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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78화 (7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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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도시의 유명인이 된 후 하루도 빠짐없이 선물을 받아왔다. 순수하게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자와 연줄을 만들어보려는 자, 그냥 친해지고 싶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어찌나 많은 선물이 왔는지 그의 방에 상자가 가득할 정도가 되었다.

“들고 가기엔 너무 많고, 그렇다고 팔아버리는 건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아르투르는 쌓여가는 상자들을 보며 행복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많은 선물이 와서 마음의 표시만 받겠다는 뜻을 밝혀도 사람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추천드리고 싶은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친구여.”

“두라노 공화국이 참주에게 전복되었던 이유는 누구도 빈민가의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던 탓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썩 기뻐하고 있지는 않지요. 아르투르 공께서 그들에게 선물을 베푸시면 빈자들을 챙긴다는 명분도 살고, 그들도 아르투르 공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될 겁니다.”

아르투르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도 약자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기회니 마음에 드는군. 그렇게 하지. 내가 직접 쓸 선물들만 빼고는 모두 자네를 통해 빈민가에 기부하겠네.”

참주 정권의 몰락 이후 온 도시가 기쁨에 빠져들었건만, 빈민가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도시에서 내버려진 자들이었고 따라서 가난에서 자신들을 구제해준, 적어도 그러려는 의지를 보였던 참주를 존경했다. 특히 빈민가 출신으로 도시의 자랑이 된 루크레치아는 그들의 희망의 상징이자, 대표였다.

때문에 선물이 그들에게 도착했을 때 내보인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아르투르가 루크레치아를 추방한 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저주하고 있었으니까.

“이… 이 모피코트가 다 뭐요? 한 벌에 우리 집 한 채 값은 하는 건데….”

에렌은 웃으며 말했다.

“아르투르 공만큼은 자네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이지. 또한 옛 공화국과 달리, 신 공화국은 자네들 역시 도시의 시민으로 대우한다는 증거고.”

그들의 표정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흥. 그래봐야 새 정부는 우리들의 집과 재산을 뺏고, 빈민가로 돌려보내지 않았소. 이제 와서 우리에게 선심 쓰는 척 하지 마시오.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는 루드비코 참주님뿐이니까.”

에렌은 표정이 조금 굳어졌지만, 애써 웃어보였다.

“그건 참주가 빼앗았던 시민들의 재산일세.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간 것은 불가피한 조치였네 자네들의 억울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네만 앞으로는 잘 될 거야.”

“흥. 그래봐야 당신도 부유층 출신 아닌가. 어디 그 번지르르한 거짓말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그들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르투르가 보낸 선물들은 결국 군말 없이 받아갔다. 당장 굶고 살수는 없었으니까.

“저 친구들이 내 선물을 기껍게 받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아르투르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을 기대했건만, 대부분 냉소적인 표정으로 선물만 받아가는 게 아닌가. 와서 감사의 뜻이라도 표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을지도 몰랐다. 에렌은 그런 빈민들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도량이 큰 공께서 이해해주시지요. 누군가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오랫동안 버림받아온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계속 진심 어린 호의를 보내준다면 달라지고야 말겁니다. 참, 공께 드리고 싶은 제 선물이 있습니다.”

에렌이 박수를 치자 그의 하인들이 큼지막한 상자를 낑낑대며 들고 왔다. 안에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물건이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아르투르도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한번 열어보시지요. 공께서 가장 좋아하실만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래. 한번 보자고!”

아르투르가 상자를 열자, 번득이는 은빛 판금 갑옷과 유려한 문양이 장식된 보검이 같이 놓여있었다. 판금 갑옷의 두께는 자신이 평생 보아온 갑옷들 가운데 가장 두꺼웠지만, 정작 입어보자 무게는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미형적인 면에서도 의장용 갑옷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르투르의 반짝이는 눈빛을 읽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에렌이었다.

“저희 도시의 최고 작품입니다. 모든 대장장이를 불러 모아 최고의 기법과 재료들만 사용했지요. 희귀 금속들을 사용해 무게는 가벼우면서, 강도는 더 두껍습니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왕에게 진상품으로 드려도 모자람이 없을 선물이지요.”

아르투르는 아이처럼 웃으며 갑옷을 매만졌다. 망치를 들고 와 갑옷을 때려보기도 하고, 검으로 두들겨보기도 했는데 흠집조차 나질 않았다. 이런 갑옷이라면 평범한 화살로는 꿰뚫기도 어려워보였다.

“정말 마음에 드네! 내겐 최고의 선물이야!”

에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을 들어 내밀었다. 익숙해 보이는 검 손잡이를 들고 빼내자, 검 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의 끝은 대단히 예리해 사슬 갑옷쯤은 꿰뚫을 수 있을 터였고, 벽돌을 몇 번 두들겨봐도 흠집도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척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공께서 쓰시던 검, 여명을 몇 남지 않은 고대의 강철로 벼려냈지요. 제 일생의 역작입니다!”

아르투르는 앞선 갑옷보다 이것이 마음에 드는 지,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탐미했다. 여명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검이었다. 종자가 되면서 마스터에게 선물 받았던 검으로 평생을 함께 해온 동반자였다. 아르투르는 벅찬 표정으로 에렌을 바라봤다.

“다시는 여명을 벼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친구여. 내가 수백 개의 선물을 받았지만 이것보다 마음에 드는 건 찾지 못했군. 어디 그뿐인가? 이런 검을 벼려내기 위해 들어갔을 자네의 노고가 보이네. 진정으로 내 공에 대한 보상이 되었네. 진정으로 고맙네.”

환히 웃어 보이는 에렌.

“노고를 인정해주시니 저희도 더욱 큰 보람을 느끼고, 선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으로 두라노가 경에게 진 빚의 일부라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부? 일부라고? 아닐세! 이정도면 빚을 다 갚고도 남아!”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미소를 지은 아르투르는 무장을 마친 후, 에쿠잘루스를 타고 시외로 나갔다. 다시 벼려진 여명은 왠지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알던 모든 검술 동작을 반복해보았다. 왠지 훨씬 날쌔고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 이거라고!”

새로운 무구들은 아르투르의 무예에 대한 선천적인 열정을 자극했다. 그는 모든 사교 활동을 취소하고 다시 무술 연습에만 전념했다. 순식간에 생각이 변했다. 기름 진 음식은 몸을 무겁게 할 뿐! 술자리는 근육의 손실을 불러일으킬 뿐인 낭비고,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는 무기가 부딪히는 강철의 소리에 비하면 작은 소음에 불과해졌다.

타고난 기사인 아르투르에게 무예의 단련은 심신을 단련시키는 수행이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취미였으며, 고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였다. 그런 아르투르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도시 사람들은 검술 사범들을 보내 대련을 하게 했는데,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아 아르투르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자네 두라노 인들은 공업과 예술에 소질이 있지, 무술과는 썩 연이 없는 것 같군.”

실망스런 표정을 짓는 아르투르를 보며, 나가떨어진 검술 사범들은 소리 내어 웃었다.

“와하하하! 공에 비하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

경비병들이 두라노의 길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두루마리를 걸어 도시의 중대한 소식을 알렸다. 집정관의 도장이 찍힌 포고문이 한 곳도 빠짐 없이 벽에 내걸리자, 두라노는 순식간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정의가 실현되리라!”

“아… 안돼! 이럴 수는 없습니다!”

환호성과 비탄이 교차하는 시기, 무술 단련을 마치고 온 아르투르는 호기심 속에 포고문으로 다가갔다.

* 재판 결과 게시 : 반역죄 선고 *

피고 : 루드비코 델 레코레 외 공직자 11인.

혐의 : 반역죄, 살인죄, 강도죄, 횡령죄, 인신매매죄, 이적죄. 그 외 12가지 강력 범죄와 34가지 범죄에 대하여.

재판관 : 집정관 레말리트와 의회에서 선정한 7인의 특별 재판관.

재판 결과 : 모든 혐의에 대하여 전원 유죄.

처벌 : 공개 참수.

재심 여부 : 불가. (증언 및 증거가 매우 구체적이며 다양하므로 재심이 필요 없음.)

처형 일자 : 공고일로부터 일주일 뒤.

* 집정관의 포고문을 임의로 훼손, 철거하는 행위는 공권력의 행사를 집행하는 중대 범죄임 *

포고문을 붙인 경비병들은 이어서 집정관 레말리트의 전언을 외쳤다.

“공화국 정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과거의 범죄에 대한 정의로운 처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참주의 옛 지지자들은 걱정 하지 말라. 루드비코의 죽음을 끝으로 공화국 정부는 과거의 일을 모두 불문에 붙일 것이다.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정부에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일 뿐, 그렇게만 한다면 어떤 보복도 없을 것임을 다시 확인한다.”

포고문이 게시되자 중심가의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열광적인 환호를 내질렀다.

“공화국 만세! 델 레코레 가문에 영원한 저주가 있으라!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복수! 복수! 복수! 복수!”

루드비코의 사형 집행이 전해지자 오랫동안 그에게 억압되어왔던 자들은 축제날이 온 것처럼 들떴다. 그들은 거리로 몰려들어 도시 전체를 행진했다. 누가 주도한 것도 아니었건만, 자연스레 거대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피를, 복수를 원한다는 것을 명백히 내보였다. 많은 집들도 같이 붉은 천 등을 내걸어 거기에 호응했다. 점차 흥분하게 된 군중은 깃발을 내걸지 않은 집들을 찾아가 따져 물었다.

“당신들은 참주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가? 그래놓고도 공화국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나?”

집 앞으로 까마득하게 몰려든 군중을 보며, 한 중년 남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옆에는 걱정스러운, 반쯤은 겁에 질린 아내와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어린 곰 인형을 꼭 품에 쥔 소녀가 있었다.

“아, 아빠. 사람들이 왜 몰려온 거에요?”

“도시의 주인이 변했어요. 이제라도 깃발을 내걸어야한다니까요.”

아내가 속삭이며 남자에게 붉은 깃발을 내밀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젓고 문을 열고 나가 군중들의 앞으로 나섰다. 수백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무척 두려운 일이어지만, 그는 기어코 용기를 냈다.

“그렇소. 나는 참주님의 죽음을 원하지 않소.”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어째서요?”

각목을 들고 앞장서고 있는 사내가 조용히 되물었다.

“왜냐하면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분이오. 내게 일자리도 주시고, 자식들도 학교에 보내주셨지. 정부가 바뀌었으니 그분이 처형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그분의 죽음을 기뻐하라고 강요하진 마시오.”

그러자 좌중이 다시 한 번 얼어붙었다. 서둘러 남편을 따라 나온 아내는 애써 웃어 보이며 붉은 깃발을 군중 앞에 휘둘렀다.

“그, 그이가 좀 헛소리를 했나봐요. 저희 집도 참주 놈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공화국 만세! 참주에게 죽음을!”

남편은 눈치도 없이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가난뱅이 신세 벗어나게 해준 게 루드비코님인거 잊었어? 돕진 못할망정 배신은 하지 말아야지!”

군중의 침묵이 분노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참주랑 한패인 놈이다!!!!”

“반역자!!!”

흥분한 군중은 앞 다투어 달려들었고, 필사적으로 남편을 지키려는 아내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무자비한 폭력이 남자에게 잇따랐고,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든 터라 남자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 채 두들겨 맞아 죽어갔다. 방치되어 있는 소녀는 군중 속으로 끌려가는 어머니와 맞아 죽어가는 아버지를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혼란을 틈탄 일부의 사람들은 집 안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물건을 털어댔다.

“엄마… 아빠…”

자리에 주저앉은 소녀는 곰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소녀의 세계 속에서 아버지는 든든한 왕이었고 어머니는 천사였으며, 집은 천국 같은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세계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 유린되고 있었다. 누구도 작은 소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소녀는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간절히 바랬다.

누군가 나타나 자신의 세계를 구원해주기를. 이 무자비한 악마들에게 천벌을 내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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