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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64화 (6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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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한 아르투르의 모습을 보며, 스테판은 한층 더 냉소를 머금었을 뿐이다.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화를 내지. 공의 수발을 들던 소년들도 공처럼 살고 싶었을 거요. 위대한 기사의 종자가 되고, 대왕의 아들로서 관심도 받아보고, 글도 배워 책도 읽어보고 싶겠지.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소. 왜? 그들의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던 살인자가 아니었으니까.”

“이 개잡놈이! 뒈지고 싶냐!”

아르투르가 의자를 박차며 일어나 스테판을 노려봤지만, 스테판은 태연한 척 하며 그를 바라봤다.

“이보시오. 도련님. 당신이 타고난 자리는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목숨을 걸고 싸워도 근처에도 못 가보는 곳이오. 30년 간 대왕의 밑에서 종군한 기사가 뭘 받는지 아시오? 다 허물어져가는 성 하나와 농노 서른 명이 사는 어촌 마을이오.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존경하오. 닮고 싶은 사람이지. 하지만 지어진 일화 따위 때문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살인자 중 한명에게 살인자로서 보내는 경외요.”

스테판은 술잔을 마구 들이켰다. 취기가 달아오른 그의 표정에 좌절이 묻어나왔다.

“그런데, 우리 보고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 아버지가 가져다 준 다른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먹으면서 자란 당신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은 전쟁의 참상을 논할 자격이 없소. 타고 나면서 모든 것을 가진 어린 소년이 투정하는 것에 불과하오. 내 부하들의 태반은 이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영주에게 굽신거리는 농노의 삶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요. 전쟁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고, 그들은 용감하게 그걸 잡았지. 전리품을 취하는 건 용기있는 자들의 특권이오. 그걸 당신의 같잖은 정의감으로 막으려들지 마시오. 역겨워 죽겠거든.”

스테판은 얼굴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뒤로 술잔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은 이제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 - 네놈의 말이 맞다.”

아르투르도 이를 드러내며 빈정거렸다.

“이제 아셨소?”

“나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지. 하지만 너 같은 쓰레기한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수치스럽게 산 적은 없다. 나도, 내 아버지도 말이지.”

취기가 올라있던 스테판이 흥분했다.

“뭐? 쓰레기? 대왕의 아들이라고 봐주니까 이 애송이가 눈에 뵈는 게 없나보군. 한번만 더 그 개소리를 하면 얌전히 나가지는 못할게다.”

그의 말이 끝나자 주변의 호위병들이 일제히 아르투르에게 무기를 겨눴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차분하게 스테판을 바라봤다.

“ - 접대의 관습을 어길 건가? 네게 그럴 배짱이 있을까? 늙은 돼지야.”

스테판이 곁에 있던 유리병을 들어 후려치려했지만, 아르투르는 그대로 테이블을 걷어차서 놈을 쓰러뜨렸다. 와장창 소리가 나며 유리가 깨졌고, 스테판은 바닥에 뒹굴었다. 그 때 용감한 병사 한명이 기합을 지르며 창을 내질렀는데, 아르투르는 그것을 빼앗아 단숨에 부러뜨렸다. 창대를 손쉽게 부러뜨리는 모습에, 나머지 병사들은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너는 내게 특권에 대해 말했지. 내가 특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를 섬기던 이들에 대해 말했느냐? 나는 너희 같은 놈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 때문에 그들의 봉사를 받을 자격이 있던 거다. 그들을 대신 해서 싸우고, 대신 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쳐 싸울 테니까.”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려 반대로 걸어 나갔다.

“누가 옳은 지는 전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내가 위선자인지, 네가 변명만 늘어놓는 악당인지 신께서 심판하시겠지. 목 씻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다.”

아르투르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은방패 용병단의 진영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스테판이 그를 붙잡으라 소리쳤지만, 황금의 검을 뽑아든 아르투르의 기세가 워낙 사나워서 어떤 병사도 그를 가로막지 못했다. 그는 에쿠잘루스에 올라 질풍 같이 진영을 빠져나갔다.

***

아르투르가 돌아간 이후, 스테판은 만프레드에게 밀사를 보내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아르투르를 처치하고, 저희는 여태까지 해온대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최고의 용병단인 우리가 대립하는 것은 다른 용병단들이 치고 들어올 기회만 줄 것입니다.”

만프레드는 그를 비웃었다.

“내가 왜? 너희만 제거하면 나한텐 이제 경쟁 업체가 없어. 공정한 중재자가 왔을 때 받아들였어야지. 바보들아.”

밀사는 표정을 굳혔다.

“금괴 기사단의 역량이 이 정도입니까? 고작 잘 싸우는 기사 한명이 붙었다고 기고만장해선 모두가 죽는 길로 들어가자고요? 제정신입니까?”

“흠, 정보를 잘 알아야 한다는 걸 다시 실감하는군. 놈을 그저 '잘 싸우는 기사'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싸움은 이미 우리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돌아가서 전해. 당장 철수하거나, 우리와 싸워야 할 거라고. 둘 중 하나만 택해.”

만프레드의 답신을 들은 스테판은 격노해서 출전을 명령했다.

“이 발칙한 사생아 놈들이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모조리 목을 베어 효수해주마!”

그리하여 아르투르가 은방패 용병단을 방문하고 이틀 후, 두 용병단의 병력이 출전했다. 금괴 기사들은 아르투르가 자신들의 편으로 참전한다는 소식에 사기가 크게 올라갔다. 아르투르는 동료들의 원수 취급을 받을까 우려했는데, 금괴 기사들은 아르투르의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오오! '악마' 아르투르 경께서 오셨구려! 환영합니다! 물론 선봉은 맡아주시겠지요?”

“그럼그럼! 당연히 선봉은 악마의 몫이지. 이젠 갑옷을 베는 검도 얻으셨으니 누가 맞설 수 있겠소?”

“이젠 우리 편이니 착한 악마라고 부르면 되겠군.”

아르투르는 그들의 반응이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니 그냥 놔두었다. 정찰병 기병들이 적의 군대가 접근해오고 있음을 알렸고, 얼마 뒤, 금괴기사단의 모든 간부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열었다.

양 군이 마주할 카시아 구릉지대는 완만한 언덕이 많고 삼림이 우거져있어 기병 중심인 금괴 기사단에게 불리했다. 몇몇 장교들은 회군을 주장했지만 만프레드는 결전을 벌여 자신의 입지를 높이겠다는 결심을 내린 뒤였다.

‘이미 평범한 콘도티에레로선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입지야. 더 올라가려면 모험을 감행하는 수밖에. 언제까지 남의 돈 받고 용병 노릇이나 해줄 순 없지. 난 더 높은 곳을 원한다.’

서부 대륙 최고의 용병대장, 그것이 만프레드가 지금 노리고 있는 곳이었다. 은방패 용병단과 그 수장만 꺾어내면, 꿈은 현실이 되리라.

두 기사, 아르투르와 만프레드는 직접 정찰을 나가 전장을 살핀 후 돌아왔다. 그들은 돌아와 자신이 본 것을 말판과 표지를 이용해 작전 지도에 세밀히 표시했고, 전략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두 사람은 세밀하고 탁월한 전략을 내놓았는데, 많은 지휘관들의 그들의 대담함과 넓은 식견에 놀랐다.

명성 높은 콘도티에레인 만프레드야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아르투르는 개인의 무용에 대해서만 알려졌을 뿐, 전술적 식견에 있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만프레드와 동등한 수준의 의견을 내어놓고 있지 않은가. 금괴 기사들은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악마 같은 자에서, 진짜 악마로.

‘싸움은 괴물 같이 하고, 전술은 여우 같이 교활하군.’

만프레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젊은 기사는 경험 부족을 타고난 감과 훈련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재능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내 짐작이 맞았어. 적으로 돌려서 결코 좋을 것 없는 놈이야. 아니면 확실하게 죽여놓던가.’

동이 트기 전, 두 전술가는 구상을 마치고 중간 장교들에게 각자의 위치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 전술의 핵심은 한 마디로 정의되었다.

망치와 모루. 한 부대가 모루 역할을 맡아 공격을 버티는 사이, 다른 한 명이 적의 후방을 공격해 망치 역할을 하는, 고전적인 전술이었다.

만프레드가 보병대를 이끌고 적과 교전을 벌이는 모루 역할을, 아르투르가 기병대를 이끌고 뒤에서 적들을 치는 망치 역할을 하기로 정해졌다. 가장 고전적이지만, 가장 위력적인 전술이었다.

작전이 정해지자, 실행은 재빨랐다. 만프레드가 보병대를 이끌고 진군하자, 은방패 용병단들이 궁수들을 내보내 견제하며, 기병들을 풀었다. 그 사이 아르투르의 기병대가 적들의 시선을 피해 우회 기동을 시작했다.

선봉에서 말을 달려 나가는 아르투르의 뒤로, 500명에 달하는 중무장 기병대가 뒤따랐다.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우회하는 동안, 기동을 방해하는 지형지물이 많아 아르투르의 빠른 판단이 요구되곤 했다. 그 때마다 아르투르는 한 가지 명령만 내렸다.

“가장 빠른 길로. 돌진!”

도중에 좋지 않은 말을 타거나 승마술이 떨어지는 기병들은 뒤에 낙오되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 시간에 도착해 적들의 뒤를 칠 수 있으리라 기대할 만 했다.

긴 시간 동안 언덕을 넘고 숲과 여울을 건너자, 마침내 능선 너머에서 휘날리는 양대 용병단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전장의 함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각자 부대기를 뺏기 위해 밀고 밀리는, 보병대의 치열한 싸움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이 능선만 건너가면, 적의 뒤를 칠 수 있다.’

그 때, 은방패를 앞세운 적의 창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은방패 용병단의 최고 고참들로, 아르투르의 기병대를 저지하기 위해 따로 차출된 모양이었다.

오른손에는 긴 장창, 왼손에는 은도금 된 방패를 든 천명의 보병대.

만프레드가 아르투르에게 붙여준 부관, 스카가 물었다.

“아르투르 공, 우회해야합니다. 저들은 은방패 용병단의 최고참들이고,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길러진 훈련된 이들이지요. 정면으로 충돌하면 승산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스카만이 아니라, 다른 장교들과 평범한 기병들의 표정도 보니 스카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아르투르는 적의 대형을 차분하게 살피다가, 부장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자네들이 여태까지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지금 저 능선 너머에선 자네의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네. 그렇지?”

스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은방패 용병단은 보병, 금괴 기사단은 기병으로 유명한 용병대지. 그러니 만프레드 대장과 자네들의 동료들은 꽤 고전을 하고 있을 거야. 이대로 두면 질 공산이 훨씬 높고. 그렇지 않나?”

“그것도 맞습니다.”

“자네들의 오랜 전우들을 버릴 셈인가?"

스카는 하, 하고 웃더니 종자에게 자신의 마상창을 건네받았다.

“이 싸움에서 지면 받기로 했던 용병료도 받질 못하겠지요.”

“역시 자네들한텐 의리보단 돈이 잘 먹히는 이야긴가?”

“그럼요. 정통 기사이신 나으리가 돈에 명예를 파는 저희를 이해하실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은 가슴을 울리게 하는군요. 그럼, 저들을 어떻게 격파하실 겁니까?”

“간단하네. 마상창을 앞세우고 돌격 하는거지. 내가 선봉에 서겠네. 계책을 강구한다고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 시간에 정렬해서 다시 한 번 돌격 하는 게 나아. 전쟁터에서 시간은 곧 피일세. 완전하고 느린 결정보다 불완전하고 빠른 결정이 낫지.”

아르투르는 안장에 걸어놓은 자신의 투구를 쓰면서 마상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날카로운 창끝이 번쩍였고, 돌격 대형을 갖추고 있는 기병들 앞을 달려 나가며 함께 창을 맞부딪혔다.

“제군들 가운데에는 피 튀기는 싸움엔 관심이 없는 이도, 내게 원한을 가진 이도 있을 것이다. 그대들의 마음을 모두 존중한다.”

에쿠잘루스의 말발굽 소리와 창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대열 맨 끝자락에 있는 기병과도 창을 맞부딪힌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돌려세우며, 은방패 창병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오늘 우린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싸운다. 적들을 섬멸하고 그대들의 전우를 구할 것이다! 땅을 울리며 전진해라! 적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라!”

아르투르가 신호를 보내자, 스카가 곧장 돌격나팔을 불었다. 마상창을 앞세운 기병대가 돌진을 시작했다. 마갑을 씌운 백마를 탄 은빛 갑옷의 기사가 그들을 이끌었다.

“돌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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