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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73화 (7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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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통로 속, 한 손에 촛불을 담은 쟁반 그릇을 든 루크레치아가 앞장서서 길을 밝히고, 아르투르가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에 길을 나섰을 때, 두 사람은 침묵을 유지하며 걸었다. 발걸음소리가 지하 통로 속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저에 대해서 묻지 않으시는군요.”

아르투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을 읽어냈다.

“그대는 루드비코가 죽길 원하고, 나도 그렇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쓴 웃음을 짓는 루크레치아.

“그런가요. 왜 루드비코를 도왔는지, 왜 참주의 정부가 되었는지,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시더랍니까?”

아르투르는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보였을 뿐이다.

“별로. 이곳 사람들은 이곳 사람들의 사정이 있겠지. 궁금하다고 한들 지금 물을만한 상황도 아니지 않은가.”

쿡쿡 웃어 보이는 루크레치아.

“하도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하군요. 많은 젊은 사내들은 초면부터 제 호감을 사려하며 관심을 드러내거든요. 저도, 젊은 왕자님이라고 전해 듣고는, 당연히 그러실 줄 알았지요.”

아르투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루크레치아는 분명히 만인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고, 레무리아 전체에서 유명한 예능인이라면 그녀가 어떤 대접을 받아왔을 지는 쉽게 상상이 갔다. 아르투르는 긴장도 풀 겸, 피식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원한다면 묻도록 하지. 왜, 참주 곁에서 모든 것을 누려온 자네가 이제 그의 품을 벗어나려는 건가?”

루크레치아는 회상에 잠긴 듯, 회한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루드비코가 저렇게 잔인하고,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었답니다. 참주가 되기 전의 그는 빈자들의 친구이자 희망이었어요. 절망만이 지배하는 빈민가에 관심을 지니고, 도시의 모두가 경원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유일한 사람. 우리들의 영웅이었죠.”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인기 좋은 유명 배우라면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을 텐데.”

“남자들이 품기를 원하는 몸뚱이와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난 덕에, 사는 건 편해졌죠. 하지만 제 친구들은 빈민가의 어둠 속에서 말라죽어갔답니다. 구세주 발타리아의 빛조차 들지 않는, 우리 빈민들에게 루드비코가 내미는 손길은 마지막 구원의 기회였죠.”

말을 마친 루크레치아는 아르투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그저, 경청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비난하지 않으실 건가요?”

“자네가 절박했다는 심정이 전해지니까. 나는 언젠가 사람들을 이끌 거고, 그들이 모두 나와 뜻이 같지는 않지는 않겠지. 오히려, 나의 정의에 동감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거야. 그러니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 계속 하게.”

아르투르가 움직일 때마다, 신고 있는 판금 장화가 철컹이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루크레치아.

“좋은 지도자가 되실 것 같군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금세 어둡게 바뀌었다.

“루드비코 역시, 사람들의 말을 들었어야했어요. 혁명을 해낸 그는 오랫동안 두라노에 이어져온 병폐를, 단숨에 해결하고 싶어 했죠.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어요. 루드비코는 개혁을 성공시켜야한다는 절박함 속에 파묻혀있었고, 그래서 무조건 강한 모습을 내보여야한다고 생각했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크레치아는 침묵을 지켰다. 정치 한복판에서 살아온 아르투르에게, 그녀가 생략한 뒷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능했다. 루드비코는 저항이 생겨날 때마다 강경책만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게 반발이 더욱 심해졌고, 어느 시점부터는 되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날의 폭군이 되었군.’

어느샌가 지하 통로의 출구가 보였다. 달빛이 통로 아래로 접어들고 있었고, 루크레치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곳이에요. 나가면 바로 참주의 탑이 앞에 있을 것이고, 그러면 기사님의 손에 두라노와 제 운명이 달리게 될 거에요.”

루크레치아의 시선은 출구 너머를 향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실로 깊은 슬픔이 담겨있었다.

“탑의 근위병들은 루드비코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고, 그들의 주인인 루드비코는 모든 것을 걸고 사납게 싸우려 들 거예요. 그러니, 그들과의 싸움에 있어 자비를 보이시면 아니됩니다.”

루크레치아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차 떨리더니, 눈가는 점점 촉촉해져갔다.

“…탑의 근위병들 사이엔 제 평생의 친구들이 많아요. 우리는 서로의 어린 시절과 삶의 행적을 알죠.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었으니까요.”

그녀는 말을 할수록 감정이 북받쳐오는 지, 눈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저는 여전히 루드비코를 사랑해요. 그의 채취와 함께 했던 기억들, 밝은 미래를 꿈꾸던 기억들을 잊지 못하겠어요. 여전히, 여전히, 달려 나가서 기사님이 쳐들어간다고 외치고 싶어요.”

루크레치아는 바닥에 엎드려서 숨을 죽인 채 울기 시작했고, 아르투르는 잠시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날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겠지. 그게 무언가?”

“…그의 통치가 끝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루드비코는 길을 잃었고, 자신을 지키는데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죠. 그는 이제 자신이 구하고 싶어 했던 것들조차 파멸로 몰고 가고 있죠. 그러니, 이게 유일한 길이에요.”

아르투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네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진 않겠네. 나는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자네의 힘든 결정을 수포로 돌리는 일이 될 테니까. 다 괜찮아 질 것이라고 위로하지도 않겠네. 오늘 자네가 했던 힘든 선택은 평생 자네를 괴롭힐 지도 모르지.”

아르투르는 몸을 낮추어, 루크레치아의 시선을 마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에겐 이 시련을 견뎌낼 힘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네. 나는 자네의 말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보았네. 솔직하게 털어놓겠네. 처음에 나는 자네를 굉장히 업신여겼다네. 남들에게 웃음을 팔아 마음을 사고, 권력자의 노리개로 살며 던져주는 콩고물을 얻어먹을 뿐인 하찮은 인간으로 보았지.”

아르투르는 눈을 감았다 뜨면서, 그녀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봤다. 루크레치아 역시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평민 출신의 여자 가수도 명예를 지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네. 가수들이 그저 남들에게 웃음과 몸을 팔 뿐인 천한 자들이라면, 스스로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바른 길을 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리에서 일어선 아르투르는 출구를 향해 나아가며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자네의 행동은, 기사의 것과는 다를지 몰라도, 분명히 명예로운 행동이었네. 명예를 가진 자들은 존중받아 마땅하지. 스스로 세운 뜻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란 뜻이니까. 살아남게 된다면, 또 보지.”

아르투르는 달빛이 비추는 지상으로 나아가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때, 황금의 검은 주인의 깨달음에 반응하듯이, 스스로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검에 깃든 생명의 기운이 아르투르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꼈고, 마침내 검신 전체가 강렬한 빛을 내더니, 번득이는 열로 둘러싸였다. 무엇이든 단칼에 잘라버리던, 성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

성검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아르투르.

“너도 이 폭정이 끝나야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

탑에 접근한 아르투르는 어둠 속에서, 참주의 탑의 방어구조물을 살폈다. 탑은 성채와 해자, 2중으로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 시가전을 대비한 설계가 분명했다.

비상경계가 걸려있던 터라, 성벽의 모든 장소마다 경비병들이 횃불을 들고 순찰을 돌고 있어 잠입은 불가능해보였다. 성문이 닫혀있고, 도개교가 내려가 있으니 정면 돌파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접선 장소에서 만난 첩자도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레잘리트가 보내준다는 암살자가 당신이었군요. 하지만 이젠 소용없습니다. 지금은 개미 새끼 한 마리 탑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노예 시장에서 소란을 벌여, 경계가 대폭 강화된 탓이죠. 암살 작전은 물 건너갔습니다.”

“잠입이 불가능하다면 정면 돌파는 어떤가?

첩자는 경악해서, 눈앞에 아르투르도 개의치 않고 말해버렸다.

“미쳤군, 미쳤어. 실력 있는 암살자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앞뒤 없이 날뛰는 기사를 보내면 어쩌자는 건지! 씨발, 우린 다 좆됬다고.”

첩자 역할을 하는 청년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아르투르는 태연히 말했다.

“성 안에 우리 편이 있지 않나. 일단 안에 진입만 시켜주면 그 뒤엔 알아서 할 수 있네만.”

“미쳤습니까?! 그럼 당신만 죽는 게 아니라, 탑 내에 있는 모든 내통자가 색출된 후, 가족과 함께 처형될 겁니다. 씨발, 씨발… 애초에 자유 형제단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어. 그냥 루드비코를 끝까지 따랐어야되는데….”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려 성을 바라봤다. 분명 참주의 탑과 성은, 강력한 요새였다. 하지만 검의 힘이 돌아왔으니, 거리 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상대를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이봐, 친구. 너무 상심하지 말게. 난 이전에도 백 명을 상대로 혼자 싸워서 이긴 적도 있고, 기사 스무 명도 상대해봤거든. 참주의 근위병들은 내 상대가 못 된다네.”

“미친 소리 집어치우시오! 당장 여길 떠나서, 레잘리트에게 전하시오. 그가 보낸 앞뒤 분간 못하는 귀족 놈 때문에 작전이 다 헝클어졌다고. 내 부하와 가족들을 개죽음시킬 생각은 없으니, 이제 자유 형제단도 그만두겠다고 말이오.”

아르투르는 어떻게 하면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지 않는 모양이니, 약간의 속임수를 쓰기로 했다.

“이보게. 자네는 이미 날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네. 자네가 말한 대로 난 기사지 암살자가 아니야. 그러니 머지않아 붙잡힐 걸세.”

아르투르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날 생포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죽인다면 모를까.

“그렇게 붙잡히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그들은 날 고문해서 모든 정보를 캐내려 할 테지. 처음에는 버티겠지만, 머잖아 모든 정보를 줄줄이 불 수 밖에 없을 거야. 루드비코의 고문실은 악명이 높잖나. 그러다보면 자네들에 대한 정보가 나올 수밖에 없겠지.”

고문을 통한 자백 같은 소리하네. 고통이 무서워서 동료를 팔아넘기는 자를 기사라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빙긋 웃으며 첩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알겠나? 자네는 나한테 협조해야만 해. 앉아서 죽나, 뭐라도 해보고 죽나의 차이니까.”

“…이런 씨발! 개 같은 새끼들!”

아르투르에게 협력해야만 하는 현실을 납득하지 못한 첩자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인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르투르는 실실 웃어 보이며 그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었다.

뭐, 아르투르는 기사로서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했다.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협박하다니, 자신을 가르친 마스터가 알면 분노해서 두들겨 패려 할 일이었다.

‘뭐, 하지만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고. 지금은 워낙 긴급한 상황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결국 첩자는 어쩔 수 없이 아르투르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해, 아르투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도개교 건너로 가서 대기하고 있으십시오. 제가 명령을 사칭해서 도개교를 내리고 성문을 열겠습니다. 늦지 말고 진입하십시오. 당신이 실패하면 당신만 죽는 게 아니라, 나, 내 부하, 내 가족들, 내 부하의 가족들이 모두 죽는다는 점도 명심하시고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아르투르는 씩 웃어보였다.

“백인을 벤 아르투르, 단 한 번도 싸움에서 져본 일이 없다.”

첩자는 접선 장소를 벗어나 편지를 묶은 활을 성벽 너머로 쏘았다. 그것을 받아든 경비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서신을 읽은 후, 재빨리 동료들을 모아 성문으로 향했다.

얼마 뒤, 아르투르는 성문 너머에서 요란스런 고함을 들었다. 고함은 곧 칼부림 소리로, 비명으로 변했다. 성문이 열리고, 도개교를 지탱한 쇠사슬이 풀려났다.

이제 자신의 시간이었다.

아르투르는 황금의 검을 뽑아들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성채를 향해 홀로 돌격했다. 성검이 찬란한 광채로, 두라노의 밤을 밝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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