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75화 (7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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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탑은 두라노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자, 도시의 중심에 있어 시민들의 마음에 직접 영향을 주는 장소였다. 참주 가문의 상징이던 탑에 앉은 까마귀 깃발이 내려가고, 망치와 탑이 그려진 깃발이 계양되었다.

마침내 공화국이 돌아온 것이다.

격렬한 싸움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던 길가는 공화국의 깃발이 계양되며 혼란이 잦아들었다. 아르투르가 참주와 싸움을 벌이던 시간에, 자유 형제단 역시 도시로 진입해 요충지를 장악하던 중이었다.

참주의 거처가 함락되고,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참주지지 세력은 급속도로 사기가 떨어졌다. 참주군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항복하거나, 도시를 탈출하는 길을 택했다. 몇몇 무리는 도시민을 인질로 잡고 농성을 벌이곤 했지만, 아르투르가 직접 도착해서 그들을 쓸어냈다.

“비겁하기 그지없는 놈들이구나.”

아르투르는 인질극을 벌인 자들을 대할 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해가 저물 시간이 될 쯤, 자유 형제단은 두라노의 모든 구역을 장악했다. 참주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시민들이 몰려나와 길가를 뒤덮으며 해방을 외쳤다.

“만세! 공화국 만세! 자유 도시 만세!”

감격에 찬 시민들은 울먹거리며 외쳤다.

“참주에게 죽음을!”

한편,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참주의 상징물들을 파괴했다. 델 레코레 가문의 저택으로 몰려간 군중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방화했으며, 도시 곳곳에 있는 루드비코의 동상은 모조리 끌어내려져서 파괴당했다.

일부 과격한 분자들은 항복한 포로들을 죽이려 들었기에, 레말리트가 나서 그들을 제지했다.

“돌아가시오! 이들에 대한 재판은 추후에 있을 것이니 그때 여러분의 의견을 제시하시오!”

레말리트는 단호한 모습으로 군중을 진정시켰다. 아르투르는 그가 선동하는 능력만큼이나, 군중을 진정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눈의 탑에 있던 수감자들이 풀려나고, 그들은 거리를 행진하며 자유를 노래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해방을 기념하는 대 축제가 열렸다.

참주의 통치 기간 동안은 축제는커녕,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울리는 것조차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만큼, 시민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해방을 만끽했다. 청춘남녀가 어울리며 춤을 추었고, 참주의 보급 창고에서 나온 술과 고기가 끊이지 않았다.

“자유 형제단 만세! 해방자 아르투르 만세!”

에렌 역시 자유 형제단을 이끌던 사람으로서 축제에 참여했고, 아르투르가 어떻게 참주정을 전복시키고 루드비코를 체포했는지 알리고 다녔다.

“아르투르 공께선 홀로 눈의 탑으로 들어가 참주의 군대를 무찌르고 놈을 체포하셨소! 성검의 선택을 받은 고귀한 기사시오. 그분은 순수한 선의에서 우리를 도운 것이오!”

이야기를 듣던 청년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건 말도 안되지요. 어떻게 사람이 요새를 뚫습니까? 마스터 에렌. 과장이 조금 심한 거 아닙니까?”

“아닐세. 사실이라니까.”

사람들이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노예시장에서의 싸움을 본 자들이 에렌의 말을 증언해주었다.

“사실이라니까. 내가 직접 창문에서 봤어. 혼자서 경비병 수십 명을 쓸어버리고, 유유히 빠져나가시던걸.”

“나도 봤어! 게다가, 인질극 때도 정확하게 활을 쏴서 인질범들만 잡아내셨잖아. 그분은 분명 대단한 분이라니까.”

그의 무용을 증언하는 사람이 여럿이 나오자, 결국 믿지 못하던 자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우리 도시는 어떻게 될 까?”

“당연히 모든 게 잘 되겠지! 참주의 폭정이 끝나고, 공화국이 돌아왔잖나.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면 되는 거겠지!”

한편, 아르투르는 성벽 위에 앉아 상념에 빠져있었다. 오늘 어찌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몸에서 아직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오래도록 검을 잡은 자신의 손은 아주 거칠었고, 상처투성이였다. 순간, 자신의 손아귀를 따라 피가 가득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떠보니, 흐르는 피는 없었다.

아르투르는 오늘 마지막으로 벌였던 전투를 떠올렸다.

-항복해라! 너희의 지도자는 붙잡혔고, 퇴로는 없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건데, 병사들이 처벌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날아든 건 화살뿐이었고, 아르투르는 별 수 없이 탑 속으로 진입했다. 적병들은 참주에 대한 충성을 외치며 덤벼들었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 남은 체구가 작은 적병은 공포에 떨고 있었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보였다.

아르투르는 혀를 차며 등을 돌렸고, 병사는 용기를 냈다.

“이야아아아!”

병사가 달려들 때, 아르투르는 몸을 돌려 빛나는 칼날을 휘둘렀다. 성검의 빛이 그의 목 근처에 잔상을 남겼고, 병사의 목이 몸뚱아리에서 굴러 떨어졌다. 머리가 잘려나갈 때, 그의 투구도 같이 떨어져나갔다.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채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리석은 놈. 날 죽이면 전세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르투르는 그 불쌍한 소년이 자신을 죽여 복수를 하고 두라노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상상을 하며 용기를 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들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며 돌진하는 것을, 용기라고 생각하니까.

어쩌면 자신도 여전히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아르투르는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제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위안했다.

“아르투르 공!”

등 뒤에서, 젊은 남자의 미성이 들려왔다. 레잘리트의 동료이자 방랑기사인 시라노였다. 그 역시 격렬한 전투를 치른 지, 씻고 왔음에도 피냄새를 가득 풍겼다.

“왜 이곳에 홀로 계십니까? 사람들은 오늘의 영웅인 공을 부르고 있습니다! 공께선 저희가 몇 년 동안 쩔쩔매던 문제를 단 하루 만에 해결하셨고, 노래로 오래도록 기억될 무용을 펼치셨습니다. 오셔서 함께 합시다!”

시라노의 경탄 섞인 눈빛에, 아르투르는 그저 웃어보였다.

“나는 자네들의 계획을 조금 거들어주었을 뿐이지. 이 모든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한 건 자네들이지. 앞으로 두라노를 이끌어갈 것도.”

“겸손하시군요. 하지만, 두라노는 공을 해방자로, 저희는 당신을 도운 조력자 정도로만 기억될 겁니다. 그게 사실이고요.”

시라노는 재차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가시죠. 오늘의 주인공이 축제 자리에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아르투르는 마지못한 척 시라노의 손을 붙잡았고, 축제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억눌려있던 자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아르투르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아르투르는 도시를 돌며 자신을 향한 박수와 칭송을 즐겼고, 그들이 건네주는 술잔을 조금도 남김없이 비웠다.

축제의 소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르투르에게 남아줄 것을 부탁했다.

“앞으로도 저희와 계속 같이 계실거지요?”

“생각해보겠네. 오늘은 지금을 즐기도록 하지! 자유도시 두라노를 위하여! 건배!”

첫 날의 축제가 끝나고 아르투르가 곯아떨어져 있을 때, 레잘리트가 에렌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시라노는 아르투르의 옆에서 곤히 잠자고 있었다.

“끄응, 무슨 일인가?”

아르투르는 잠결 속에서 억지로 일어나 방문객들을 맞이했고, 레잘리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 두라노가 공께 지고 있는 빚은 실로 큰 것입니다.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두라노의 자유를 제외한 어떤 것이든 드리겠습니다.”

“딱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고, 나도 이번 일로 이득을 보긴 했네. 펠릭스 형님의 동맹자를 물리친 것이니까, 그분에게 한방 먹인 것이지.”

“적어도, 저희가 감사의 표시를 할 수는 있게 해주십시오.”

아르투르는 웃어보였다.

“알겠네. 그렇다면 자네들이 주고 싶은 걸 주게. 하지만, 난 두라노를 떠날 사람이니 가급적이면 그 점은 고려해줬으면 좋겠군.”

레잘리트와 에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또, 부탁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만 저희 도시에 머물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공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민들이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

아르투르가 생각하기에도 두라노 공화국이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아직 여러 가지 골칫거리가 남아있었다. 여전히 군대의 상당수는 참주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고 있었고, 체포된 참주정 당시의 인사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두라노가 다시 압제자의 통치 하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좋네. 내가 힘이 닿는 곳까지는 돕도록 하겠네.”

일동은 재차 고개를 숙여 경의를 내보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라노의 해방자시여.”

***

첫 날의 축제가 끝나자, 두라노 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레잘리트가 집정관으로서 새 로운 수장이 되었다. 자유 형제단의 간부들과 협력자들, 그리고 도시의 다른 명사들이 시의회의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새롭게 정부를 구성한 레잘리트는 도시를 빠르게 정상화시켰다. 음유시인으로 일하며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권력자들의 곁에서 일했던 관록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루드비코 일당은 일단 참주의 탑에 가두어둔다.”

새 정부의 첫 과업은 참주의 군대를 해산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었다. 아르투르가 시민군을 이끌고 두라노 영토에 있는 군사 거점들을 방문했다. 대부분은 저항 없이 끝이 났다. 장교들은 해외로 도주하거나, 새로운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소. 우리 연대는 오직 국부, 루드비코 델 레코레님께만 충성을 바치오.”

여전히 참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해외로 안전하게 망명할 권리를 보장하겠네. 요새를 비우고 떠나주게.”

그의 제안에는 참주의 충성파들도 거절하지 못했다. 이미 참주는 붙잡히고 전세는 기울었으니 싸움은 무익했다. 그들은 두라노를 떠나갔다.

“아르투르 공! 지금 저들은 참주의 탄압에 동조하던 자들이고, 공화국의 배신자들입니다! 처벌해야만 합니다!”

시민군을 이끄는 부관, 엔조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더군다나, 저들은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계급이 높지 않다. 단지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생각은 없다.”

엔조는 오히려 더 길길이 날뛰는 것이 아닌가.

“제기랄! 충성이요? 충성이라고 하셨습니까? 귀족인 당신이라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시민의 의무는 개인이 아닌, 공화국에 충성을 바치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을 져버렸구요! 이 결정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말조심하게. 자네가 불만이 있더라도, 귀족인 내게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할 순 없네.”

“제길! 당신은 외부인이지 않습니까? 무슨 자격으로 우리에게 명령하는 겁니까?”

“그만 닥쳐라!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게다가, 나는 네 주군인 레말리트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 불만이 있으면 네 주인에게 가서 따져!”

엔조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고, 아르투르도 노려봤다. 결국 아르투르의 기세에 눌린 엔조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르투르는 다른 시민병들의 시선도 썩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아르투르는 참아오던 기분이 불쾌해졌고, 역정을 담아 바라봤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대가도 없이 싸워주었건만, 그런 불경한 태도를 취한단 말이냐? 두라노에는 윗사람을 존중하는 예의도 없는가?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너희들을 끌어내서 매질하지 않는 건, 순전히 레말리트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아르투르의 차가운 말에 병사들은 고개를 내리 깔았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아르투르는 콧방귀를 끼었을 뿐이다. 그 뒤로도, 참주의 병사들에게 베푸는 자비에 대해 여러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저놈들이 우리 가족을 죽였단 말입니다!”

“명령을 내린 건 루드비코와 그 수하들이지. 그들은 책임을 질 것이다. 하지만 말단 병사들까지 모두 죽일 생각인가? 그런 식의 무차별한 복수가 하고 싶다면, 너희 손으로 해라. 이곳 두라노의 일이니 말리지 않으마. 나도 너희의 불충한 태도가 슬슬 짜증이 나는구나.”

전우와 가족을 잃고 흥분한 병사들이 복수를 요구하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아르투르도 그걸 알고, 설득하려던 생각이었다. 투항하지 않는 참주의 병사들과 싸우면 너희도 죽을 테니 싸움을 피하는 것이 맞으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아 두라노의 재건에 집중하자는 말을 하려고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한창 열이 올라 그들을 윽박지르고 묵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들의 태도가 너무 불경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데 끼어들지를 않나, 자길 노려보질 않나,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일개 말단 병사들이 자기네 생각은 다르다며 아득바득 따졌다.

“이런 건방진! 얼마나 나를 우습게 알면 이 따위로 행동하는 것이냐?! 두라노 인들은 윗사람을 대할 줄 모르나? 공손한 자세로 겸허히 청하도록!”

“자유 도시에선, 누구든지 누구에게나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은 하나가 되어, 따지듯이 외쳤다.

“그만! 더 이상 네놈들의 헛소리는 듣지 않겠다! 내가 네놈들을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몇 번을 치러줬건만, 감히 날 이런 식으로 대우해? 나는 내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너희에게 굳이 설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전권을 맡긴 너희 주군에게 따져라. 이 시간 이후로, 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매질로 다스리겠다.”

병사들은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복종했다. 군대가 고분고분해지자, 참주의 잔당들을 두라노 영토에서 몰아내는 것은 금방 끝이 났다. 참주의 병사들을 무사히 보내주는 것에 대해선 계속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아르투르는 그때마다 매질로 답했고, 두라노 병사들의 자유로운 기질은 결국 폭력 앞에 무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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