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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61화 (6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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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와 에렌은 탈진 직전이었다. 하산하던 중 눈사태를 만나 조난당한 덕택이었다. 억지로 길을 만들어가며 내려가야 했던 탓에 식량이 바닥났다. 그들은 가죽 배낭과 신발을 삶아먹으면서 버텼다. 춥다고 쓰러지면 꼼짝 없이 얼어 죽을 테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했다.

처음에는 황금의 검이 가진 치유의 힘을 빌어 눈보라를 헤쳐 나가려고 했지만, 겨울성에서의 전투 이후 검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밤의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밝히는 것이 전부였다.

‘검의 힘도 무한하진 않고, 한번 크게 쓰면 오랫동안 쉬어야하는군.’

어찌되었건, 여러 고난 끝에 그들은 백색 산맥을 기어코 내려왔고, 살아남았다. 마침내 그들이 산간 마을을 발견하고, 벽돌집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며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일은 없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히히히힝 -

에쿠잘루스도 기쁜지 울음소리를 내며, 앞발을 들어 올려 기쁨을 표했다.

***

두 사람은 산간 마을에서, 상상하던 것 이상의 환대를 받았다. 산민들은 풍부한 고깃국을 곁들인 만찬을 대접했다. 심지어 닭까지 잡아주었다.빵 부스러기나 얻어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두 사람은, 따뜻한 빵과 수프를 만끽하며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 감사를 표했다.

아르투르와 에렌은 식사를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특히, 아르투르는 닭 한 마리를 먹고도 배가 고파 빵을 마구 집어먹었다.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나 싶었지만, 배고픔 앞에 예의를 따지랴.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우고 밀렸던 잠이 몰려왔다. 심지어 마을 촌장은 한숨 쉬라며 자기 집의 침대까지 내주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선량한 산악 마을 주민들이었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관대한 자들이 얼마나 있으랴?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집처럼 편히 머물다 가십시오.”

“고맙네. 자네의 호의를 잊지 않지.”

통나무로 된 검소한 집이었지만, 산간 마을에서 이만하면 충분했다. 떨어지는 눈덩이를 막을 수 있는 지붕이 있는 것만 해도 너무 좋았다. 문득, 촌장은 어디서 머물지 의아해지만 너무 졸음이 몰려와서 한숨 자기로 했다.

용의 아들과 싸우며 넘었던 죽음의 위기보다, 산에서 내려오며 겪었던 죽음의 고비가 더 많았다. 문명의 종말을 선고하는 용과 싸우겠노라 선언해놓고 산에서 얼어 죽었으면,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 되었을 테지.

아르투르가 달콤한 잠에 빠져 들어있을 때, 누군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아르투르는 잠에서 깨어났고, 자연스레 손을 벽에 뉘여둔 보검의 손잡이로 가져가며 실눈을 떴다. 그러자 앳된 처녀가 윗도리를 벗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꿈에 있나 싶어 눈을 비볐다.

“… 엘라카르시스… 님은, 아닌 것 같고. 넌 누구냐?”

“특이한 이름이네요. 아내 되시는 숙녀분의 성함인가요?”

아르투르는 상반신을 일으켜 슬쩍 그녀를 봤다. 어디서 본 얼굴인가 했더니, 마을 처녀 중 한 사람이었다.

“일단 옷부터 입지. 눈을 둘 데가 없군.”

“….네.”

민망한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보다 문명적인 옷차림을 하고 마주 앉았다. 아르투르는 식사 자리에서 가져온 치즈를 한입 베어 물었고, 상대 처녀에게도 내밀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받아먹었다.

“자, 설명해봐라, 네가 왜 내 방에, 그것도 헐벗은 채로 있으려고 했는지. 잘못 들어왔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저 기사님에게 최선을 다해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백색 산맥을 넘어오셨다면, 오래도록 여자를 품지 못하셨을 것 아닌가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니, 아니. 이건 일반적인 환대의 수준을 완전히 넘었어. 그리고 나는 여자를 정말 좋아하지만, 매춘부랑 자는 취미는 없거든?”

“아….”

처녀는 뭔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렸고, 아르투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출구를 가리켰다.

“자, 나가. 난 지금 단잠을 방해받아서 기분이 나쁘거든.”

처녀는 애절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지금 나가면 마을에서 쫓겨날 거에요. 그냥 모른 척 하고 한번만 안아주세요. 돈은 지불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기분이 좋으면 조금 주시면 좋지만….”

“무슨 소리야? 장사하러 오신 것 아니었나?”

슬슬 아르투르의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 저랑 제 동생이 촌장님 댁에 의탁해서 자랐고, 지금도 그분이 아니면 마을에 머무를 곳이 없어서요. 기사님을 반드시 잘 대접해야만 해요. 그리고 원래 산에서 내려온 여행객들을 접대하는 건 부모도 남편도 없는 저만 할 수 있는 역할이구요.”

아르투르가 곰곰이 상황을 돌이켜보니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호의는 과했다. 그저 여행객들에게 베풀 줄 아는 이들이라기엔, 척박한 산간 마을 주민들이 섣불리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춥고 배고파서 앞뒤를 재지 못했을 뿐, 바라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너희, 나한테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냐?”

“… 네.”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얼마면 돼지? 조금 비싸더라도 지급하마. 감동이 좀 깨지긴 하는군. 하기야, 세상사에 공짜가 어디 있겠나. 이해할 수 있어. 보아하니 여긴 제대로 농사짓기도 힘들고, 기껏 해봐야 양이나 치겠지. 하지만 그걸론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그러니 백색 산맥을 오가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이렇게 강매를 하는 거야. 일단 베풀어놓고, 비싸게 값을 요구하는 거지. 내 말이 맞나?’

속은 기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이 자신에게 잘못한 건 없었다. 마음대로 착각한 것이었을 뿐이고, 자신도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빵 한 덩이에 금화 한 닢을 불렀어도 아르투르는 지급했을 것이다. 마음 속 한 구석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음식만 파는 게 아니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따뜻한 환대도 파는 거군. 너무 실감나게 연기해서 꼼짝 없이 속았지 뭐냐. 어쨌든 너희 마을 덕에 우리가 목숨을 구한 건 맞으니, 부족하지 않게 지급하겠다. 얼마면 되지? 네게도 화대를 치러주마.”

“…말씀하신 것이 전부 맞지만, 촌장님이 기사님께 바라는 건 단순한 금화가 아니에요. 그저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게 빚을 지우시려는 것 같아요.”

아르투르는 머리가 피곤해졌다. 차라리 금 좀 주고 끝냈으면 편하겠는데.

“촌장이 뭘 바랄 것 같으냐? 우선 네 이름부터 말하고.”

처녀의 얼굴에 기쁨이 퍼져나갔다.

“제 이름을 물어보신 여행객은 처음이세요. 제 이름은 베르타입니다. 촌장님이 바라시는 걸 말씀드리려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겠네요.”

“됐으니까 해봐라. 길면 빨리 이야기해야 빨리 끝나지.”

아르투르는 처녀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중요한 정보만 간추렸다. 도중에 나오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사에 대한 건 모두 흘려 넘겼다.

요약해보자면, 작년 가을, 마을의 법적인 주인인 산 아래 영주가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그렇게 불렀다.- 전쟁이 났다며 남자들을 불러 모은 모양이었다. 마침 마을엔 이 미래가 없는 곳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가고 싶어 하는 젊은 남자들이 가득했기에 그들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물론, 그들 중에 절반이 그 해가 가기 전에 전사했다.

“… 그 가운데는 제 소꿉친구도 있었어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전리품을 가져와서 저와 결혼하겠다면서 기어이 가더라고요.”

베르타는 울먹이면서 이야기했지만, 아르투르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지금 산간 마을에서 처음 만난 여자의 하소연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여태까지 그랬듯이 전쟁과 상관없이 살아가나 싶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쯤, 은방패 문장을 단 무장 병사들이 마을을 찾아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다. 마을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기에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식량과 재산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베르타의 표정이 잠시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마 마을을 약탈하는 용병들이 곱게 재산만 뺏고 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르투르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식량을 빼앗겼다면 남은 겨울은 어떻게 견딘 것이냐?”

“아, 이런 상황에 대비해 식량을 숨겨두는 곳이 있어요. 위치는 기사님께도 비밀이지만요.”

갓 소녀를 벗어난 처녀다운 순진함이라고 해야 할 지,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준다고 판단해야 할 지 미묘했다.

“그래. 너희 마을이 곤경에 처했다는 건 잘 알겠다. 그래서 촌장이 내게 부탁할 것은 대체 뭐냐?”

“…이번에는 일주일 전쯤, 산 아래 영주의 문장이 그려진 기병이 와서 보급 물자를 요구했어요. 저희는 남은 물자가 없다고 버텼답니다. 정말로 없어요. 저희가 다음 추수 때까지 견딜 물자가 전부에요. 그러자 기병은 다음 주에 용병들과 함께 올 테니, 그때까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보급 물자를 모으라고 요구했죠. 그렇지 않으면 약탈당할 것이라고요.”

아르투르는 산 아래 영주라는 자가 하는 발상이 참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이라면 생각도 못해볼 일이겠지.

‘적에게 약탈을 당한 영지민들에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약탈하겠다고 위협해서 물자를 뜯어내는 건가?’

어쩌다가 이런 자가 영주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도의를 따지기 전에, 이런 방식으로는 영지 자체도 오래 가기 어려울 터이다. 부족하면 아랫것들을 쥐어짜고, 그들이 도움이 필요하면 외면하면 그만이라니, 말이 영주지, 강도나 다름이 없었다.

“… 일개 기사인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그 영주와 담판이라도 지어달라고?”

아르투르는 사실 상대가 영주가 아니라 황제쯤 되어도 따지러 갈 생각이었지만, 영주와 맞서겠다는 촌장이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는 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 아니에요. 저희가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그런 걸 부탁드릴 순 없죠. 단지, 저희 마을은 산 아래 영주가 데려올 용병들을 격퇴할 생각이에요. 그곳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해요.”

아르투르는 베르타가 농담을 하나 살펴봤지만, 이 순진한 처녀는 그걸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거, 촌장이란 놈의 생각이지?”

“네. 촌장님이 아니었다면 그런 대담한 일을 누가 생각했겠어요?”

아, 대단한 영주에 대단한 촌장이다. 하기야 촌장 쯤 된다면 마을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유력 가문이기 마련이고, 사자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라고 기사가 없는 마을이라면 촌장들이 입김이 세기 마련이었다.

사자가 없는 산에는 늑대가 왕이라지만, 그렇다고 너구리가 왕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오소리의 최후가 눈에 그려졌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저희가 식량을 빼앗기면 마을은 해체해야 할 거에요. 먹고 살길을 찾아 다들 뿔뿔이 흩어지겠죠. 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이 갈 곳은 뻔하죠. 남자들은 쟁기 한 자루 쥐고 화살 받이로, 여자들은 그런 떠돌이들에게 몸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매춘부가 돼는 게 전부일 거에요. 저는 이미 그런 처지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지만, 동생만큼은 다른 삶을 살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마을이 남아있어야 해요.”

베르타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지나갔고, 아르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의 고집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용병들이 언제 온다고 했나?”

“하루나 이틀 뒤쯤 오지 않을까요?”

“내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니, 일단 돕도록 하겠다.”

아르투르의 말에 베르타가 활짝 웃었다.

“저희도 기사가 생기면 싸워볼 수 있을 거에요!”

자기 같은 고집쟁이 기사가 아니었다면, 이 마을 사람들은 미친 놈 취급이나 받았을 이야기라는 걸 아르투르는 너무 뻔히 알았다.

아르투르는 그들이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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