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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의 눈에는 루크레치아의 무죄를 연호하는 군중과 그녀를 참수해야한다는 군중이 같이 보였다. 관점에 따라 루크레치아는 민중들을 위해 힘써온 도시의 여신이자 상징이거나 참주의 폭정에 동참해온 동조자였다.
많은 사람들의 증오와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몸.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냐는 향후 신 정부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일이 될 터였다.
“내가 왕이라면 루크레치아에게 과거의 행적에 대한 해명 및 공개 사과를 요구하겠네. 그녀가 거기에 화답한다면, 죄를 사면해주고 신정부에 합류시키겠지.
레말리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죄에 대해 엄격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내가 세상 물정을 잘 아는 건 아니네만, 단순히 흑백으로만 가를 수 없는 일이 없다는 것도, 때로는 통합이 필요한 시기도 있다는 것도 잘 아네.”
“하지만… 경의 말씀대로 했다가는 그녀의 반대자들이 큰 불만을 품을 겁니다. 오히려 여론의 대립이 심해지고 도시의 통합은 요원해지겠죠. 저는 대중의 의견을 대표할 뿐, 그들을 대신하진 못합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그래 보이는군. 두라노는 왕국이 아니고, 자네는 내가 아니지. 그럼 차선책을 제안하겠네. 처벌이 교수대와 무죄 방면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도시에서 영구히 추방하는 선에서 그치지.”
고개를 끄덕이는 레말리트.
“역시 그 정도가 좋겠죠. 모두가 마음으로 동의하긴 어려워도 납득할만한 선이니까요.”
“지금까지 자네가 보여준 정치 감각을 볼 때 이런 방법을 몰랐을 것 같진 않은데.”
“제가 왕이라면 말씀하신 판결을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시민의 대표일 뿐, 도시의 주인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그녀는 너무 유명인사여서 어떤 판결을 내리건 저는 양 세력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같은 말을 내게 반복하는 이유가 무언가?”
아르투르는 한동안 레말리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이 남자가 조언을 구한 이유는 정말로 이런 온건한 해결책을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그의 의중을 파악한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영민한 친구 같으니, 조언을 구한 게 아니라 부탁을 한거였군.”
머쓱하게 웃는 레말리트.
“권위를 지닌 제 3자가 필요한 사안이라서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난 어차피 두라노를 떠날 사람이니 민심을 잃는 게 문제는 아니지. 그렇게 하겠네.”
아르투르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두라노의 시민들이여! 들어보라! 너희들의 해방자 아르투르가 제안을 하고 싶다!”
아르투르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장중의 소란을 모두 잠재웠다. 서로 화를 내며 삿대질을 하던 군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루크레치아는 참주의 쿠데타에 합류했던 반역자이며, 학정에 동조하던 협력자라는 점은 사실이다. 그 점만 본다면 교수대의 밧줄이 합당한 대가일 것이다.”
처벌을 반대하는 군중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반면, 강경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옳소! 옳소! 정의의 기사, 아르투르 만세!”
“그렇지만.”
아르투르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재차 잠재웠다.
“참주의 정권에 등을 돌린 공도 잊혀져서는 안된다. 나는 그녀가 단순히 기회를 보아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이번 일에 협조했다고 믿는다. 스스로 특권을 포기하고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군중의 얼굴은 급속도로 변했다. 그를 찬양하던 자들은 분노를 드러냈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던 자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다. 아르투르가 볼 때 군중이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자들이었다. 방금까지 자신을 저주할 듯 노려보던 자들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지혜로우십니다. 해방자 아르투르 만세! 선량공 아르투르 만세!”
방금까지 정의의 기사를 말하던 자들은 야유를 보내며 저주를 퍼붓곤 했다.
“아르투르 공! 당신이 무슨 문제로 이 문제에 끼어든단 말입니까? 참주에게 가족을 잃지 않은 자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고도 당신이 정의를 추구하는 기사라 말할 수 있습니까?”
아르투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신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따라서 나는 그녀를 추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조치는 반역자들은 도시에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내면서, 진지하게 반성하는 자들은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선언이 되리라. 두라노와 루크레치아는 모두 새 출발을 해야 한다. 내가 그대들의 해방자가 맞다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
양 측 모두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야유를 보냈고 몇몇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저주까지 했다. 평소라면 끌어내서 불경죄를 물을 일이지만 아르투르는 군중이 흥분했거니 하며 넘어가기로 했다.
“우리의 마돈나를 빼앗지 마! 그녀는 무죄란 말이다!”
“다른 도시에 가서 풍족한 여생을 보내는 게 어찌 처벌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녀의 피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혼을 달래야하오!”
재판장의 소란은 갈수록 심해졌고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이 나타나려는 무렵, 레말리트는 재판관의 의사봉을 땅땅 내리쳤다.
“정숙! 정숙하라! 나는 해방자 아르투르 공께서 우리 공화국에 기여한 바를 고려할 때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집정관의 권한으로 피고, 루크레치아에게 추방형을 선고하겠다. 도시를 떠날 한 달의 말미를 주겠으며, 그 뒤에 도시로 돌아온다면 죽음으로 죄를 묻겠다. 이상, 피고 루크레치아에 대한 판결을 마친다.”
루크레치아의 열혈 지지자들은 의자를 집어던지며 날뛰었고, 강경파들은 그녀를 죽여야만 한다며 울부짖었다. 일부 의원들, 특히 자유 형제단 출신의 의원들은 아르투르를 향해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해방을 해낸 건 우리인데 저 외부인이 이 안건을 결정하다니! 언제부터 공화국이 한 사람의 뜻으로 움직이는 곳이 되었는가?”
“쉿. 조용하게. 아직 그분은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우리 지도자인 레말리트와도 친해. 일단은 지켜보자고.”
아르투르와 레말리트는 기립해서 법정을 빠져나갔다. 야유가 날아들었지만 아랑곳 않고 떠나는 두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그들이 원하던 그림이었으니까.
충분히 법정에서 멀어진 후, 레말리트는 아르투르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르투르 공, 덕분에 큰 난관을 지났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정부의 출발을 위해 오명을 뒤집어써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뭐, 욕 좀 먹으면 어떤가. 내가 추구하는건 정의와 평화지. 루크레치아는 적당한 벌을 받았고, 두라노의 시민들이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그것으로 족하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두라노를 잘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네.”
아르투르는 레말리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두들겨주었다. 재차 고개를 숙여 보이는 레말리트.
“언젠가 이 빚을 갚을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라노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
“빚이라고 생각하지 말게. 기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그저 내 공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보상은 충분하네. 그건 그렇고, 내가 언제까지 두라노에 머물러주면 되겠나?”
레말리트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루드비코의 재판은 보고 가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암, 그래야지. 재판은 언제쯤 치를 생각인가?”
“지금 제 사람들로 군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야 참주의 재판을 진행할 수 있겠지요. 이 주에서 한 달 정도가 걸릴 것 같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딱 쉬고 떠나기 좋은 기간이군. 그래서 루드비코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레말리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공화국을 파괴한 자, 수많은 죽음과 만행의 책임이 있는 자에게 내려질 형벌은 단 하나, 죽음뿐입니다. 공화국의 역사에 분명한 선례를 남기고야 말 것입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합당한 판결일세. 돕도록 하겠네. 그럼, 재판 때까지는 자리를 지켜주겠네. 쉬고 있을 테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게.”
레말리트가 정치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군부를 장악해가는 동안, 아르투르는 휴식을 취했다 선술집과 축제가 열리는 광장이 그의 놀이터였다. 아르투르는 두라노의 시민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식사를 즐겼다. 시민들이 아르투르에게 보내는 환대는 열광적이었다. 아르투르는 낮은 자를 위하여 싸워주는 정의의 기사였고, 자신들을 구해준 해방자였다.
“아르투르 공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아르투르도 이때만큼은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한 명의 젊은이로서 도시의 환대에 응답했다. 그는 혈통에 대한 자부심만 내려놓는다면, 인기 있는 청년의 면모를 두루 가지고 있었기에 만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시원시원하고 호탕한 성격은 남자다운 외견과 합쳐져서 순식간에 도시의 최고 인기인을 만들어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아르투르의 이름을 연호했고,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다. 동네 형을 찾아오듯 편히 술을 싸들고 오는 도시의 청년들, 마치 조카나 아들을 대하듯이 대하는 중장년의 시민들. 끊임없이 추파를 던져오는 여인들.
아르투르는 이 모든 것을 즐겼다. 그는 여전히 매우 젊었고,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일도 퍽 즐거웠다. 격식 없는 도시의 자유로운 문화는 그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아르투르는 밤중에는 에렌의 저택에 머물렀다. 그가 도시에서 가장 믿을만한 친구이기도 했고, 정치적인 힘을 실어주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 에렌과 그의 가족이 대단히 환영한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내 고향과는 정말 정서가 다르군. 모두가 날 위 아래 없이 친근하게 대해오잖나.”
“공께선 분명 특별한 분이십니다. 대왕의 아들로 태어났고 성검의 선택을 받았으며, 홀로 군대도 무찌르시는 분이죠. 그런데 저희 같은 평범한 이들이 대등하게 대해오는데도 괜찮으신겁니까?”
손을 내젓는 아르투르.
“솔직히 말하면 편하기 그지없네. 궁정 생활이 어떤지 아는가? 윗사람에겐 모든 예우를 갖추고, 아랫사람에겐 친근하게 굴고 싶어도 격식을 차려야해. 그렇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이 가득하거든. 그런데, 또 그런 격식을 차리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사회인 것도 사실이거든. 그래서 보통은 마음이 맞는 자가 아니라 지위가 맞는 자를 친구로 삼는다네. 아주 답답한 곳이지. 하지만 이곳에는 진정으로 마음 맞는 이들과 어울릴 수 있어서 좋군. 모든 자유 도시가 이런 곳이라면 이 공화정이란 것도 썩 괜찮을지도 몰라.”
피식 웃어 보이는 에렌.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시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옛 공화국 시절엔 도시의 생활도 궁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부유층과 중산층, 하류층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죠. 지금이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해방감에 모두가 하나가 되었을 뿐이니까요. 흥분이 가라앉고 나면 도시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라는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겠죠. 그러면 그 때는 지금처럼 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렌의 목소리는 어두웠지만, 아르투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뭐,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함께 큰일을 해낸 경험이 있으니 필요할 때 다시 뭉칠 수 있지 않겠나?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아. 미래의 일은 미래에 걱정하자고.”
에렌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말씀하신대로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부디, 지금의 단결이 계속되기를 바래야겠지요. 부디 제 걱정이 기우로 끝나길 빕니다.”
“에헤이. 지금은 현재를 즐기라니까. 겨울산에서 자네를 만난 건 천운이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잖나.”
아르투르는 유리잔에 포도주를 담아 내밀었고, 에밀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자 짠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잔 속의 포도주가 일렁였다. 아르투르가 먼저 소리 높여 외쳤다.
“두라노의 영원한 번영을 위하여!”
“아르투르공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두 사람은 평범한 일상 이야기부터 살아온 인생 이야기, 두라노의 미래 등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아르투르는 모든 것이 끝났으니 잘 될거라고 여겼지만, 에렌은 여전히 걱정이 많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