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정적이 흘렀다.
잠시 간의 침묵이 지난 후, 푸후니크의 목울대에서 복부까지 긴 선이 그어졌다. 막혀있던 댐이 물을 토해내듯이, 푸후니크의 몸은 핏줄기와 장기를 쏟아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용의 심장은, 그가 쉽게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푸후니크의 피는 용암처럼 펄펄 끓어올랐고, 장기를 재생하며 상처를 수복했다.
그 찰나, 번득이는 황금의 검이 푸후니크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러자, 기괴하게 돋아나던 살점들도 재생을 멈추었다. 푸후니크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웃음 지었다.
“정말… 정말 재밌는 싸움이었군. 망할 검 같으니, 그 불경한 유물은 도저히 이겨낼 방법이 없구나.”
스륵 -
아르투르는 성검으로 푸후니크의 상처를 후벼파며, 거칠게 빼냈다. 푸후니크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둥근 검은색 장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 크고, 괴이했다.
“내 심장에는 용의 힘이 담겨있다. 네가 승자이니, 이것을 집어삼키면 불사의 육신을 얻게 되리라.”
아르투르도 온 힘을 쏟아낸 후라, 힘겹게 미소를 머금었다.
“난 사람 장기를 먹는 취향은 없어서 말이다. 야만족이 아니거든,”
“하하하… 그래. 승자가 패자의 것을 취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거늘, 그것을 끝까지 거부하겠다면,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잊지 마라. 모든 살아있는 자는 패자의 시체 위에 살고 있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살인자의 후예라는 것을 말이지. 그것을 알게 될 때, 너 역시 우리와 함께 하게 되겠지. 우리는 사냥꾼이니, 먹잇감들과 같지 않아,”
푸후니크는 재차 입에서 피를 토해내, 그의 발 앞에 수북하게 고인 피의 웅덩이를 가득 채웠다. 숨을 헐떡거리는 그를, 아르투르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너희 북구인들은 그렇게 믿겠지. 하지만 내 검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네가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싸울 이유도 없었을지도.”
“아니, 우리들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더 크고, 먼, 오래된 존재들의 싸움의 일부분이니까. 너희들의 신과 우리들의 신이 세상의 섭리를 두고 싸웠고, 아직 그 결말이 나지 않았지. 너는, 너희들의 신에게 첫 승리를 가져다주었구나. 자랑스러워하거라.”
푸후니크는 앞으로 쓰러지며, 숨을 헐떡였다.
“나는 실패했지만, 나의 형제들이 너를 처단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을 되돌려놓으리라. 문명이란 위선을 벗어던지고, 너희를 해방시켜주겠지. 종말의 선고자시여! 제가 당신께로 갑니다!”
아르투르는 빛의 검을 높이 들어 올려서 푸후니크의 목에 내리쳤다. 잘려나간 그의 목이 바닥에 뒹굴었다. 자신에게 튄 용의 피는 뜨겁기 그지없었고,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아르투르를 무너뜨렸다.
눈앞에서 맥동하는 용의 심장을 보며, 아르투르는 눈이 감겨왔다. 검이 가진 치유의 빛은 더 이상 발휘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힘을 쓴 까닭이리라. 아르투르는 자신이 늑대밥이 되거나, 얼어 죽지 않기를 바라며 졸려오는 눈꺼풀에 굴복했다.
***
아르투르가 의식을 잃을 때,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한 강대한 존재가 그의 혼을 잡아끌었다. 순간, 몸과 분리된 아르투르의 정신은 하늘로 드높이 올라갔다. 자신이 손 써볼 시간도 없었다. 그의 의식은 눈꺼풀이 깜짝 할 만한 사이에, 수많은 산과 들을 지나고, 끝없는 망망대해를 건너, 세상의 북쪽 끝으로 소환되었다.
그의 의식은 바다의 끝에 있다는 세상의 낭떠러지에 와 닿았다. 그곳에는 어떤 산 자도 목격한 바 없던, 외딴 화산섬이 있었다. 하늘까지 와 닿는 태고의 산맥에서, 아직도 거대한 화산들이 맥동하고 있다. 바다로 흘러내리는 수많은 용암과 모든 하늘을 가리는 화산재, 검은 연기들은 흡사 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아르투르의 의식은 섬의 지하 속으로 붙잡혀 들어갔고, 잠깐 사이에 수많은 공간을 지나쳤다. 영혼만 남은 전사들이 영원한 싸움을 하고 있는 투쟁의 벌판이 보였고, 산맥 아래 잠든 기괴한 괴수들을 보았다. 머리가 세 개 달린 사냥개, 사자와 독수리를 합쳐 놓은 혼종, 입에서 불길을 내뿜는 잿빛 말들.
실존조차 믿지 않을, 가공할 공포의 존재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르투르의 의식을 멈춰 세운 것은, 그런 괴수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흑색 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산이었을까? 성채였을까? 아르투르는, 혹은 어떤 산 자도 일찍이 보지 못했을 거대한 존재.
똬리를 틀고 움츠려 든 도마뱀이었다.
자신을 한낱 미물을 보듯 내려다보는 심연의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생명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터이다. 양 옆으로 뻗은 하늘을 가리는 웅장한 날개와, 가시가 박힌 육중한 꼬리, 필멸자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덩치.
용이었다.
신화에서 종말을 불러오는 괴물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간을 구원한 구세주만이 무찌를 수 있었다는 마물.
지금, 그 마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빛의 성검을 지닐 최후의 주인이구나.”
용의 목소리는,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지진파와 같이 느껴졌다. 위엄 있는 남성 군주의 중후한 목소리처럼도 들렸다. 아르투르는 모든 의지를 쥐어짜내, 간신히 그 눈빛을 마주봤다.
시선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혼절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 존재는 어쩌면, 단순히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반면, 그는 자신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마냥 흥미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듯 내려보고 있었다.
“나는 최후의 용이오, 문명에게 종말을 선고할 자, 안칼라타르이니라. 내가 너의 영혼과 검을 취하라고, 아들을 보냈지. 하지만 너는 그 시련을 이겨냈구나.”
“다음에는 -”
혼신의 힘을 다해, 이끌어낸 의지가 말을 한다.
“좀 더 강력한 부하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 나를 죽이기엔 조금 모자라더군.”
아르투르의 말에, 안칼라타르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내려 아르투르를 마주 보았다.
“배신자 발타리아의 검이 너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일개 인간에 불과한 네가 어찌 나를 마주볼 수 있겠느냐?”
아르투르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용을 마주봤다.
“어찌하여 날 부른 것이냐?”
“네가 나의 사자를 죽였으니, 인간들은 마땅히 그에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했겠지. 그러니, 네가 나의 전령 노릇을 하거라. 세상의 종말이 깨어났으니, 세계는 멸해질 것이고, 모든 것은 태고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일찍부터, 우리 용들이 예언해온 바다.”
용은 서서히 머리를 때면서, 아르투르를 마주봤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는 하등 생물에 불과하던 너희에게 지성을 주었고, 우리를 섬기게 하였다, 그러자, 너희 인간들은 오만에 빠져서, 우리의 말을 거역하고 문명을 일구어냈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거늘, 그 당연한 것조차 잊고, 우리에 대한 숭배조차 잊어버렸지. 그래서 우리는 너희를 멸하기로 했다.”
아르투르는 침을 꿀걱 삼킨 채, 용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 중, 지나치게… 피조물들과 친해진 자들이 있었지. 우리들 중 가장 강력한 자이던 발타리아와, 엘라카르시스가 우리를 배신했다. 그들은 스스로 타고난 강인함을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을 취해 너희를 도왔고, 덕분에 너희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 하지만, 발타리아도 결국 나의 손에 죽고 말았지.”
용은 당시의 배신감을 회상하자 불쾌한 지,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내가 돌아왔노라. 나는 동족들이 끝내지 못한 것을 이뤄낼 것이다. 인간들은 문명을 버리고, 도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렇게 해서, 세상은 태초에 있던 모습대로 돌아가리라. 그것이 종말의 선고이며, 내게 엮인 운명이노라.”
“네가, 그렇게 하게는 두지 않을 것이다. 구세주가 없다고 한들, 우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어.”
아르투르의 힘찬 목소리에, 용은 그저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말이냐? 발타리아는 죽었고, 엘라카르시스는 힘의 대부분을 잃고 사라져가는 존재가 되었다. 너희의 편을 들어줄 신은 한 명도 없노라. 너희들이 가진 것은 단 하나, 배신자 발타리아가 남긴 검 한 자루 뿐이지.”
용은 치명적인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내보인다.
“돌아가라, 돌아가서 세상에 종말을 전하거라. 이미 결과는 정해져있고, 운명은 되돌릴 수 없다. 최후의 용으로서, 종말의 선고자가, 안칼라타르가 돌아왔음을 선포하노라.”
***
옛 신의, 용의 힘이 담긴 선고가 끝남과 동시에, 아르투르의 의식은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떠보니, 화창한 날씨와 밝은 태양이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푸후니크와의 싸움이 끝난 후 기절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푸후니크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는, 용의 심장만이 남아있었다. 넘쳐흐르던 피의 웅덩이나 뼛조각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그 심장을 불길하게 여겨, 여러 차례 빛의 검으로 내리쳐봤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을 보고,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아르투르 경! 깨어나셨군요! 괜찮으십니까?”
그 때, 품에 장작을 가득 안고 오던 에렌이 보였다.
“그래. 일어났네. 난 건강하네. 괜찮아.”
아르투르는 여전히 꿈속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어,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이 본 것이 거짓이 아니었을까? 잊혀진 옛 신이, 용이 우리가 믿는 바를 멸하러 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 나도 모르겠네. 우리가 잊고 지내던 것들이 돌아올 모양이야. 여러 불길한 징조가 있었고,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있었지.”
아르투르는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빛의 검을 지지대로 삼아 몸을 일으켰다. 용의 심장은 에렌이 데려온 에쿠잘루스의 짐에 실었다.
“일단 산을 내려가지. 레무리아에 도착하면, 신화와 전승에 해박한 자를 찾아보아야겠어.”
그 뒤, 아르투르 일행은 백색 산맥을 내려갔다. 아르투르의 마음은 산을 올라올 때보다 더 복잡하고, 무거운 심경이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과, 수용하기 어려운 공포를 품은 채, 아르투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