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76화 (7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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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과의 마찰을 뒤로 하고, 아르투르는 신 공화국 정부의 첫 군사작전을 성공시켰다. 참주군은 무장 해제하거나 소속을 바꿨고, 혹은 두라노 영토 밖으로 철수했다. 그 사이, 레말리트는 도시를 정상화시켰다. 도시를 다스리던 100인의 의회를 부활시켰는데, 그 구성원은 도시의 명사들과 형제단의 간부들로 이뤄져있었고, 자신은 의장이자 의회의 권한을 위임 받은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아르투르가 볼 때 레말리트는 뛰어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 빠르게 질서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켰다. 그는 세 가지 조치를 내렸다. 치안 회복, 경제 질서 회복, 정치적인 자유의 복구,

“오늘 자정을 기해 도시에는 당분간 야간 통행 금지령을 내릴 것입니다. 치안의 회복은 어느 때보다 시급하며, 약탈자들에겐 단호한 대처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경비병들의 월권 행위가 발견된다면 반역죄로 다룰 것이니, 그것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지금 군사력을 담당하고 있는 자유 형제단원들은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랐고,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치안 공백을 메꾸었다.

“참주정 시절에 시민들이 정부에 지고 있던 부채를 전액 소각합니다. 세금을 빙자해서 참주가 받아내던 모든 상납금도 폐지하겠습니다. 기존의 세금 부담의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이 부분이 시민들이 가장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부분이었고, 두라노의 경제가 빠르게 정상화되는데 결정적인 조치였다. 살인적인 세금이 사라지자 본디 상업, 공업 도시로서 발달해있던 두라노의 경제는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도시에 대한 물류 공급이 재개되었고, 이는 곧 물가 안정으로, 이는 다시 민생의 회복으로 이어졌다.

“신정부는 모든 정치범들을 사면할 것이며, 시민들의 권리를 제약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할 것입니다. 이제, 두라노 시민은 자기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말하고 행동할 때, 더 이상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 도시가 돌아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레말리트가 제 2의 참주가 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 조치는 그에 대한 의심을 여름날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게 했다. 대다수 시민들은 엄청난, 신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해방자 레말리트 만세! 공화국 만세!”

레말리트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지금 두라노에는 크게 보아 세 세력이 있었다. 레말리트가 이끌던 자유 형제단, 참주에게 충성을 바치던 세력들, 눈치를 보아가며 살던 평범한 시민들. 참주 시절의 유산을 어떻게 청산해야 할 지를 두고, 세 세력은 물 밑에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먼저 칼을 뽑은 것은 당연히 자유 형제단이었고, 눈치를 보며 수그린 것은 참주였다, 일부 형제단원들은 매우 강경한 보복 조치를 주장했는데, 아르투르도 그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자네 대원들이 그러는데, 참주를 따르던 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을 원하더군. 나도 거기 동의하네. 죄를 저지른 자들에겐 마땅한 심판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여기, 시민들과 자네의 부하들이 작성해온 살생부가 있다네.”

붉은 책을 내미는 아르투르를 향해, 레말리트가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지금은 몰락했지만, 한때 루드비코 정권은 삼 할이 넘는 지지를 받던 파벌입니다. 그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은 광범위한 불안감을 일으킬 것이고, 정국의 엄청난 불안정을 가져올 겁니다.”

아르투르는 팔장을 끼며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렇다면, 아무런 조치도 없을 거란 건가?”

“아뇨. 그럴 순 없죠. 루드비코와 그 측근들은 분명히 처벌받을 것입니다. 또, 참주 정권이 착취해서 지지자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재산도 반환할 것이고요. 하지만 살생부를 통한 대규모 사형, 추방은 없을 겁니다.”

“그건, 정의롭지 않은 일일세.”

레말리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르투르 공, 저는 공의 정의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정치에 있어선 정의보다 중요한 건 균형 감각입니다. 참주의 협력자 대부분들은 큰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강한 쪽에 붙는 기회주의자들이었을 겁니다. 정치가란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좋은 방향으로 기여할수록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 본업이죠.”

“흐음.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네. 지도자라면 마땅히 백성들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고, 자신이 본보기를 보이며 강력한 의지로 이끌어가야겠지. 하지만 이곳은 자네가 통치하는 땅이지. 자네 뜻대로 하게나. 뭐가 되었든, 참주의 통치보다는 훨씬 낫겟지.”

레말리트는 경쾌하게 웃었다.

“존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건 왕과 집정관의 차이가 아닐까 싶군요. 왕들은 신의 지상 대리인일지 몰라도, 공화국의 지도자란 그저 시민들의 대표일 뿐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일신과 가족의 평안이 우선이구요.”

“동의하진 않네만, 자네의 입장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네.”

한편, 시라노 경은 집정관의 전속 부관이 되었다. 그는 광장으로 나아가 가득 몰려든 시민들 앞에서 레말리트의 포고문을 외웠다.

“어두운 시절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다. 과거에 참주를 따랐던 자들도 일체 과거의 일은 불문에 부칠 것이다. 안심하고 공화국에 충성하라. 그러나 사면은 어디까지나 죄가 작은 이들을 대한 것일뿐, 사악한 비밀 경찰들과 고문 기술자들은 지체 없이 교수대에 매달리리라!”

그렇지 않아도 대중은 참주의 공포 정치에 앞장서던 이들에 대한 증오가 들끓던 중이었다. 고문기술자나 비밀 경찰들의 집은 습격 대상이 되었고, 길거리에서 맞아죽거나 끌려나와 교수형당하는 상항이 벌어졌다. 일부 군중은 국회 앞으로 몰려가 수감된 루드비코에 대한 죽음을 외쳤다.

“재판 절차가 먼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 시민 여러분.”

레말리트는 그들을 진정시켜 돌려보냈고, 많은 사람들은 레말리트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엔 오히려 그의 측근들이 강력한 반발을 했다. 자유형제단 출신의 간부들은 격한 분노를 드러내며 훨씬 강경한 조치를 주장했다.

“대장, 이런 미적지근한 복수를 위해 투쟁해온 겁니까? 참주에게 충성한 자들은 모조리 처벌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일했던 모든 병사, 공무원, 지지자들, 가리지 않고요! 그들은 모두 유죄입니다! 죗값을 물으셔야만 해요!”

그들을 대표하는 자들은 형제단의 행동대장이자 아르투르가 참주군의 항복을 받아준 일에도 불만을 표했던 엔조였다. 그는 일찍이 모든 가족을 참주에게 잃은 적이 있었다. 아르투르는 팔짱을 끼고, 레말리트가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봤다.

엔조는 불만에 가득 차 팔짱을 낀 채 불량스런 태도로 레말리트를 바라보았고,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내 형제 엔조. 이리 와서 앉아보게. 나는 자네의 심정을 백분 이해하네. 나 역시 똑같은 심정을 느끼고. 하지만 우리는 복수를 위해 혁명을 했던 게 아니야. 자네가 말한 것처럼, 참주의 협력자들을 모조리 처벌한다면 수만 명을 벌해야할 걸세. 그 길을 밟으면 결국 우리는 루드비코와 같은 꼴이 되고 말거야. 그게 자네가 바라던 모습인가?”

엔조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대답을 내어놓지는 않았다.

“자네의 청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엔조. 하지만, 더 큰 대의, 두라노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 참아 주었으면 하네. 그리고 내 맹세하겠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루드비코는 대가를 치르게 할 걸세.”

레말리트는 형제단원들 한 명, 한 명과 모두 시선을 마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우리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두라노가 새롭게 태어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계속해서 날 믿어주게.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레말리트와 함께 수 년간 투쟁해온 동지들이었고, 결국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레말리트의 말을 가슴으론 납득할 수 없더라도, 그의 방향성이 옳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한편, 아르투르가 목숨을 구해주었던 대장장이인 에렌 또한 신 공화국의 주요 권력자로 부상했다. 장인들이 존중 받는 두라노에서 몇 남지 않은 마스터 대장장이라는 점은 분명히 그가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정직하고 온화한 사람이란 평판은 더욱 그랬고.

그가 이끄는 세력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표했다. 참주에 정면으로 대항하지는 못했으나, 기회가 오자 전복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수가 많았으며, 빠른 안정을 원하는 파벌이었다.

“이제 두라노는 새로운 질서 아래 재건되어야합니다. 과거의 악몽을 뒤로 하고, 건설적인 미래를 만들어나갑시다.”

형제단원 출신의 세력들은 그들을 뒤에서 흉보았고, 때로는 정면에서 경멸을 드러내곤 했다.

“비겁한 자들 같으니, 우리가 아니었으면 계속 참주의 노예로 살았을 것들이 말이 많군.”

엔조의 공개적인 비난에, 에렌은 차분히 답했다.

“사령관 엔조. 우린 당신들에게 많은 빚을 졌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고, 분명히 당신들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오. 하지만 참주가 패배하던 날, 시민군을 결성해 시가전을 일으킨 것도 우리입니다. 우리 역시 혁명의 일원으로서 도시의 미래에 대해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어요.”

엔조와 에렌이 이끄는 두 파벌은 그 뒤로도 상반된 시각을 내보이며 이따금 충돌했다. 급격한 개혁을 원하는 자들과 안정적인 질서의 유지를 원하는 파벌의 대립이었다. 가장 단적인 대립은, 참주의 정부인 루크레치아의 재판이었다.

신 정부에서 그녀의 위치는 대단히 미묘했고, 엄청난 논쟁거리를 몰고 왔다. 한동안 시민들은 그녀를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대립했다. 재판장에 선 엔조는 그녀를 비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저 부정한 여자는 자신이 가수로서 얻은 인기를 이용해, 루드비코의 쿠데타를 도왔습니다. 그 뒤에도 참주의 첩보원으로 일하며 권력에 유착했었죠. 참주의 품에 안겨 시민들의 고혈을 빤 그녀는, 마땅히 교수대로 보내야합니다! 다른 참주의 측근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녀의 변호인으로 나선 것도 다름 아닌 에렌이었다.

“그녀의 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우리 도시는 급격한 혼란에 빠져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빈민들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고, 루드비코는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유일한 정치가였습니다. 당시로서 그녀가 루드비코의 편을 들었던 것은 정상 참작 해주어야 마땅합니다.”

아르투르는 에렌이 그녀의 변호인으로 나선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다름 아닌, 루크레치아를 가장 강렬하게 비난하던 게 그였으니까.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모양이었다.

“참주의 정부이자 첩보원으로 지낸 것 역시,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루드비코의 통치 아래서 누가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결정적으로, 아르투르 공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주어 혁명의 성공에 엄청난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 점을 보아서도 참주의 다른 측근들과 동일 선상에서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공이 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다고 혁명의 공신이자 우리 도시의 보석이던 배우를 교수대로 보내잔 말입니까? 그건 과한 일입니다!”

두 진영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은 채 평행선을 달렸다. 판결의 권한을 쥔 레말리트 역시 골치 아픈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재판을 관전하는 아르투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공화국의 반역자이자, 해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공신이지요. 또한 참주의 품에 안겨 권력을 누리던 것도 사실이지만, 증언을 들어보니 참주의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들을 억제하는 역할도 했더군요. 제 측근들은 참주 정권의 상징으로서 그녀를 증오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여전히 그녀를 도시의 상징으로서 사랑합니다.”

루크레치아의 인기를 드러내듯, 재판장 바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녀가 무죄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의 루크레치아는 무죄다! 여자의 몸으로 참주에게 맞서던 그녀의 기백을 무시할 셈인가? 그녀는 우리가 보호해줬어야 하지 않은가? 그녀 역시 참주 정권의 피해자다!”

레말리트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헛웃음을 지었고, 아르투르를 향해 물었다.

“아르투르 공께서 재판관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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