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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대장의 행동은 누구라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도발이었다. 아르투르의 눈에 한순간 불길이 일었고, 눈에 힘을 주며 경비대장을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상대는 여전히 실실 웃은 채, 아르투르를 쿡쿡 찌를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어. 용병으로 깨 나 돈 좀 번 모양인데, 도시에서 함부로 깝치다간 뒈지는 거야. 알겠으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오히려 경비대장은 성을 내며 아르투르를 바라봤고, 다른 경비병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통행객에게 시비를 걸어 그들을 체포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저런 강력한 전사가 흥분해서 공격이라도 했다간, 자신들의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응? 왜 대답이 없지? 죽고 싶냐?”
아르투르는 표정을 잔뜩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았고, 경비대장은 아르투르의 주변을 돌면서 도발을 계속 했다. 에렌의 표정도 점차 굳어갔다.
‘놈이 원하는 건 꼬투리를 잡아 에렌을 처벌하는 일이겠지. 여기서 도발에 대응해줄 필요 없다.’
하지만 이내 아르투르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경비대장의 도발이 계속 되자, 주변 사람들도 그를 만만하게 보고 비웃기 시작한 것이다.
“어이, 덩치만 커다래선 아무 말도 못하는구만. 어디 한 대 쳐보시지 그래.”
“북구인들이 난폭하다는 것도 다 거짓말인가봐. 법 앞에선 꼼짝도 못하네.”
시시덕거리는 놈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손을 내밀어서 놈의 목을 비트는 건 아주 쉬웠다. 경비병들이 반격해오겠지만, 놈들도 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폭력에 호소하고 싶은 충동이 거세졌다.
‘내가 왜 이런 굴욕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모욕을 감내하는 것이 기사로서 합당한가?’
이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저항군에 합류하리라. 그래. 그렇게 해야지.
아르투르가 검으로 손을 옮겨가기 직전, 에렌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백짓장처럼 새하얘진 얼굴이었다. 절망과 고뇌가 그의 표정에서 느껴졌다. 에렌은 아르투르가 굴욕을 참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께선 단숨에 검을 뽑아 자신을 비웃은 자들을 징벌하시겠지. 기사의 명예는 그만큼 무거운 것이니까. 경비병들이 몰려들지만, 아르투르 공께선 수십 명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베어 넘기실 테지. 그 뒤엔 말을 타고 유유히 빠져 나가 실거고. 내 가족들은 연좌제로 몰려 공개 처형을 당하겠지.’
에렌의 표정을 읽어낸 아르투르는 손을 멈추었다. 이젠 경비병들까지 가세해서 그를 조롱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결국, 그들은 흥미를 잃고 말았다. 경비대장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사고라도 한번 쳐주길 바랐는데. 그럼 합법적으로 네 고용주를 가둘 수 있었는데 말이다. 좋아. 지나가봐. 도시에서 사고치지 말고. 방금 있던 일만 똑똑히 기억하면 무사할거야.”
경비대장은 재차 아르투르의 가슴을 콕콕 찔렀고, 아르투르는 눈에 불길을 담아 그를 노려봤다.
‘네놈의 얼굴은 잊지 않으마.’
아르투르 일행은 경비병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에렌은 성문을 지나치자마자,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르투르 공. 꼼짝 없이 제 가족들은 죽은 목숨인 줄 알았습니다. 저 때문에 명예까지 포기해주시다니, 이걸 어찌 보상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명예를 포기한 적이 없네. 오히려 반대지.”
붉게 달아올랐던 아르투르의 표정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약자들을 지키기로 했던 맹세, 그것에 충실했을 뿐일세. 또, 한 가지 배운 게 있군. 무력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점 말일세. 그렇지만, 이 훌륭한 가르침을 준 경비대장에게 어떤 포상을 해야 할 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아르투르는 살벌한 표정으로 성문 쪽을 되돌아봤다가, 에렌의 인도에 따라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로에 이르자, 각양각색의 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엮은 보따리 위에 물건을 늘어놓은 노점상이나 근사한 상점이 모두 있었다.
길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 흥정하는 자들, 짐 나르는 일꾼들, 신선한 식료품을 찾아 헤매는 여인들이 보였다. 그냥 소일거리 삼아 걸어다니는 노인들도 있기 마련이고. 겉보기엔 별 다를 것 없는 보통의 대도시였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시장의 특징인 자유롭고, 흥겨운 생동감이 없었다. 시장은 도시민들의 삶터이고, 그만큼 치열한 공간이어야 하건만. 어째서 이렇게 부자연스러운가?
‘모여서 장난치는 어린애들은? 술을 먹고 자빠진 주정뱅이들은? 서로 소식을 주고 받는 아낙네들은? 무엇보다, 왜 사람들이 가득 모여든 곳이 단 한 곳도 없지?’
시장에 있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있어봐야 두세 사람일뿐이었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에렌의 속삭임이 들렸다.
‘지금의 두라노에서는 침묵이 금입니다. 참주의 눈과 귀가 도시의 모든 곳을 지배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말을 했다가는, 본보기로 처벌되지요.’
아르투르는 에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광장의 정 중앙에는 잡동사니를 엮어만든 흉물스런 탑이 있었는데, 박제된 인간의 손과 혀, 눈과 귀가 못 박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나무 명패가 있었다.
국가의 아버지를 모함하고 도시의 질서를 뒤흔드는 격문을 쓴 죄.
요사스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한 죄.
이 모든 것을 듣고, 보고도 관청에 신고하지 않은 죄.
‘기가 막히는군.’
일찍이, 아버지가 백성들을 대하는데 있어 불문율로 삼던 원칙이 있었다. 선술집 안에서 벌어지는 불충한 언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말 것. 저잣거리의 풍문은 가볍게 웃고 넘길 것.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일지라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통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언제고 나오기 마련이고 어느 정도 눈감아주는 일은 꼭 필요했다.
‘사람의 모든 언행에 처벌을 한다면, 몸이 성한 자가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거라 하셨지. 하지만 두라노의 참주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군.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거야.’
아르투르는 시내를 예리하게 살피며 두라노의 분위기를 살폈다. 사람들은 항상 위축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고압적인 태도로 시민들을 감시했다.
“이곳은 도시가 아니군.”
아르투르는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대한 감옥, 감옥 그 자체야.”
***
모든 도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있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그곳은 불결하고 위험했다. 두라노도 다를 바 없었다. 쥐들이 몰려다니며 길거리에 방치된 오물을 먹었고, 역한 냄새가 가득 올라왔다. 사람들은 가난에 찌들어, 영혼 없는 눈으로 그저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 가운데 있는 다 허물어져가는 판자집, 그곳이 에렌의 집이었다.
“이런 누추한 곳으로 귀한 분을 모시게 되었군요.”
에레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아르투르는 코를 막았다.
“왜 자네가 이곳에 사는 건가?”
아르투르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부 대륙 어느 곳을 가나, 대장장이는 평민이 가질 수 있는 직업에선 가장 우대 받는 축이었다. 선한 영주도 악한 영주도 무기가 필요했고,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희소했으니.
한숨을 쉬는 에렌.
“원래의 제 집은 번화가에 있는 저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루드비코의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그 집은 루드비코의 측근이 차지했죠. 그 대신 저는 그의 측근이 살던 이곳으로 내어받았고요.”
밖에서만 얼핏 보아도 대충 만든 집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장신인 아르투르는 고개를 수그려야만 했고, 딸랑 거실 하나만 있는 가정집이었다. 그야말로 빈민들이나 살법한 집이 아닌가.
“애 엄마와 아이들이 일을 나갔나보군요.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에렌은 마당에 묶어둔 짐말에서 가져온 각종 짐들을 가져와 집에 내려놓았고, 아르투르도 그것을 도왔다. 짐을 모두 풀어놓은 후, 두 사람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침묵 속에서 쉬던 차,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르투르였다.
“자네는 이 체제가 전복되길 바라지 않는가?”
에렌은 대답을 미루다가, 듣는 이가 없는 지 확인하고는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내분을 통해 뒤집히는 것도 걱정이 됩니다. 루드비코의 쿠데타가 있던 날,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모두 제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죠. 시내가 피로 가득 흘렀죠.”
“하지만 남자라면 핍박에 맞서 들고 일어나야할 때가 있는 법 아닌가.”
에렌은 희미하게 웃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도 제 목숨만 생각한다면 진즉에 뭔가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도시의 미래를 걱정하고, 가족들도 걱정이 됩니다. 아직 제 자식들은 어려서 혼란스런 시기를 견뎌낼 힘이 없습니다.”
“가족에 대해선 이해하겠네. 하지만 도시의 미래를 걱정한다고? 그렇다면 오히려 루드비코를 끌어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레말리트의 말과 달리, 민주정 시절의 두라노도 좋은 일만 있진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루드비코가 쿠데타를 일으킬 하수인들을 모으지 못했겠지요.”
“그 점에 대해서 알고 싶군. 좀 더 이야기해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직 이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요.”
이야기의 운을 막 띄우려할 때, 에렌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저편 골목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른팔에 참주인 루드비코의 상징, 세 눈의 까마귀가 새겨진 완장을 달고 있었고, 각각 각목이나 너클 같은 흉기를 들고 있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에렌은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쿠데타에 참가해 완장을 달게 된 동네 건달들이지요. 이곳저곳 쑤시면서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게 취미인 놈들입니다. 빚 독촉을 하러 왔나보군요.”
완장을 찬 건달들은 불량스런 자세로 에렌을 찾아왔고, 주변을 둘러쌌다.
“형씨,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아르투르는 에렌에게 어깨동무를 하려는 건달을 제지하려 했지만, 에렌이 손을 내저어 괜찮다는 표시를 해왔다. 건달들도 아르투르는 꺼림칙한 지, 그저 경계하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 중 힘 좀 쓰게 생긴 덩치가 아르투르에게 말했다.
“형씨, 당신이 이 친구 경호원인가본데, 우린 참주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중이니 건드리지 마. 당신도 그냥 돈 받고 일 하는 거지, 굳이 여기서 법까지 어길 생각은 없잖아?”
아르투르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았지만, 건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에렌을 툭툭 쳤다.
“돈, 당신이 참주님한테 빌려간 돈 어디 있냐고.”
에렌은 침착하게 답하며, 짤랑대는 동전 주머니를 들어보였다.
“모두 가져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깡패는 주머니를 들어 안의 내용물을 보곤, 하나씩 동전을 새었다.
“열심히 모아왔네. 하지만 모자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참주님께서 요구하신 이자까지 전부 그 돈이면 해결이 될 겁니다.”
“아, 몇 달간 도시에 떠나 있어서 모르는구나. 그 사이 이자가 세 배로 뛰었어. 하지만 이 돈이라면, 당신 가족을 파는 건 뒤로 미뤄줄게. 야, 얼른 노예 시장으로 사람 보내서 이 녀석 가족들 데려와.”
건달의 말에 에렌의 눈이 번득 뜨였고, 건달의 멱살을 두 손으로 쥐었다.
“노예시장이라고? 무슨 짓을 한 거냐?”
건달은 비웃음을 내보였다.
“우린 당신이 죽은 줄 알았거든. 그래서 당신 가족들을 내다팔려고 했지. 돈이 없으면 몸으로 갚아야지. 걱정 마. 제때 구해왔잖아. 지금처럼, 딴 생각하지 말고 빚이나 잘 갚아. 당신 동료들처럼 차일피일 미루다가 가족과 함께 노예선에 팔려가지 말고.”
“이, 이 쓰레기 놈들이!”
흥분한 에렌이 건달의 멱살을 붙잡으려할 때, 다른 건달이 그의 등 뒤에 각목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일격은 아르투르의 억센 손아귀에 가로막혔다.
“루드비코의 통치는 충분히 볼 만큼 본 것 같군.”
아르투르의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