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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와 자유 형제단은 아르투르에게 정중히 자신들의 초청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아르투르는 흔쾌히 승낙했다. 무기 압수도, 안대도 없었다. 시라노는 아르투르 일행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지만, 그가 나머지의 신원도 보증하자 넘어갔다.
그들은 관목이 우거진 수풀을 지나, 울창한 삼림 속으로 들어갔다. 자유 형제단은 굽은 칼을 꺼내, 능숙하게 수풀을 헤치면 아르투르 일행이 그 뒤를 따르는 식이었다. 이동하던 도중, 아르투르는 에렌에게 물었다.
“에렌, 이 자유 형제단이라는 자들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 가?”
“아뇨.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짐작 가는 집단은 있습니다. 일찍이 루드비코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참주의 칼날을 피해 도망친 자들이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도시민들 대부분이 도시 전설로 여겨왔는데, 그들이 실존하고 있었군요!”
시라노가 말했다.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참주 놈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숨겼으니까요. 만약 반 정부조직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유를 꿈꾸는 두라노 시민들이 들고 일어 날 테니까요. 하지만, 놈의 거짓말이 끝장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형제단이 도시로 진격해 참주의 목을 치고, 도시민들을 해방할 것입니다!”
아르투르는 시라노의 눈빛에서 단호한 결의와, 자신이 행하는 바에 대한 열정과 사명을 느꼈다. 그건 아르투르가 높이 사는 덕목이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행동가들은 존중 받을 자격이 있었다.
시라노는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 자유 형제단은 두라노의 참주인 루드비코 델 레코레와 그의 일당에게 맞서는 저항군입니다. 그의 폭정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은 자들, 자유를 갈망하는 진정한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레코레 가문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도시를 해방하는 일입니다.”
아르투르는 열정적으로 말하는 시라노를 살폈다. 그는 자신보다 몇 살 정도 많아 보이긴 했지만, 기사치고는 젊은 편이었다. 아르투르가 더욱 주목한 것은 그의 억양이었는데, 레무리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네는 이곳 출신이 아닌 것 같은데.”
시라노는 신이 나서, 고향을 자랑하듯이 이야기했다.
“예리하시군요. 말씀하신대로 저는 앙저뱅 출신입니다. 온화한 날씨와 옥토, 포도주로 유명하고, 음유시인들과 편력 기사들의 고향이기도 하죠.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여자인 엘레노어 왕비께서 다스리시는 영지고요.”
시라노가 내보이는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보면서, 아르투르는 그가 앙저뱅 출신이 맞다고 확신했다. 앙저뱅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문명화된 이들이라고 여겨, 은연중에 타 지방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드러내곤 했다. 왕비가 궁정에서 그러했듯이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어쩌다가 앙저뱅 출신의 기사가 자유 도시의 해방군을 이끌게 된 지가 궁금한 걸세.”
“그건 제가 앙저뱅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르투르는 그의 말이 한 없이 길어질 것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앙저뱅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하고 세련된 자들이었고, 잘난 척과 이야기를 좋아했다.
즉, 말이 더럽게 많았다.
묻지 않은 것까지 모두 다 말하는 바람에 고역이었지만, 아르투르는 사교활동에 능숙한 편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요점을 간추려냈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시라노는 일찍부터 왕비의 눈에 띄어 종자로 발탁되어 훌륭한 기사로 성장했다. 서임을 받은 직후, 그는 앙저뱅의 전통에 따라 절친한 음유 시인 한 명과 함께 편력을 떠났다.
그들의 발걸음은 두라노에서 멈추었고, 참주의 폭정을 목도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친구인 음유 시인은 두라노 출신이었고, 참주에게 맞설 저항군을 결성하기로 했다. 시라노는 자신의 친구를 돕기 위해, 무엇보다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를 돕기로 한 것이었다.
“불의를 보고 정의를 행함은 기사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맹세를 진지하게 여기는 이는 드물고, 창칼 앞에서 결의를 지키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르투르 공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음유 시인과 편력 기사가 이끄는 자유 도시의 저항군. 참, 몽상적인 조합이었다.
‘나만큼이나 어이가 없군.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다니.’
“그러면, 자네가 꼭 만나게 하고 싶다는 저항군의 지도자가, 자네의 친구인 그 음유시인이겠군.”
“맞습니다! 공! 레말리트라고 하는 친구인데, 정말 재치 있고 똑똑한 녀석입니다. 무엇보다, 정의롭지요! 아르투르 공처럼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레말리트라는 자가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졌다.
***
그들은 강을 건너고 나무 사이로 난 샛길로 접어들어, 우거진 숲을 헤치고 나갔다. 도중에 만나는 순찰대는 시라노에게 경례를 보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걷자, 숲 속에 있는 큰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는 건 숲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백여 가구의 모습이었다. 집은 대부분 나무를 덧댄 간이 주택에 불과했고, 헤진 짐승 가죽으로 옷을 꾸려 입는 자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사람의 정착지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 놀랍군. 어떻게 몇 년 째 들키지 않고 저항 활동을 이어가나 했더니, 이런 근사한 근거지를 숨겨둔 건가?”
시라노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레말리트가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여러모로 수완이 뛰어난 친구거든요.”
문명의 발상지인 레무리아 반도의 한복판에서, 야만인들처럼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여태 자유 형제단이 존속하고 있는 근거인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아르투르를 생각에서 깨웠다.
아이들은 신발도 벗은 채 시라노에게 달려오며 밝게 웃었고, 시라노도 품을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시라노 삼촌!”
“그래. 욘석들아! 삼촌 왔다! 맛있는 것도 잔뜩 가져왔지.”
그들은 한참을 부둥켜안고 정을 표시했다. 어느 정도 환영 인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린 아이들 답지 않게, 외지인에 대한 경계와 적의가 느껴졌다.
“걱정할 것 없다. 이분은 악한 자들을 벌하고 선한 이들을 돕는 진정한 기사시니까. 나보다도 명망이 높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고, 가장 고귀한 자리에서 태어났음에도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싸워주시는 분이다.”
아이들은 시라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계를 풀었고, 다가와서 온갖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에요?”
“아르투르다. 욘석아.”
“어떻게 하면 아저씨처럼 키가 클 수 있을까요?”
“잘 먹고, 잘 자면 된다.”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대답해주고 있을 무렵, 아르투르는 등뒤에서 낯선 이의 시선을 느끼고 되돌아봤다. 풍성한 붉은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였다. 수염과 머리를 잘 가다듬어 한껏 멋을 내고 있었고, 남자답지 않게 다양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싸워주시는 아르투르 공. 저는 자유 형제단을 이끄는 지도자, 레말리트입니다.”
고개를 숙인 레말리트의 목소리는 아주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생긴 것도 그렇고, 여자 깨나 울릴 사람이었다. 음유시인답다고나 할까.
“마주 봐도 좋네. 시라노 경이 꼭 자네를 한번 보고 가주었으면 한다고 말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네. 시라노 경에게도 약속했지만 내가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모두 외부에 이야기하지 않을 걸세. 내 일행도 마찬가지고.”
레말리트는 고개를 들어보였지만, 정중함을 유지한 채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아르투르 공. 공의 행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한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고맙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테지. 용건을 먼저 말해줄 수 있겠나? 친분은 그 뒤에 쌓고 싶군.”
아르투르의 말에 레말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희 형제단을 도와, 두라노를 해방하는 일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수년간 준비해온 계획이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공께서 도와주신다면, 성공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아르투르는 팔짱을 낀 채 레말리트를 바라봤다.
“당신은 세 가지를 말해야하오. 왜 나의 도움이 필요한지, 내가 왜 도와야만 하는 지, 그대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지 말이오.”
레말리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모든 정권 전복에는 무력이 필요합니다. 경께서는 현 시대 최고의 기사 중 한분이시죠. 당신께서 도와주신다면, 제 계획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르투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무력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빌릴 수 있소. 용병을 고용해도 되는 일이고.”
“말씀하신 대로, 무력은 빌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자를 구하는 건 그보다 까다롭지요. 공께서는 이익이 아닌, 대의와 명예를 위해 움직이십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깃들어있었다.
“시키는 대로 해줄 꼭두각시가 필요하단 이야기군. 그건 납득했소. 그럼, 왜 내가 움직여야하는 지 말해보시오.”
“공께서는 하이에버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를 위해서도 싸워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핍박 받는 백성들의 해방을 위해서 싸워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약자를 지키기로 한, 공의 명예에 타당한 일일 것입니다. 만약, 보상이 필요하신 것이라면 두라노가 지불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아르투르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경계는 여전했다.
“알겠소. 하지만 당시에는, 내 부하가 걸려있었기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지. 나는 명예를 좇지만, 바보는 아니오. 세상의 모든 통치자를 심판할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 점은, 제가 모두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이미 루드비코의 통치가 어떤 지 간접적으로 보셨을 겁니다. 술집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잡혀가는 모습을 에렌을 통해 보셨을테니까요. 직접 두라노에 가보시면 그 참상을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공께서 정말로 신경 쓰시는 일은 마지막 질문 아니십니까?”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음유시인답게, 사람의 심리는 잘 꿰뚫고 있었다. 이미, 비밀경찰들에게 공격 받을 때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렇지. 참주를 끌어내린다고 전부가 아니니까. 또 다른 문제는, 참주의 자리를 누가 메꿀 것이며 도시를 전복하는 동안 벌어질 혼란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요. 나는 당신이 그걸 잘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인지 알고 싶소. 폭군의 자리를 또 다른 폭군으로 대체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오.”
아르투르는 날카로운 눈매로, 레말리트의 시선을 마주 보았고, 레말리트 역시 또렷한 눈동자로 아르투르를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