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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69화 (6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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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눈동자를 통해 상대의 영혼을 엿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아르투르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에, 고도로 훈련된 모략가나, 타고난 거짓말쟁이가 아니고서야, 상대방의 시선을 마주 보며 거짓을 고하진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슬그머니 눈을 피하지 않던가, 사랑을 속삭일 때 서로를 마주 보는 것도 상대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레말리트는 일단은 합격점이었다. 레말리트는 그의 시선에도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볼 뿐, 전혀 주눅든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과 여유가 눈빛에 흘러넘쳤다.

“루드비코보다 나을 수 있는 통치를 하냐고 물으셨지요. 제 생각에 그건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넘어서 두라노에 번영과 자유를 가져다 줄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저는 경처럼 본디 명성이 있던 자가 아니니 평판에 기댈 수도 없고,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것도 아니니 선조의 은덕에 기댈 수도 없습니다. 그나마, 제가 책임지고 있는 이곳 아이들의 미소정도는 내보일 수 있겠군요.”

아르투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정도면 시작은 좋은 것 같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확신할 수는 없지. 누구나 위치에 따라 세상을 달리 보기 마련이오, 그대가 두라노의 지도자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르투르 공이나, 공의 위대한 조상들도 마찬가지었을 것입니다.”

“그 역시 타당한 말이오.”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 무렵, 아르투르를 설득할 논리를 골똘히 생각하던 시라노는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잠시만요.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시지요. 실은, 공께서 좀 더 관심을 지니실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궁금하군. 말해보게.”

“제가 한 달 전쯤 루드비코의 사자를 공격해 기밀 서신을 탈취했었습니다. 그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루드비코 참주는 조만간 펠릭스 왕과 사돈 관계가 될 것입니다.”

펠릭스라는 말에 아르투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 그 서신을 확인하고 싶군.”

“예. 곧장 가져오겠습니다.”

얼마 뒤 시라노는 자신이 입수했다는 서신을 가져왔다. 펠릭스 왕이 루드비코 참주에게 보내는 그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 동맹이 되고 싶다는 네 제안을 승낙하마. 그 증표로 내 딸을 네 아들에게 내어주마.’

서신의 마지막에는 은빛 건틀렛의 문양이 찍혀있었다. 틀림없는 펠릭스 왕의 인장이었다. 이 서신이 진본임을 확신한 아르투르는, 생각이 깊어졌다.

‘이걸 어떻게 한담?’

페르넬 대왕의 막내 왕자인, 서부 데네토르 왕국의 왕. 펠릭스 오‘데르만. 혹은 기민한 계략으로 이름을 떨치는 책략가(Trickster) 펠릭스.

자신에겐 그냥, 언젠가 한 대 패주어야할 이복형이었다.

‘형님은 원래부터 아버지보다는 왕비를 잘 따랐지. 그 때문인지, 아니면 배포가 작고 음험해서 그런 진 몰라도, 나랑 더럽게 안 맞았고.’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펠릭스 형님에 대한 별로 좋은 추억은 없었다. 반면 유감을 가질만한 일? 너무 많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일이야, 사생아인 자신을 형제 대접해줘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장례식 이후에 벌어졌던 일들은 명백히 선을 훌쩍 넘은 일이었다.

‘단, 검 한 자루만 상속 받은 채 왕국을 떠나겠다는 나를 기사들을 시켜서 습격했었고, 그 뒤에는 내 목에 백작 위를 거셨지.’

여태까지 기회가 없어서 참아왔을 뿐, 언젠가는 한번 갚아줘야 할 빚임이 틀림없으리라. 이 서신을 보기 전까지는 루드비코를 부도덕한 통치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를 반드시 타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병사들이 자신을 공격해왔긴 하나, 엄연히 말해 그들은 주인의 법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루드비코가 펠릭스 형님의 동맹자라면, 이건 나도 당사자가 되는 문제야. 형님의 지원을 등에 업은 루드비코가 레무리아에서 세력을 넓힌다면, 그만큼 내가 운신할 폭은 줄어든다.’

아르투르는, 결정을 내렸다.

“당신들을 돕겠소. 단, 내가 직접 두라노로 가서 상황을 살펴본 후에도 그가 악당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말이오.”

레말리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다면 저희 계획에 참가하신 것이나 다름없군요.”

“너무 확신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텐데.”

“아뇨.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싸운 아르투르 경이라면, 지금 두라노의 광경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루드비코는 시민들이 다스리는 자유 도시를 무너뜨리고 폭군이 된 자이고, 그 흔적은 아직 두라노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가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시라노 역시 고개를 끄덕여, 레말리트에게 강한 공감을 표했다. 아르투르 역시 이미 마음이 움직인 뒤였지만, 직접 그가 도시를 다스려서는 안되는 폭군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의기와 분노에 몸을 담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행하면 되돌이킬 수 없는 일에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했다.

***

두라노에 도착한 아르투르는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자 데네토르의 수도인 아헨에 비견할 만 하다고 느꼈다. 한 도시를 평가하는 방법엔 여럿이 있지만, 기사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아온 아르투르에겐 군사적인 방면이 가장 먼저 엿보였다.

두라노는 천혜의 요새였다.

평지에 위치해 지형은 별 이점을 주지 못했지만, 도시의 막대한 부와 공업이 발달한 대도시다운 면모가 엿보이고 있었다. 성벽들은 굉장히 높았고 감시탑은 촘촘했으며 다양하게 얽힌 강줄기에서 끌어들인 다중의 해자가 있었고, 무시무시한 최신 공성 병기들이 성벽 위에 도배 장식마냥 끝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라노를 함락시킬 최적의 방법은 포위전이야. 사방을 틀어막고 방어자들이 굶어죽길 기다리는 거지. 하지만 상대는 수십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 가뭄이나 포위 상황을 대비한 대규모 비축분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내부에서 문을 열도록 만드는게 가장 현실적이겠군.’

새로운 장소에 갈 때마다 군사적 평가를 내리는 일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습관이었다. 아버지는 무릇 군대를 지휘할 자라면 지리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모두 알고 있어야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어느 장소가 싸움터가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군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아르투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도시의 중앙에서 평원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드높은 첨탑이었다. 하늘로 수백 미터는 뻗도록 지어진, 일찍이 본 적 없는 건축물이었다. 아르투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에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탑은 무언가?”

에렌은 아이가 장난감을 자랑하듯 도시의 자랑을 아르투르에게 소개했다.

“눈의 탑입니다. 아르투르 공. 두라노의 상징이죠. 도시의 주화와 깃발이 모두 저 탑을 사용하지요. 짐작하셨겠지만, 저희들이 아니라 고대의 레무스 인들이 마법으로 만든 건축물이고요.”

그는 성문으로 다가가는 동안, 줄기차게 탑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저 탑은 두라노의 역사 그 자체였다. 탑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를 중심으로 도시가 점차 넓혀져 온, 그런 나라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신이 나서 설명하던 에렌은, 아르투르의 말에 애써 외면하던 것을 떠올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자치하던 민주정 시대에는 도서관이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숙소였고, 도시의 대소사를 논하기 위한 의사당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치범 수용소이자, 참주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할까요.”

아르투르는 이곳까지 오면서 에렌에게 루드비코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예상대로, 에렌은 루드비코에게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었고, 그래서 루드비코가 사악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야기만 계속 했다.

‘그게 사실일까?’

직접 눈으로 확인할 시간이었다. 자신은 어느 사이 도개교가 내려간 도시의 성문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로 진입하려는 여행자들의 긴 줄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몰고 행렬 앞으로 가서, 먼저 통과시켜줄 것을 요구해볼까 생각했다. 그게 신분에 합당한 대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신원을 숨겨야할 때니까.’

이 시대에 다른 신분의 행세를 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의복, 억양, 체격, 행동가지.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면모에서, 그 사람의 신분이 묻어나오는 사회였으니까.

귀족들의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만 사용하는 “고급스러운” 억양과 단어들을 사용했고, 평민들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입을 수 없는 최고급의 의복들만 입고 다녔으며, 평생 받들어지며 살아온 만큼 몸에 베인 행동 자체가 달랐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먹는 것이 다르고, 단련도 일찍 시작해 체격도 남들보다 월등히 컸다.

신분을 숨기는 건 이 모든 것을 다른 무언가로 바꾼 후,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해야 한다는 일이었다. 특히 경비병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어설픈 연기는 금세 들통날거고, 그리 되면 그들은 매우 정중한 태도로, 아르투르의 신원을 자세하게 캐물어서 상부에 보고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전제는, 아르투르가 스스로 귀족이라는, 그에게는 숨 쉬듯이 당연했던 권리들을 내려놓을 때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그는 그렇게 했다. 아르투르는 기꺼이 귀족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필요한 상황에 적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주 어려웠는데, 몇 번 해보니까 할 만하군. 어차피 잠시 평민 행세를 한다고, 내가 정말로 평민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리하여, 아르투르와 에렌은 마침내 검문을 차례가 되었다. 에렌이 통행료를 받는 경비병들의 탁자에 동전들을 올려놓고, 지나치려는 순간.

“어이. 잠깐만.”

에렌이 뒤돌아본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신원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대장장이 길드에 있는 명부를 확인해보시면 제 이름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머무를 숙소도 저희 집이구요.”

“그래. 갑옷 장인 에렌. 당신은 잘 알고 있어. 최고급 갑옷을 만들기로 유명하잖아. 재산도 꽤 있었고, 행실도 괜찮아서 따르는 이들도 제법 있잖나.”

에렌은 두려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대장장이일 뿐입니다. 제가 이끄는 건 제 도제들뿐인걸요.”

경비대장은 킥킥 웃었다.

“뭐,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말고. 참주님께 불만이 아주 많다는 건 다 알아. 너도 배에 기름 찬 상류층이니까 보나마나 빼앗긴 재산과 특권을 되찾으려고 음모를 작당중이지 않겠어? 뻔하지.”

에렌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서는, 황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 재능을 두라노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치지. 그 자세만 잊지 마. 그러면 참주님께서 당신을 죽이진 않을 거야.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겸손하라고. 알겠어?”

경비대장은 에렌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다가, 에렌이 작성해둔 출입 요청서와 아르투르의 얼굴과 장비를 번갈아보았다.

“어디 보자. 이 북구인 용병 녀석이 호위라고? 재주도 좋군. 기사 한 둘 정도는 이길 법한 녀석을 어떻게 구했담? 단순히 호위치고는 아주 과한 것 같은데.”

“요즘 전쟁이 잦아서 치안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경비가 좀 들더라도 어쩔 수 없지요.”

“흐음.”

경비대장은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로 에렌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의 검지를 들어 가슴을 쿡쿡 찌르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어이. 야만인. 우리 말을 알아듣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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