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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58화 (5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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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나리, 제 딸이 그렇게 음식을 잘합니다. 두라노에 도착하면 저희 집으로 꼭 모시겠습니다!”

아르투르가 에렌을 구해준 후, 두 사람은 동행인으로서 백색 산맥을 넘었다. 에렌은 처음에는 아르투르를 어려워했지만, 말을 트게 되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어디서 온 누구이며, 무엇을 했고, 어려서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까지.

“제 이름은 에렌 아길라르. 자유도시 두라노에서 일하는 갑옷 장인입니다.”

“그런데 장인이 어쩌다가 산맥에서 길을 헤매고 있게 된 건가?”

“중개업을 참주가 독점 중이라서, 그 자의 눈 밖에 난 자는 제대로 된 값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든 갑옷을 직접 팔러 백색 산맥을 넘어 도파뉴 백작령으로 다녀온 것입니다.”

에렌은 쉼 없이 말을 계속했다.

“세 왕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터라, 질 좋은 갑옷에 대한 수요는 많았습니다. 덕분에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었고, 때마침 두라노로 향하는 상단이 있어서 동행하기로 했죠. 그렇게 해서 겨울에 이 백색 산맥을 넘게 된 겁니다.”

아르투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돈도 부족하지 않을텐데, 왜 겨울에 산맥을 넘는 위험한 일을 한 건가? 통행료를 좀 내더라도, 안전한 통로들을 이용하지 그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렌.

“영주들의 통행세 요구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거둔 이윤의 절반을 통행세로 내야 할 판입니다. 그렇다고 눈이 녹는 내년 봄까지 기다렸다간 부채가 늘어났을 것이고요.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부채라? 그건 무슨 말인가?”

아르투르는 회계에는 그리 밝지 못했다. 정확히는, 돈놀이는 귀족들의 관할 사항이 아니었다.

“아, 빚 말입니다. 레무리아에서 어지간한 상인들은 은행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려면 목돈이 필요한데, 평범한 시민들에겐 그런 큰돈은 없으니까요. 부유한 자들에게 돈을 빌리고, 그 대신 이자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이자가 쌓이는 걸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빨리 돌아가고자 산행을 택한 것이죠.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상환할 수 없으면 몸으로 갚아야죠. 가족들과 함께 노예로 팔려가거나, 다른 방법으로 빚을 갚아야합니다. 하, 돌아가도 문제군요. 당장 제가 돌아가면 자녀들을 노예로 팔진 않겠지만…. 일하는 족족 돈을 모두 빼앗길 겁니다.”

아르투르는 에렌의 목소리에서 깊은 한숨과 절망을 느꼈고, 동정심을 느꼈다.

“그렇다면 일행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아… 그것이….”

에렌은 말하기를 머뭇거리다가, 말을 잇는다.

“제가 산행 도중 쓰러지자, 제 짐을 빼앗은 뒤 내버려두고 떠나더군요. 동향 사람이라서 믿었는데 말입니다. 그들 중엔 제가 친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제가 죽을 사람이니, 돈은 필요 없을테니 자신들이 가져가겠다고 하더군요.”

아르투르는 표정을 찌푸렸다.

‘백색 산맥 북쪽이나, 남쪽이나 힘 있는 자들이 한다는 짓은 비슷하군.’

사생아로 태어나 왕자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삶을 한탄해왔건만, 세상에는 그보다 억울한 사정을 가진 이들이 가득해보였다. 자신이 혹시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

자신이 구매한 지도에 따르면, 이곳에서 얼마간 나아가면 버려진 성터, 겨울성이 있었다. 겨울성은 백색 산맥을 건너는 여행객들이 꼭 들르는 휴식처였고, 자신도 그곳에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 뒤에, 산에서 내려가면 시간에 맞춰 에렌을 두라노에 데려다줄 수 있으리라.

한창을 걷던 중, 눈보라가 약해져서 시야가 트였다. 그러자 아르투르의 눈에는 험준한 언덕에 자리 잡은 오래된 백색성이 보였다. 눈으로 뒤덮인 성벽은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오랜 여정에 지쳐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쉴 수 있으리란 기대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들은 무릎까지 쌓인 눈더미를 뚫어가며 겨울성으로 향했다.

무너진 성에 도착하자, 반으로 조각난 성문이 보였다. 성벽은 정교하게 절단된 바위로 만들어져 있었고, 어떤 흠집도 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단 몇 년 만 방치하더라도 본 모습을 잃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건축물이건만, 겨울성은 고고한 자태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입구에 도달하자,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더미도 이미 다 치워져있었고, 수레바퀴와 발자국이 눈 위에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자네의 옛 동료들이 먼저 왔나본데.”

에렌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살아 돌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겠죠.”

“그렇겠지. 자네의 돈과 짐을 돌려받을 때가 되었군. 기꺼이 도와주겠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나으리!”

아르투르는 앞장서서 에쿠잘루스를 이끌며 성의 안뜰로 들어갔다. 성의 첨탑이며, 내성, 방어 탑들은 세월이 하나도 흐르지 않은 것처럼, 우뚝 서서 그를 맞이했다. 겨울성은 옛 레무리아 제국의 마법사 황제들이 지은 성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아르투르는 그 말이 맞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풀 한포기 나지 않는 이 험준한 산 위에, 어떻게 성을 짓고, 그게 아직까지 남아있겠어?’

아르투르는 본디 전설이나 신화를 단순한 미신이나, 옛 설화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종교도 진지하게 믿지 않는 마당에,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전설 속의 성검을 가졌다는데, 마법사가 있다고 한들 놀랄 일은 아닐 터이다.

그들이 안쪽으로 나아갔을 때, 아르투르는 코를 찌르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지독한 피비린내였다.

그와 함께, 짐승들의 요란한 식사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악스런 물체가 고기를 잡아 뜯고 씹으며 토막 내는 소리였다. 마치 그에 반응하듯, 허리춤의 검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이건 검이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하이에버에서 시작되어 그 뒤로 위험이 있을 때마다 검은 빛을 내어 경고를 보냈다. 보통 빛의 세기가 강할수록, 위험도 강하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빛이 강렬했고, 아예 검이 진동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주저하지 않고, 황금의 검을 뽑아냈다. 눈보라 치는 어둠 속에서, 광휘가 퍼져나가며 빛의 검이 번득였다.

“자네는 에쿠잘루스와 이곳에서 기다리게.”

에렌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제가 한 손이라도 보태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냐. 방해만 될 걸세. 여기 있게나.”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아르투르 경.”

아르투르는 검의 빛을 등불로 삼아,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피 냄새가 짙어졌고, 황금의 검의 빛은 강해졌다. 성의 안뜰로 들어오자, 황금의 빛이 어둠을 걷어내며 잔혹한 풍경을 드러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따끈따끈한 붉은 피를 흘리는 시체들이 가득 있었고, 늑대들은 그것을 포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무기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항이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 소용도 없던 것 같지만.

이 늑대들은, 일반적으로 산에 사는 놈들이라기엔 너무 컸다. 살면서 부왕을 따라 수많은 사냥터를 다녔지만, 이런 종류의 늑대는 본 적도 없었다. 사자나 호랑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늑대들은 인기척을 인식하고,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검의 빛이 닿자 불에 데이기라도 한 양 기겁하며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놈들은 검의 빛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컹-! 컹 -! 컹 -!

아르투르는 늑대들의 울부짖음을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늑대들은 자신을 둘러쌌지만, 자신이 의지를 발하자 황금의 검은 더욱 넓은 영역을 비추었고, 그들은 서둘러 도망쳤다.

아르투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서진 짐마차들이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살해당한 열댓 명의 사내들이 널 부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자신에 비견할만한 체격을 가진 뿔투구를 쓴 사내가 짐마차를 뒤적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곧장, 그에게 황금의 검을 겨누었다. 사내는 뒤로 돌아 자신을 바라봤다.

상대는 양옆으로 뿔이 난 투구를 쓴 다부진 전사였다. 그는 징 박힌 가죽 갑옷 위에 사슬을 걸쳐 입고 있었으나, 어깨와 허벅지엔 어떤 무장도 하지 않은 채 근육질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등에는 거대한 전투 도끼 두 자루가 교차하며 매여져 있었다.

‘뿔투구, 거인 같은 체격, 뺨의 문신까지.’

“북부에서 온 놈인가 보군.”

아르투르가 일부러 북구어로 말을 꺼냈음에도, 그 전사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빛을 내뿜는 검에게 와 닿아 있었다.

“네놈이, 예언이 말하던 나의 운명의 적수구나. 대주술사가 겨울성에서 기다리면, 나의 숙적인 세상의 적을 만나리라 말했다. 네 검이 그 증표로구나.”

상대의 목소리는 아주 두껍고, 진중했지만 동시에 흥분으로 가득차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아르투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네가 이들을 죽인 모양이구나.”

“그래. 가진 걸 모두 내놓고 꺼지라는 데 좀처럼 말을 듣지 않더군. 그래서 다이어 울프들을 풀었다. 직접 죽일 수도 있었지만, 놈들도 식사다운 식사를 해보지 않은 게 오래 되서 말이야. 놈들 중에 여자나, 소년이 없던 게 아쉬워. 몇 달 째 이 산에 처 박혀서 널 기다리느라 통 재미를 못 봤거든.

뿔 투구를 쓴 전사는 고개를 양옆으로 움직이자, 뚜-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르투르가 여태껏 상대해온 자들과 달리, 검의 빛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필헤르딘의 예언자들이 나의 운명을 이르길, 마법사들이 드래곤-신들의 비밀을 훔치던 성에서, 위대한 운명을 완성시킬 자를 만날 것이라고 했다. 네가 빛의 재앙을 가져올 터이니, 그것을 도로 가져와 세상을 구해야만 한다고 말했지.”

전사는 어깨에 메고 있던 도끼를 각각 빼 들었다. 자루는 검은 재질의 나무로 만들어져있었고, 도끼날에는 서슬 퍼런 한기의 기운이 흘렀다. 아르투르는 한 눈에 그의 도끼에도 마법의 힘이 흐르고 있음을 눈치 챘다.

“예언이니 뭔지는 모르겠다만,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 나 역시 약탈자에게 그리 우호적인 편은 못 되고 말이야.

아르투르는 검을 고쳐 잡으며 돌격할 자세를 취했고, 뿔 투구의 전사는 가소로운 미소를 지었다.

“어린 놈이 제 주제도 모르고 죽음을 자초하는군. 약탈자라고 했나? 너희 문명인들은 웃기는 단어를 쓰더군. 강자가, 약자의 것을 취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늑대는 사슴을, 곰은 늑대를 잡아먹지. 그와 같이, 전사는 나약한 자들의 것을 취할 권리가 있을 따름이다.”

“택도 없는 소리! 우린 짐승이 아니다. 싸우는 자에겐 싸우는 자의 몫이 있을 뿐이고, 각자의 의무와 권리가 다를 뿐이야. 강함이라고 했나? 무기를 잘 다루고, 사람을 잘 죽이는 것만을 강함이라고 할 순 없겠지.”

아르투르의 말을 들은 전사는, 땅바닥에 퉤-하고 침을 뱉었다.

“불경한 놈들, 나약한 놈들. 드래곤-신들께서 정해주는 섭리를 거부하는 이교도들! 싸움, 피, 죽음! 오직 투쟁만이 우리의 삶을 이끌며, 자연의 질서에 부합한다. 나약해빠진 너희 세상은, 불타게 될 것이다!”

“너희 북부인들이 섬기는 용들은 그렇게 가르쳤겠지. 하지만 우리 문명인들은 용살자 발타리아를 따른다. 우리는 법과 질서, 그리고 명예와 자비를 따르지. 자, 말이 많구나. 오거라. 네가 도발하는 만큼 강한 지 보자꾸나.”

뿔 투구의 전사는, 아르투르의 말에 광소했다.

“좋아, 좋아! 나, 종말의 선고자, 안칼라타르의 아들이자 그의 대전사인 엘 푸후니크가 너희를 벌하러 왔다. 나는 용의 피가 흐르는 신성한 자이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자들 중 가장 강한 자다! 그림니르의 시조로서, 너희를 벌하리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푸후니크는 단숨에 표정을 바꿨다. 전투의 흥분과 광기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가 양손을 움직이자, 들려있던 전투도끼가 각각 아르투르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네 검을 취하고, 아버지의 강림을 준비하리라!”

아르투르는 날아오는 도끼의 궤적을 보고자 했지만, 너무 빨라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아르투르는 곧장 바닥에 빛의 검을 꽂았고, 타원형의 빛의 보호막이 생겨나 그를 보호해주었다.

쾅 - !

빛의 보호막이 깨져나가자 무언가 폭발한 것과 같은 큰 충격이 발생했고, 아르투르의 몸이 뒤흔들렸다. 아르투르는 곧장 자세를 다잡으며, 푸후니크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타 - 타 - 타 - 닷!

눈밭 위를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아르투르를 보며, 푸후니크는 웃어 보이더니, 앞을 향해 양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문신이 빛이 났고, 그가 던졌던 도끼의 룬문자들이 그에 호응했다.

아르투르는 뒤편에서 들리는 쇳덩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두 개의 도끼가 회전하며 지나갔다. 자신을 지나친 두 도끼는 정확히 푸후니크의 양 손에 쥐여졌다.

아르투르는 일순간 당황했고, 푸후니크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너만 신들의 힘을 담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느냐? 오늘 네 해골에 피를 담아 마셔주마!”

푸후니크가 고함을 지르며, 재차 양손의 도끼를 아르투르를 향해 날렸다. 아르투르는 이를 악물면서 도끼를 쳐낼 준비를 했다. 황금의 검이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며, 겨울성의 밤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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