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80화 (8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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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이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군중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었어야한다는 건가? 엔조가 날 겁박하고 모욕을 하는데도 참았어야하고?”

“이런 말씀을 드려 송구하지만, 정치적, 법적으론 그렇습니다. 자유 도시에선 그렇지 않으니까요. 자유 도시에서 민중의 뜻이란 곧 신의 뜻과 같은 말입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가르치거나 협박하길 원치 않아요. 엔조 건도 그렇습니다. 도시는 법이 지배하는 곳이고, 아무리 화가 나신다 하들 사람을 때리는 일은 안되는 일입니다.”

레말리트가 차갑게 변해가는 아르투르의 표정을 보며 덧붙였다.

“물론 저는 압니다. 아르투르 공께서 어떤 의도로 그런 일을 하신 지요. 하셨던 일은 왕이라면, 혹은 영지의 군주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오히려 칭송을 받았을 일입니다. 하지만 자유 도시에선 공포를 불러오기 좋은 일이죠. 이제 사람들은 공의 이름을 들으며 해방자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혹여 도시를 삼켜 군주가 되고자 하는 자는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레말리트의 말이 끝났음에도 아르투르는 대답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게 정말 두라노 인들의 생각인가?”

다급하게 말하는 에렌.

“아니, 아닙니다! 공을 존경하고 따르는 자들이 더 많아요! 오늘 하신 일도 박수칠 사람들이 더 많을 겁니다.”

레말리트는 차갑게 말했다.

“군주를 섬겨도 상관없다는 자들이나 그러겠지요.”

아르투르는 레말리트를 보며 냉소를 지었다.

“아니, 그게 사실인진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군. 자네가 원래 모습을 숨기고 있던 것이든, 권력을 쥐고 변한 것이든, 자네는 내가 알던 도시의 해방을 위해 힘쓰던 저항군 지도자가 아니야. 정치에 물들어 사리 분별도 못하는 멍청이지.”

아르투르는 쉬지 않고 분노를 내뿜었다.

“시민, 시민 여론이라고? 그렇다면 참주가 그 시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팔 때 그 시민들은 어디 있었나?! 내가 군주가 되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될 수 있었다. 루드비코보다 훨씬 강하고 무서운 군주가 됐겠지. 내가 그러지 않은 건 순전히 내가 기사도의 이상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아무런 보상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옳은 일에 기사가 보상을 바랄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귀한 혈통인 내가 너희와 같은 높이에서 어울린 것도 너희와 친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고!”

분노를 토해내는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배신감과 상실감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다른 귀족 군주들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야. 그런데 너희는, 그런 내 모습을 응원해주진 못할망정 너희가 잘못된 길을 가는 걸 바로잡아주었다는 이유로 날 의심하고 배척하는구나. 나도 이런 배은망덕에는 할 말이 없구나. 더 이상 파렴치한들만이 가득한 곳에 있지 않겠다.”

레말리트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묻어나왔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고귀하게 태어난 자와 평범하게 태어난 자가 어찌 서로를 이해하겠습니까. 두라노가 그대에게 많은 것을 빚진 건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차가운 표정으로 뒤로 돌아섰다.

“필요 없다. 네 정권도 그리 오래가진 못할 것 같으니, 네 목숨이나 잘 간수하거라.”

“안녕히 가십시오. 아르투르 공.”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보이는 레말리트를 뒤로 한 채, 아르투르는 집정관의 집무실을 떠났다.

***

“아르투르 공! 제발 결정을 거두어주십시오! 아직도 두라노에는 공이 필요합니다!”

아르투르는 에렌의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에렌은 아직 도시가 안정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남아달라고 사정했지만, 아르투르는 요지부동으로 통 듣지 않았다.

“이대로 가시면 두라노 인들은 서로를 칼로 찌르기 시작할겁니다! 길거리에 시체가 나뒹굴고 피 냄새가 진동하겠지요. 머지않아서는 서로를 왜 미워했는지, 왜 싸워야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말 겁니다.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량한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겠지요. 그 꼴을 두고만 보실겁니까?”

답하는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들끼리 서로를 증오하는데,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가? 내가 자네들을 도와 참주를 무너뜨린 건 도시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어. 나는 대가 없이 자네들을 도우러 왔고, 이제 더 이상 자네들이 내가 필요하지 않다니 떠날 뿐일세.”

에렌은 애처롭다시피 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의 정부가 모든 두라노 인을 대표하는 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일상을 살고 싶을 뿐이에요. 참주의 복귀도, 과도한 복수도 바라지 않습니다. 일을 마치고 와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일상! 그것이 바라는 전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공을 흠모하고 있다고요.”

아르투르의 대답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 그런가? 그래서 그 자들은 대체 어디 있는가? 참주의 폭정에도 침묵했고, 이번 폭동 때도 어디엔가 숨어있었겠지. 스스로 나서서 뭔가를 바꾸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말이야. 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음에도 남의 보호만 기대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네. 살아남고 싶다면, 싸워서 지킬 생각을 하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 아르투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에렌은 아르투르의 말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미안하네. 친구여. 나도 흥분했다보니 말이 좀 거칠게 나갔군. 그래. 자네가 염려하는 바도, 내게 기대하는 바도 알겠어. 하지만, 내가 볼 때는 레말리트의 말이 맞기 때문에 떠나려는 걸세. 난 이곳에 쭉 남아있을 사람도 아니고, 도시의 지배자가 될 생각도 없어. 어찌됐건 하나의 질서로 통합이 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내 존재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 자네는 내가 도시를 이끌어주길 바라지만, 내겐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네.”

“어째서입니까? 공께서 도시를 통치하시겠다고만 하면 뒤따를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자유 도시니까. 자네들이 바라는 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이끌어줄 군주가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을 살살 달래줄 영리한 지도자 아닌가. 나는 그런 물렁한 리더쉽은 배운 적도 없고, 그런 역할에 만족하지도 못할 걸세. 그런 이유지.”

짐을 모두 꾸린 아르투르는 현관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에렌은 아르투르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리라. 이미 자신과 두라노는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바가 있었다. 더 이상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자네에게도 도시를 떠날 걸 권하고 싶네. 자네가 말한대로, 두라노가 혼돈의 도가니로 변하는건 시간 문제야. 두라노를 이렇게 떠나게 되었지만 우리 우정에는 변함이 없으니 자네를 도울 일이 있거든 알려주게.”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아르투르 공.”

에렌의 대답을 들은 아르투르가 문을 열고 나섰을 때, 현관문 앞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가냘픈 체구의 여성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또 인사드리네요.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르투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참주의 정부이자, 정권의 몰락에 큰 공을 세운 바 있었고, 자신이 추방령을 제안했던 사람, 루크레치아였다.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추방령을 선고 받았을 텐데. 자네와 내가 함께 있는 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일은 아닌 것 같네만.”

“그만큼 다급한 일이어서 왔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요. 왕자님.”

아르투르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돌아설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당당했고 눈도 투명했다. 오히려 어떤 절박함이 느껴졌다. 아르투르는 그녀와 만나는 것이 자신의 평판에 해가 될 수 있음을 알았지만, 기꺼이 그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미행하는 자가 없는 걸 확인했으니 왕자님께 누를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들어오게.”

아르투르는 뒤따르는 자가 없는 지 한번 둘러본 후, 현관문을 닫았다.

***

두 사람이 테이블에 마주 앉은 가운데, 에렌이 차를 내왔다. 이 시대에 차는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굉장한 사치품이었지만, 에렌은 대장장이 길드의 유력자였다. 루드비코가 몰수했던 재산을 돌려받자, 그는 자연스레 도시의 손꼽히는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에렌.”

에렌의 대답은 쌀쌀했다.

“자네는 추방형에 처해졌고, 지금은 떠났어야 해. 경비병들의 눈에 띄면 처형당할 걸세. 더군다나 자네는 너무 눈에 띄어.”

“걱정 마세요. 신원을 숨기고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데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 그러게. 그럼 난 이만 나가볼테니 편히 이야기 나누게.”

“아니에요. 마스터 에렌. 당신도 반드시 들으셔야하는 이야기에요. 와서 같이 앉으시죠.”

아르투르는 팔짱을 낀 채 루크레치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자신을 도와 참주를 전복시킨 동지? 아니면 참주의 권력에 빌붙었던 하수인인가? 보는 시선에 따라 그녀는 단지 고급 매춘부일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일수도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용건부터 들어보지. 한가하게 안부나 주고받을 입장은 아니잖나. 남들이 알면 뒷말이 나오기 딱 좋은 상황이야.”

아르투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루크레치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지금 진행되려는 루드비코의 처형을 막으셔야 해요.”

루크레치아의 말을 들은 아르투르와 에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잘못 들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서로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확인한 아르투르는 루크레치아를 바라봤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두라노의 전 참주, 루드비코 델 레코레의 처형을 막아야한다고?”

“네.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노예 시장에 내다팔았던 폭군 루드비코요.”

“혹시 자네가 이전에 우리를 돕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고 있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네.”

고개를 젓는 루크레치아.

“아니요. 제가 아직 루드비코의 품속을 그리워한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한때 제 영웅이었다는 것도요.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선을 넘었어요. 죽음 외에 그에게 합당한 처벌은 없습니다. 발타리아께 맹세코.”

표정을 찌푸리는 아르투르.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이름을 너무 헛되이 부르는군.”

“불쾌감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루드비코의 처형을 막아야한다는 건 그런 사감 때문이 아니라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서예요.”

루크레치아는 품속에서 한 장의 편지를 꺼내 아르투르에게 공손히 양손으로 건넸다. 아르투르는 그것을 받아 펼쳐보았고, 에렌과 함께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아르투르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에렌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이 편지가 진짜요?”

***

『오랜 친구이자 두라노의 여신인 루크레치아에게.』

루크레치아, 상황이 급하니 인사말은 생략하겠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 우리가 두라노를 수복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군대의 모집은 순탄하고 내통자도 모여들고 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해 우리와 내통하게 하십시오. 여전히 많은 시민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일전에 군사적으로 도시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무익할 거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걱정 마십시오. 그때보다 훨씬 판이 커졌으니까요. 국부님의 사위인 제라니아 참주 다네스와 펠릭스 왕이 지원군을 보내왔습니다. 랑트리뷔아체 놈들도 영토 할양을 대가로 군대를 움직여주겠다고 했고, 황금 백조 은행도 거의 설득되었습니다. 그들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끝난 일이죠.

당신이 해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괴물 같은 사생아 왕자를 죽여주십시오. 코끼리도 죽이는 맹독을 동봉해두었습니다. 어떻게 하셔야 할지는 아시겠지요? 이미 몇 번 해보셨을 테니까요. 장담컨대, 당신 앞에서 눈이 멀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겁니다. 그 기사도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그 자만 처치하면, 두라노는 우리 것입니다. 이번 일만 잘 되면 정말 참주님의 사랑을 얻을 지도요.

이번에 도시를 탈환하면 제대로 본보기를 보일 생각입니다. 의회의 의원들과 그 가족들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길 것이고, 반군들은 꼬챙이에 꿰여버릴 겁니다. 공포가 부족했던 탓에 반란이 일어났던 거니까요. 그때가 되면 당신도 누구에게 어떤 보복을 할지 정해두십시오.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일이군요.

『당신의 친구이자 두라노의 국부, 루드비코 델 레코레님의 진정한 충복인 안드레아 델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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