고 경고했건만.”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닐텐데 말이지. 경고하건데, 루크레치아에게 손 끝 하나도 대지 말게. 그녀는 스스로의 위험도 감수하며 우리를 찾아와 위기를 알린 걸세. 포상은 못해줄망정 벌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게. 이제부터 그녀는 내 보호 아래 있다고 선언하겠네. 그게 무슨 의민지 아리라 믿네.”
“알다마다요. 단단히 부하들에게 숙지시켜두지요. 그나저나,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참주의 처형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래서 외국이 개입하기 전에 빨리 끝내려고 한 건데… 일이 복잡해졌군요. 다만…. 여전히 루드비코를 자유롭게 풀어둘 수는 없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대신, 그의 측근이나 가족들이 있으니 그들을 이용해 협상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적절하군.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이번 일은 내가 맡아서 진행하겠네. 지난번처럼 배신당하면 안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아르투르 공. 떠나겠다고 말씀하셔놓고 돌아오신 연유가 뭡니까?”
아르투르는 표정을 팍 구겨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직도 자네는 날 의심하고 있군. 내가 그렇게 자네들을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건만.”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니까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르투르는 손바닥을 쾅 - 하고 책상에 내리치며 레말리트의 눈동자를 마주쳤다. 차갑게 타오르는 그의 녹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난 자네들 정치 놀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네. 하지만 참주파 놈들이 돌아오면 도시에 무슨 참상이 벌어질지는 아주 잘 알고 있어. 그걸 빌미로 자네가 폭군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나? 난 자네나, 두라노의 영광이나 자유 따위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게 아니야. 참주파가 돌아오면 학살당할 무고할 사람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걸세. 그러니 더 이상 자네 말도 듣지 않을 걸세. 이 일은 내가 도맡아서 처리하지.”
레말리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공께서 나서시겠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도시에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서 참주의 근위대를 쓸어버리시던 모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에렌도 지지 않고 거들었다.
“뿐만 아니라 아르투르 공만이 정말로 선의를 가지고 두라노 이들을 대해오신 것을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 레말리트. 그동안은 당신들의 주도권을 인정했지만, 이제는 나도 더 이상 가만 히 있지는 않을 거요.”
거친 말을 남기고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레말리트는 생각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꿈꿔온 두라노를 만드는 건 불가능해 질터였다. 너무 빠른 속도로 권력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참주파는 폭동으로 인해 자신을 더 이상 믿지 않을 터이고, 강경파는 사실상 엔조가 이끌고 있었다. 그나마 남은 온건파는 에렌을 따를 것이고, 궁극적으론 에렌이 지지하는 아르투르를 따르리라.
‘내가 지도자로 남기 위해서는 국면 전환이 필요해. 이대로라면 내가 꿈꿔온 것을 해보기도 전에, 권력을 잃고 말거야.’
생각에 빠진 레말리트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래. 그거야. 그거면 단숨에 여론을 바꿔놓을 수 있어.’
비록 그 방법은 두라노를 위험에 빠뜨리겠지만, 자신의 권력은 공고히 만들어줄 것이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을 말이다.
….
레말리트는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때깔 좋던 저항군 시절의 모습과 달리 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수많은 문제와 씨름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변한 모양이었다. 가만,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뭐였지? 결국 이상도 두라노를 잘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자신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두라노를 위험에 빠뜨려도 되는 것인가?
아니, 아니, 이제 와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노예 상태에 있던 두라노를 구한 것은 자신이 아니었던가? 아르투르가 아닌 자신이야말로 해방자라고 불려 마땅했다. 민의는 곧 두라노였으며, 민의의 대표는 집정관이었다. 즉, 집정관이 바로 두라노가 아닐까?
‘그래. 뭘 하든지, 권력을 손에 쥐어야만 해.’
주먹을 움켜쥐는 레말리트.
‘내가 곧 두라노다. 약해져서는 안돼. 눈앞의 작은 희생 따위, 작은 것에 불과해.’
***
아르투르는 에렌과 함께, 참주군의 잔당과 협상할 방법을 궁리했다.
“정말로 참주를 살려보내실 생각입니까?”
“그렇다고 두라노가 당장 죽일 처지가 아니란 것도 알겠지. 루드비코는 감옥에 가둬두고, 그들의 가족을 풀어주는 조건이면 협상은 할 만 할 거야. 외국 정부들도 개입할 명분을 잃을 테니 군대를 파견하긴 어려워 질 거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적당히 내어주고 마무리하지.”
고개를 떨구는 에렌.
“…굴욕적인 조건이지만, 전쟁을 치르는 것보단 낫겠군요. 지금 두라노는 국가 간의 전면전을 벌일 상황이 도저히 못 됩니다.”
“잘 판단했네. 과도한 요구는 내 선에서 쳐내도록 하지. 각 외국 도시들이 두라노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지 알려주는 자료를 부탁하지. 참주군 잔당에는 내가 직접 가서 이야기해봐야겠어.”
“직접 가신단 말씀입니까?”
“그래. 전쟁을 막으려면 시간이 많지 않잖나. 직접 가보도록 하지.”
아르투르는 에렌에게 두라노의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참주군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회담을 요청했다. 그들이 협상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하자 아르투르는 곧장 에쿠잘루스를 타고 홀로 성문을 달려나갔다.
아르투르의 뒤를 밟던 밀정들은 레말리트에게 달려가 아르투르가 도시를 떠났음을 고했다. 도시 내에서 자신을 막을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레말리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장 직속 경비대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참주를 끌어내라. 처형이 개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