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62화 (6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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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 기사단의 신입 대원, 파비앙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여겼다. 농사일로는 인생에 희망이 없다 싶어 아버지가 평생 모은 재산을 들고 마을을 벗어나자, 마침 용병 업계의 전설인 금괴 기사단이 신입 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곧장 장비를 갖추고 입단 지원서를 냈다. 그러자 3개월간 지옥 같은 훈련이 이어졌다. 절반이 그중에 탈락했고, 나머지 중 절반은 가혹 행위를 이기지 못하고 탈영했다.

하지만 자신은 견뎌냈다! 농부로 태어났지만 이제는 어엿한 용병이 된 것이었다. 더 이상 가축처럼 땅이나 파먹는 농부가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전사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는 특별히 성적이 좋아 십인장으로 임명받았고, 첫 번째 임무로 외딴 산간 마을에서 물자를 보급해오는 역할을 맡았다. 마을 주민들이 반항적이라고 들었는데, 파비앙은 그들이 주제를 모르고 덤벼주길 바랐다. 그러면 마음껏 약탈해도 될 테니까. 재미도 보고, 재산도 불릴 좋은 기회가 되리라.

그래서 파비앙과 그의 동료들은 마을 남자들이 쟁기와 몽둥이를 들고 나와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을 때,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야, 보이냐? 오늘 횡재했네.”

“그러게. 이쁜이들이 좀 많았으면 좋겠네.”

“숨겨둔 금괴 같은 건 없나?”

용병들은 농민들은 보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저 같잖은 놈들을 죽이고, 마을을 마음껏 약탈할 시간이었다. 그때, 측면에서 수풀이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 함.”

수풀 속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금발의 기사가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할버드를 땅바닥에 내리치더니 흙바닥을 주르륵 긁어서 마을 주민들과 용병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여기 넘어오지 마라. 죽으니까.”

아르투르는 그 선 너머에 주저앉은 채 자신만만하게 용병들을 바라봤다. 용병들은 순간 긴장했다.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는 기사였으니, 자신들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상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서른 명이 넘었고, 놈은 한명에 불과했으니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파비앙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기사 나으리. 어쩌다 이런 산골에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이 마을의 적법한 주인의 명을 받아 물자를 징발하러 온 참이오. 방해하지 말고 비켜서시오.”

파비앙의 말을 들은 아르투르는 곤란한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음. 그래. 너흰 그런 사정이 있군. 그런데 나도 내 사정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은 터라, 굶어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거든. 너희가 이 마을 사람들의 물자를 뺏어 가면, 이들은 이번 해에 다들 굶어 죽을 거야.”

파비앙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호기롭게 외쳤다.

“그건 마을 놈들이 알아서 할 일이 아니겠소? 이 영지의 기사도 아닌 모양인데, 끼어드는 이유가 뭐요?”

“자신을 환대해준 이를 저버리는 건 기사의 도리가 아니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대신 싸워줄 수도 있지. 기사의 명예란 그런 것 아니겠나.”

그의 이야기를 들은 파비앙과 용병들, 농부들은 모두 눈을 껌뻑였다. 명예란 하층민들에게 유니콘 같은 이야기였다. 누구나 존재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게 명예를 좆는 기사다.

“뭐요?”

파비안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말했다.

“탄압받는 약자를 지키는 것은 기사의 도리라는 이야기다. 나는 서임을 받을 때 약자들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다. 너희는 돈을 위해 싸우지만, 나는 명예를 너희가 돈을 중시하는 것 이상으로 중하게 여긴다.”

파비앙은 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고참 용병대원을 바라봤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 보쇼.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린 숫자가 삼십 명도 넘소. 군사 훈련을 받았고 갑옷과 무기도 잘 입었고. 아무리 기사 나리여도 우릴 상대로 싸우면 죽소. 그러니 서로 피 보지 말고, 갈 길 갑시다.”

아르투르는 할버드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너희, 장비만 좋을 뿐 실전 경험은 없지? 너희 눈에서 두려움이 보인다. 숫자로 위압할 거면 포기해라. 나는 백 명의 사이로도 뛰어들어본 미친놈이니까, 삼십 명 가지곤 어림도 없지.”

“이런 썅! 개소리 집어치워! 기사고 뭐고 드디어 한 몫 잡을 기회가 왔는데 날 막게 둘 수는 없다! 공격!”

파비앙이 장검을 뽑아들며 선을 넘어 용감히 돌격했다. 정확히, 그의 발이 선을 넘기 직전, 용병단의 고참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멈추십시오! 파비앙!”

파비앙의 발걸음이 공중에 발을 디딘 채로, 다급히 자신을 부른 고참을 바라봤다.

“뭔데!”

“움직이지 말고 그 상태로 있어. 너 죽어.”

어느새 그의 목덜미에 할버드의 날이 겨눠져 있었다. 발걸음을 마저 내디뎠다면 필시 날이 그의 목을 갈랐을 것이다. 파비앙은 경악한 숨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뒤로 당겨 도로 돌아갔다.

“제때 잘 멈췄군.”

아르투르는 할버드를 거두었고, 고참 용병이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백인을 벤 아르투르 경.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먼저 존함을 밝혀주셨다면 저희도 감히 대적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백인을 벤 아르투르? 우리 단장을 패퇴시켰다는 그 전설적인 기사가 저 애송이라고?

아르투르는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제 내 이름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생기다니. 하지만, 겉으론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할버드를 어깨에 걸친 채 그들을 노려봤다.

“알았으면 얌전히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태도를 급속히 바꾼 파비앙은 아르투르의 눈치를 살폈다. 몇 달 전에, 기사 출신의 용병단 선배들이 아르투르라는 놈에게 속절없이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물며 기사 출신의 선배들이 그럴 지언데, 훈련 좀 받은 농민인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일 리가 없었다.

“그, 그러겠습니다. 저희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좋아. 너희의 사죄를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너희에게 요구할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너희 콘도티에레를 만나야겠다. 이름이 만프레드라고 하던가?”

***

만프레드는 장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차근차근 쌓여가는 물자가 그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도파뉴 백작령을 점령해달라는 의뢰를 실패한 이후, 용병단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자신의 위치는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그는 두라노의 참주인 루드비코가 의뢰한 대형 의뢰를 물어왔고, 용병단은 단숨에 큰 돈을 벌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그의 용병단장 직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이득을 본다면, 지난번에 손실한 자금을 충분히 메울 수 있으리라.

“좋아. 이번 일만 잘 마치면 재기할 수 있겠어.”

“콘도티에레,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음? 누군데? 상대가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라도 한 건가?”

만프레드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손님을 만나러갔다. 기쁜 소식 일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며.

“오랜만이다. 만프레드. 여전한 걸 보니 기쁘구나.”

눈앞의 불청객, 아르투르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만프레드의 호위 기사들은 곧장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만프레드의 양옆을 방어했지만 아르투르는 손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여유롭게 그들을 쳐다봤다.

‘젠장, 이놈이 왜 또 여기 있어? 기껏 잘되고 있는데, 이런 놈이 오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른단 말이다.’

만프레드는 상황이 꼬여가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자신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덕분에 위기에 몰렸었지만, 이젠 살만해졌어. 자, 내 진영엔 무슨 일이냐? 그 사이에 네 별명이 하나 더 늘었더군. 하이에버의 도살자라고. 수십 명의 귀족들을 하이에버에서 참살하고도, 무사히 빠져나왔다며?”

“그래. 잘 드는 검 하나를 구해서 말이야. 방패를 두 동강 내고, 사람을 반으로 갈라죽일 수도 있더라고. 운이 좋았지.”

만프레드는 아르투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것을 구했군. 좋아.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볼까?”

“좋은 생각이야.”

만프레드는 박수를 쳐서, 부관으로 하여금 두 사람이 앉을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은, 양측 용병단이 행하고 있는 약탈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다. 너희 금괴 기사단과 은방패 용병단 모두 말이야. 전쟁을 하더라도, 관련 없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어선 안 되겠지.”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의 눈동자를 마주본 채 자신의 '요구'를 전했다. 만프레드는 뒷골을 매만지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전쟁이란 게 원래 이런 거야. 농민들이 먹을 게 없다고? 병사들도 먹을 게 없어. 언제 싸우다 죽을지 모르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놈들을 통제하는 게 쉬운 줄 아나? 내가 내일부터 약탈 금지를 선언하더라도 그걸 번번이 어기는 놈들은 나올 거야.”

“군법 재판에 회부하면 되는 일 아닌가.”

아르투르는 태연히 말했고, 만프레드는 질색을 했다.

“그래서 민간인 약탈 좀 했다고 부하들을 교수대로 보내라고? 그것도 은방패 용병단이라는 호적수를 눈앞에 두고? 그런 식으로 하면 난 망해. 아니, 어떤 군주도 그런 식으론 군대를 운영을 못 한단 말이다. 좀 그럴듯한 요구를 하면 들어보려고 했더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군. 내가 더 듣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그때 아르투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 일부러 제대로 안 싸우고 있는 것 다 안다. 너희 두 용병단 사이에 밀약이 있겠지. 서로 간의 교전은 피하고, 상대방의 영토만 약탈해서 돈이나 벌자고 말이야.”

만프레드가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아르투르를 쳐다봤다. 만프레드는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하려면 증거가 필요하겠지? 그런게 있나?”

아르투르는 씩 웃었다. 그가 시치미를 뗄 줄 알았다는 듯.

“이곳에 들어오면서 너희 군대의 배치와 은방패 용병단의 배치를 모두 살폈다. 서로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배치더군. 각자 의뢰주에겐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겠지. 상대가 언덕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고용주는 뭔가 미심쩍지만 일단은 믿겠지. 이미 너희에게 돈은 입금한 이후니까. 너희는 영주의 명으로 주변 마을에서 물자를 징발하면서, 적의 영토를 약탈하면서 보급 물자를 충당하겠지. 그렇게, 싸우지 않고 돈은 돈대로, 약탈품은 약탈품대로 벌어가는 거 아니겠어?”

만프레드는 팔짱을 끼며, 흥미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 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이 늘었구나. 망나니 왕자님. 그래서 그걸 밝혀냈다고 한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넌 더 이상 영지도 없고 군대도 없어.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맞는 말이야. 지금의 나는 일개 방랑기사일 뿐이지.”

아르투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만프레드의 갑옷이 걸려있는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이거 얼마쯤 하냐?”

“전부 맞추는데 피오렌 금화 1200닢 정도 들었지.”

“그래? 그렇다면 나중에 물어주마.”

아르투르는 곧장 오른손의 보검을 빼 들었다. 만프레드와 호위 기사들이 경악하며 무기를 뽑았지만, 아르투르의 검이 더 빨랐다.

- 빛을 내는 황금의 검이 판금 흉갑을 정확히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장인들이 만들어낸 마을 한 개 값의 갑옷 세트가 고철이 되어 나뒹구는 순간이었다. 이 광경을 본 자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봤지? 만약 네가 상대 용병단과의 싸움이 걱정돼서 싸움을 피하고 있을 뿐이라면, 두 용병단 사이를 내가 중재해주겠다. 하지만 네가 싸울 생각 없이, 주변을 약탈하는 이 상황을 즐기고 싶다면, 이젠 끝내야 할 시간이야.”

아르투르의 검이 내뿜던 빛이 사라지고, 보통의 명검이 되어 칼집으로 되돌아갔다.

“ - 내가 뭘 할 수 있냐고 물었지? 내 제안을 거절하는 쪽의 반대편에 가담해서 싸울 것이다. 일개 방랑기사라 용병단에 맞설 순 없지만, 같은 실력의 두 용병단 가운데 누가 최강의 용병단 인지 가려줄 정도의 힘은 있지. 자, 내가 은방패 용병단에 합류하는 걸 보고 싶다면 내 제안을 거절하면 된다. 자, 어떻게 할 테냐? 만프레드.”

아르투르는 경고를 담은 차가운 눈빛으로 만프레드를 바라봤고, 그는 아르투르의 시선과 한동안 눈을 마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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