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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드는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우리, 금괴기사단과 은방패 용병단이 약탈을 멈추면, 더 이상 싸움을 피할 핑계가 없어져. 놈들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게 된다는 뜻이지. 우리가 동네 잡배도 아니고, 적을 무찌르기로 계약한 이상 뭔가를 하는 시늉은 내야 하거든. 적 영토를 약탈하던가, 적 군대를 물리치던가. 둘 중 하나는 해야지. 저쪽도 마찬가지인 사정이고. 이걸 어떻게 중재해주겠다는 거냐?”
용병대는 하이에나 무리 같은 자들이었다. 시체가 가득한 싸움터와 싸움터를 오가며 썩은 고기로 삶을 이어가는 시체 청소부들. 이들에게 전쟁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승부처도 아니오, 명예를 건 사투도 아니다. 그저 삶의 현장일 뿐이었다.
“간단하다. 양측 용병단에서 대표를 보내 결투로 승자를 정하면 될 일이다.”
만프레드와 그의 참모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레무리아 반도에선 택도 없는 이야기였다.
“여긴 네 고향이 아니야. 아르투르. 속임수와 계략도 전쟁의 일부라고. 결투한다고 해놓고 급습을 해서 죽일지, 결투 결과에 딴말을 내놓을지 어떻게 알겠어?”
“그래서 내가 중재를 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속임수를 쓰거나,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내 적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만프레드는 아르투르가 보여주는 광오한 자신감에 말문이 막혔다. 일개 군단이라도 이끌고 있는 듯한 자신감이었다.
‘이놈이 드디어 미쳤나.’
일언지하에 아르투르의 제안을 거절하기 직전, 도파뉴 영지에서의 싸움이 떠올랐다. 아르투르는 혼자서 기사 십수 명을 쳐 죽이면서, 전열을 가르고 보병 대열을 휩쓸었다.
‘다시 그 광경을 보는 건 절대 사절이지.’
“달리 말하면, 은방패 놈들이 네 중재안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 편을 들겠군?”
“그렇다. 약탈을 멈추는 게 전제 조건이다. 지금 당장.”
만프레드는 잘난 척하는 아르투르의 목을 베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공작가 출신의 사생아로서, 아르투르에게 제법 호감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놈은 사생아라면 모름지기 몸으로 체득했을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체념이 없었다.
아르투르를 죽일 수 있다면 그를 죽이는 것이 이득이 되리라. 이 건방진 녀석의 목에 현상금을 걸고 있는 대영주들은 여럿이 있었고, 놈만 없으면 은방패 용병단과도 허울뿐인 대치 상태를 이어가며 물자와 돈을 비축할 수 있으리라.
병사들의 사기도 오르고, 자신에 대한 지지도 한층 굳건해지겠지.
‘지금 녀석을 죽이는 건 희생이 따를지언정,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갑옷을 가르는 검이 있다고 해서 군대와 싸울 수는 없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면 사람은 결국 죽어. 잘 때 죽여도 그만이고, 방법은 많다.’
한편으론, 타고난 생존 감각이 그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하이에버에서 그렇게 난장판을 피워놓고도 살아남은 걸 보면, 분명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거야. 게다가, 여전히 녀석은 데네토르 왕가에 연줄이 있을지도 몰라. 그의 친척이나, 형제들의 원한을 사서 좋을 일은 전혀 없겠지. 이대로 둔다면, 결투가 벌어질거고…’
‘아니, 잠깐만.’
만프레드는 계산을 마치고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이건, 기회다. 녀석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계산을 마친 만프레드는 고개를 돌려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밋서텐. 지금부터 전군에 전해라. 지금부터 민가에 대한 약탈 및 물자 징발을 금한다고. 이 지시를 어기는 자는 군령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해라.”
차가운 인상을 지닌 만프레드의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관이 막사를 나가자, 아르투르의 차갑게 굳어있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역시, 너라면 말이 통할 줄 알았어!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에게 손을 내밀었고, 만프레드도 부드럽게 웃으며 악수를 했다.
“살다 살다 결투로 전쟁의 결판을 낼 줄은 몰랐군. 그럼, 저쪽 진영에도 다녀오는 게 어때? 우리 쪽에서 전하는 것보다는 명성 높은 네가 가는 게 훨씬 이야기가 잘 통할 거야.”
“그러도록 하지. 은방패 용병단의 대답을 가져오마. 그 친구들도 결국 협력할 거다.”
아르투르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막사를 나갔다. 실은, 아르투르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빛의 검은 힘을 다했고, 지금처럼 많은 적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만약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 막사 안에 있는 녀석들이나 죽이고, 꼼짝 없이 죽었을테지. 등 뒤의 창과 눈먼 화살을 당해낼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군대 한명 없이 수천에 달하는 용병들의 약탈을 막으려는 데, 그 정도 모험은 해야만 했다. 금괴 기사단을 설득했듯 은방패 용병단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저쪽도 만프레드만큼 말이 통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
아르투르가 나간 후, 만프레드의 부장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콘도티에레, 정말로 결투로 승자를 정하실 생각입니까? 그런 짓을 한다면 저흰 레무리아 전체의 비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만약 지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의뢰를 받기 힘들어질 거고요. 단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만프레드는 껄껄 웃었다.
“야, 너희들. 내가 언제 너희한테 손해 보는 거 제안한 적 있냐? 기다려봐.”
“뭐 믿으시는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다들 잊었나? 우린 레무리아에서 가장 깨끗하게 일하는 용병들이라는 거. 뭐, 사실 그냥 내가 편하자고 군기 잡아두는 거지만. 저쪽 애들은 질이 좀 안 좋은 애들이 많거든.”
만프레드는 책상을 돌면서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다들 스테판이 뭐하는 놈인지 잊었나? 기사도 좋아하는 아르투르 놈이랑 만나면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다."
***
아르투르는 은방패 용병단의 진영을 지나 그들의 지휘부를 만나러 가며 여러 차례 심기가 거슬려왔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신음과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용병단 간부와 노예 상인들이 붙잡혀온 마을 사람들과 약탈품을 두고 흥정하는 모습은 증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린 소년들끼리 진검으로 싸우게 하고, 그 경기를 관람하는 놈들도 있었다.
‘싹 다 죽여버릴까?'
자신이 사신으로 온 것이 아니고, 황금 검의 힘이 돌아왔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성검은 이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주어진 힘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참아야 했다. 저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지휘관의 막사에 도착하자, 마을에서 강탈한 전리품이 가득 담긴 상자가 여럿 있었고, 끌려온 사람들이 눈물을 훌쩍이며 나오고 있었다. 자연스레 황금의 검의 손잡이에 손이 올라갔다.
“아, 어서오시오. 페르넬의 아들 아르투르 경!”
은방패 용병단의 콘도티에레, 스테판은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체격이 컸다. 그리고 추악한 욕망은 젊은 시절보다 몇 배는 커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투르는 단숨에 빛의 검을 뽑아 그를 베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지만, 자신이 사자로 왔다는 본분을 잊지 않기로 했다. 차분히 검에서 손을 놓고, 악수를 청하는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나는 강철 방패의 스테판이라고 하오. 북구인들의 침공 때는, 나도 페르넬 대왕을 섬겼지. 그분의 아들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오. 위대한 자의 아들은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아야지. 우선 내 손님으로 오셨으니 이것부터 드십시다.”
그가 물과 소금을 내밀자, 아르투르는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접대의 관습이 성립되었고,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되었으니 서로를 해치는 것은 금기시 되리라.
“마침 연회를 진행 중이었는데, 같이 술잔을 기울이지 않겠소?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아버님을 아는 자를 만나게 되어 기쁘오. 초대에 응하겠소.”
아무리 용병들 간의 싸움이 이따금 요식행위로 끝난다지만, 이번 경우엔 정도가 심했다. 용병단 간부들 전체가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유흥을 즐기고 있던 것이다. 스테판과 아르투르는 단둘이 앉아 술잔을 몇 차례 주고받았다. 앙저뱅 산 포도주였다.
‘썩을. 이 노인네랑 앉아있으면 여기까지 냄새가 나는 기분이야.’
이곳에서 협상을 파토내고 나가 놈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바라는 바였지만, 그러면 수천의 피가 흐를 것이다. 도중에 무고한 이들도 많이 죽겠지. 책임지고자 하는 것이 생긴 이상, 이전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만 말할 순 없는 것이다.
아르투르가 표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평생 거짓 웃음 따위 지어본 적 없는 기사의 본심을 파악하는 것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용병대장에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아르투르에게서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증오를 느꼈다.
스테판은 마음속에서 그를 비웃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후견을 받는다는 소문만 아니었으면 만나줄 생각도 없었다.
“공의 말씀은 더는 민간에 피해를 끼치지 말고 두 용병단 사이의 결투로 문제를 해결하라. 이 말씀이시오?”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전쟁을 하는 건 당신들의 생업이니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오. 하지만 당신들은 전쟁과 무관한 이들의 삶을 파괴하며 탐욕만 채우고 있소. 이는 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이오. 정정당당하게 전쟁터에서 승패를 가리던가, 결투의 패자가 물러나는 것으로 합시다. 이것이 나의 중재안이오.”
스테판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르투르를 바라봈다.
“아르투르 공. 전쟁터에선 원래 사람들이 희생되기 마련입니다. 너무 예민해 하지 마시지요. 대왕께 전쟁의 어두운 면에 대해선 배우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요. 그럼 공이 좋아할 명분으로 따져보지요.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우리에게 싸우라 마라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긴 데네토르 왕국이 아니고, 우린 어떤 군주도 모시지 않습니다.”
아르투르의 표정엔 웃음 한 점 없었다.
“그대에게 명령할 자격은 없지. 단지 나는 경고하고 있는 거요. 내 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중재안을 따르라고 말이오.”
“그래. 공께서는 얼마의 군대를 거느리고 계십니까?”
“아주 대단한 군마 한 필과 잘 드는 명검 한 자루가 있소.”
아르투르의 대답에 스테판은 껄껄 웃으며 박수를 쳤다.
“지금 보니 공은 광대짓에도 자질이 있으시군요. 그래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약탈이 왜 나쁜 겁니까? 전쟁과 약탈은 한 몸입니다. 오만방자하고 자격 없는 이들을 끌어내리고, 비천하고 능력 있는 이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기회죠.”
스테판은 연회 판에서 춤추고 있는 한 무희를 가리켰다.
“저 여자는 얼마 전까지 지주의 아내였습니다. 지금은 동전 몇 푼에 가랑이나 벌리는 신세죠. 반면, 그 옆에 앉아있는 소년은 지주집의 머슴으로 학대받던 자입니다. 하지만 이젠 한 사람의 남자가 돼서 무기를 잡게 되었지요. 둘의 처지가 반대가 된 겁니다. 전쟁과 약탈은 이렇듯,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겁니다.”
무희는 스테판의 눈길에 억지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르투르는 이 광경이 너무 역겨웠다.
“궤변을 늘어놓지 마시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들은 평범한 일상을 아직도 잘 영위하고 있을 거요. 소년에겐 노예보다 나은 삶을 선택할 다른 기회가 또 있었겠지. 당신들처럼 짐승이 되는 길이 아니란 말이오.”
“세상사가 원래 다 이렇습니다. 누군가 존귀해지려면 누군가는 아래서 똥을 닦아줘야죠. 한 명이 얻으면 한 명은 잃는 겁니다. 그대의 조상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존귀한 자리에 오른 겁니다. 그래놓고 우리 보곤 하지 말라는 겁니까? 왕족들이 사람을 죽이면 위대한 영웅이고 우리가 죽이면 비천한 용병인 겁니까?”
“ - 부디 말을 조심하는 게 좋겠소. 일부러 내 화를 돋우려는 게 아니라면.”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크게 올라갔다.
“귀하게 자란 분이라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군. 한 가지만 묻겠소. 공이 자란 궁정엔 비슷한 또래 소년들이 있었을 거요. 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기억하시오? 이름이 기억나는 하인은 있고?”
스테판의 비웃음이 시작되자, 아르투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