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밤을 나기 위해 피워둔 모닥불이 장작을 태우며 타올랐다. 아르투르는 케이와 헤어진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갑옷과 무기를 직접 수선하는 번거로운 일을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갑옷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네. 고치려면 번거롭겠군.’
한창 구멍난 흉갑을 땜질하고 있을 때, 지평선 너머에서 먼지 구름과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스물에서 서른 남짓한 기병 행렬이었다.
아르투르는 즉각 오른손에는 황금의 검을, 왼손에는 여명을 뽑아들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진정으로 명예로운 자라면 일찍 죽는 것이 순리였지만, 황금의 검은 세상의 순리에 역행할 수 있는 힘을 그에게 주었다. 명예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아버지는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을 물려주셨다고 하셨지.’
자신삼 있게 걸어나간 아르투르는, 당당하게 기병들을 마주했다. 그들은 거리를 둔 채 아르투르를 포위했다. 칼과 창, 석궁과 활로 무장한 기병들은 모두 잘 훈련된 전문 군인들이었다.
아르투르는 흉갑을 입을 시간이 없어 팔과 무릎 보호대 정도만 착용했다. 황금의 검이 없다면, 이런 공격에 맞서서 홀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기병들도 검의 힘을 아는 지,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투사 무기를 겨눈 채 명령을 기다렸다. 곧, 그들 사이에서 갈색 군마를 탄 거구의 기사가 나왔다. 그의 체구는 햇빛을 가리고 있어서 마치 태산처럼 거대해 보였다. 그의 투구 속에서 두꺼운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하이에버의 도살자, 아르투르 경인가?”
“하이에버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던 자라면 내가 맞소.”
“제대로 찾았군. 나는 폴크마르 백작이오. 당신이 죽인 하인리히 백작의 동생이지. 형님의 원한을 갚으러 왔소.”
“공포공 하인리히는 정당한 결투 중에 죽었소. 당신에겐 유감이지만 나의 잘못이 아니오.”
“맞는 말이오. 그대가 잘못한 건 없지. 단지 나 역시 그의 동생으로서 복수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뜻대로 하시오. 첫 공격은 내어드리리다.”
폴크마르가 손짓을 하자, 기병들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말에서 내리며 종자가 건네주는 거대한 검을 받아들었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만 한 길이의 검이었다. 폴크마르 백작 같은 거한이 아니면 휘두르지도 못할 것이오.
“아르투르 경,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요. 기사로서 정정당당히 기량을 겨뤄 누구의 뜻이 옳은지 가립시다. 도망쳐서도 안 되고, 비열한 수단도 아니 되오.”
불필요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으리란 생각에, 그의 제안이 반가웠다.
“결투를 받아들이시오. 나의 명예를 걸고 응하리라.”
“좋소. 갑옷 입을 시간을 드리지.”
폴크마르는 직접 아르투르가 흉갑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고, 갑옷의 착용이 끝나자 투구를 건네주었다. 아르투르는 선뜻 투구를 받아 착용한 후, 황금의 검을 도로 검집에 넣었다.
아르투르는 하이에버를 떠난 이후에도 황금의 검을 사용할 기회가 여러 차례 왔었다. 여러 귀족 가문들의 추격대가 쫓아왔었고, 전부 쓰러뜨렸다. 몇 차례 피바다를 만들고 나자, 검의 힘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경고가 무엇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상처를 치유시켜주고, 방패와 갑옷을 종이처럼 갈라버리는 검이라니.
그래서 아르투르는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 비겁자들이나, 악당들에게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되, 존중할 한 적에게는 스스로의 무용에 의존해서 싸우기로 했다. 황금의 빛은 오직 그것이 사용될 만한 싸움에서만 빛나야 했다.
‘폴크마르 백작은 명예를 아는 자이니, 그에 걸맞게 상대해주는 것이 옳겠지. 만약 그가 다짜고짜 부하들과 공격해왔다면, 기꺼이 성검의 힘을 빌렸을 테지만.’
갑옷 착용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물러섰다. 폴크마르는 오른쪽으로, 아르투르는 왼쪽으로 걸으며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의 발걸음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 작은 부주의가 죽음을 부를 수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르투르였다. 그가 왼편으로 접근하자, 폴크마르의 거검이 공기를 가르며 신속하게 날아들었다. 여명을 쥐어 공격을 받아냈지만, 거검에 담긴 폴크마르의 힘은 아르투르를 몇 발자국 밀어냈고, 그때마다 아르투르가 취한 방어 자세가 흔들렸다.
아르투르가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폴크마르는 그 틈을 타서 잇달아 맹공을 가했다. 일방적인 공격의 연속이었다. 여명은 부서지지 않는 명검이었지만, 폴크마르의 거검에 비해선 크기도 작고 무게도 가벼웠다. 검이 부딪히는 굉음이 발생할 때마다 아르투르는 밀려났다.
‘이대로면 당하겠군.’
폴크마르의 거검이 상체를 향해 재차 날아왔다. 아르투르는 상체를 앞으로 깊이 숙였다. 투구 일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갔고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가 다시 거검을 거둬들이는 틈을 타서, 아르투르는 그의 앞으로 달려가 목을 향해 여명을 휘둘렀다. 폴크마르는 거검을 손에서 놓으며 건틀렛을 착용한 오른손으로 여명을 잡아냈다.
아르투르는 거칠게 여명을 그의 손아귀에서 빼 들었고, 폴크마르의 오른편으로 들어가 회전했다. 갑옷이 빈약한 그의 허벅지를 베자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폴크마르는 고통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고함을 내지르며 왼손으로 그를 잡으려 들었고, 아르투르는 재빨리 뒤로 굴러 피했다.
폴크마르는 허리춤에 매던 장검을 뽑아 바닥에 앉아있는 아르투르를 향해 내리쳤다. 아르투르도 여명을 들어 올려 그것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양손에 힘을 집중시켰다. 두 자루의 장검이 서로 부딪히며 강렬히 흔들렸다.
“크으으으으….”
“으아아아아!”
두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충돌했음에도, 역량이 비등하여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폴크마르의 일격이 더 강했고, 아르투르의 손목이 후들거리며 여명이 밀려났다.
쩌저적 -
그때, 폴크마르의 장검이 금이 가더니 부러져버렸다. 평범한 강철검은 두 괴력의 기사가 가하는 힘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아르투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명을 아래로 내렸다.
“무기를 바꾸시오. 검의 강도로 결투의 승자가 결정되어선 아니 되오.”
폴크마르도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종자가 내미는 새로운 장검을 받아들었다. 아르투르는 도로 그에게 여명을 겨누었고, 그가 공격해오길 기다렸다. 폴크마르는 앞으로 두 걸음 내디디며 장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오른쪽 허벅지의 상처가 커지기 시작해 발걸음이 느려졌었고, 그사이에 공격이 모두 읽혔다. 아르투르는 간단히 피한 후, 이번엔 그의 왼쪽으로 들어가 왼쪽 허벅지를 베었다. 결국 양측의 허벅지가 모두 칼날에 베이자, 그의 괴력조차 서 있게 하지 못했다. 폴크마르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때마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어느새 여명의 차가운 날이 그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아르투르는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더는 나를 적대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할 수 있소?”
폴크마르는 소리를 내어 웃는다.
“기사라면 죽음 앞에서도 진실만을 말해야하오.”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소.”
여명이 폴크마르의 목구멍을 뚫고 나왔고, 그의 숨이 넘어갔다. 목에서 피를 콸콸 흘렸고, 몸을 들썩이다가 숨이 멎었다. 폴크마르의 가신들은 고개를 숙여 그의 마지막 여정에 경의를 표했고, 몇몇은 무기를 뽑아 아르투르를 겨누었다. 그때, 폴크마르의 종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두십시오. 결투의 승자는 아르투르 경이고, 우리는 그를 해칠 권리가 없습니다. 아르투르 경. 이제부터 폴크마르 경의 장비는 경의 것입니다.”
울먹이며 말하는 폴크마르의 종자를 보며, 아르투르는 그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기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들 중 주군의 복수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지금 결투를 신청하라.”
그러나 부하들은 오직 침묵만을 유지했다.
“나는 언제나 명예로운 적수를 존중한다. 그의 장비는 그의 후계자에게 전해주어라. 후계자가 없다면, 종자인 네가 물려받는 것이 좋겠다. 그럼.”
아르투르는 기병 사이를 해치고 에쿠잘루스에게 돌아갔고, 폴크마르의 부하들은 주군의 시신을 수습해 석양 너머로 도로 떠났다. 그 모습을 보는 아르투르의 기분은 찝찝했다. 차라리 폴크마르가 부하들과 함께 습격해왔다면 마음은 편했으련만.
저무는 석양의 빛깔처럼, 자신의 길은 피로 가득해 보였다. 자신이 믿는 명예를 위해, 자신은 많은 목숨을 뺏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원한을 감당해야만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증오를 사게 될 것인가.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자신이 가야할 길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 때, 황금의 검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이 검이 내 명예의 상징이라고 했지.’
검의 빛을 본 아르투르는 잡념을 떨치고, 새로운 야영지를 찾아 길을 떠났다. 폴크마르 경을 죽인 자리에서 잠들기엔 후련치 않을 것 같았다. 눈앞에 백색 산맥이 보였다. 저곳을 지나면 레무스 제국이 흥기했던 레무리아 반도가 나오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아발로니아로 갈 생각이었다.
자신의 고민에 대한 해답도, 자신이 궁금했던 것들도 호수에 도착하면 답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
일 년 내내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험준한 산맥은 백색 산맥이라고 불렸다. 레무리아 반도와 서부 대륙의 나머지 영토를 나누는 경계인 이 길은, 여섯 도시들과 데네토르의 국경선이기도 했다.
매년, 수많은 여행자와 상인들이 이윤을 찾아 산맥을 넘어 다녔다. 보기에는 아름다운 산이건만, 여행자들에겐 이만한 위험이 도사리는 곳도 드물었다. 안전한 통로들은 영주들이 독점하고 있어, 통행료를 내면 남는 것이 없는 영세한 상인들은 결국 산을 타야만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며 시야를 방해했고, 살을 에는 추위가 내려앉은 이곳을, 누구나 무사히 건너는 것은 아니다. 두툼한 방한복을 입은 채 눈밭 위에 쓰러져 있는 사내는, 미쳐 산맥을 넘지 못한 불운한 자들 중 하나였다.
‘겨울 산행은 바보 같은 일이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는 이미 손과 발에서 감각을 느끼지 못했고, 이마는 열이 올라 솥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남아서 최후를 기다리는 것.
고향, 두라노에 있는 어린 자식들이 떠올랐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들에게 자신이 돌아가지 못하면, 남은 건 노예의 예속뿐이리라.
‘렌조, 아가타. 미안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지 못할 것 같구나.’
회한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차라리 교회에 자녀들을 위탁했어야하나?’
참주의 폭정 때문에, 처신을 잘못한 어리석은 아버지를 둔 것 때문에, 그의 자녀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수모를 생각하면 차마 잠들 수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었다.
‘비싼 통행료를 물더라도 영주들의 길을 이용할걸, 아니면 차라리 겨울이 그치기를 기다리다 봄에 돌아갈걸.’
후회는 늦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저히 살아나갈 방법이 없던 것이다. 그 때, 눈밭 위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풀썩이는 소리가 들렸다. 에렌은 혹시, 자신을 두고 간 동료들이 돌아왔나 싶어 기대하며 눈을 떴다.
그의 눈이 마주친 것은, 번득이는 야수의 눈동자였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커다란 대장 늑대.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늑대 무리. 일찍이 본 적 없이 커다란 놈들 이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놈들의 밥이 되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대장 늑대가 다가와 그의 얼굴을 핥아보고는,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에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깨겡 - !
무언가 날아들었다.
창이 놈의 아가리를 꿰뚫더니, 대장 늑대는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져버렸다. 입천장을 뚫고 나온 창을 빼려고 발버둥 치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창을 던진 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장신의 사내였다.
다른 늑대들은 눈보라 속에서 나타난 장신의 사내를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컹 - 컹 - 컹 - 컹 !
사내는 능숙하게 검을 양손으로 쥐고, 달려드는 늑대들을 맞이했다. 검이 번득일 때마다, 늑대가 한 마리씩 반으로 갈려 죽었다. 사내가 빙글 돌면서 빛의 칼날을 회전시키자, 달려들던 세 마리 늑대의 목이 날아갔다. 칼날을 몇 번 더 휘두르자, 늑대들은 토막이 나서 흩어졌다.
한 마리 늑대는 운 좋게 뒤에서 습격해 사내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사내가 왼손으로 놈의 턱주가리를 후려치자 턱이 돌아갔다. 사내가 재차 주먹을 날리자 늑대의 이빨이 조각나 흩어졌고, 세 번째로 얻어맞자 두개골이 깨지고, 눈알이 튀어나와서 죽어버렸다.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는 자신에게 다가왔다. 두꺼운 산양 가죽으로 된 망토를 입은 금발의 기사였다. 뒤편에선 육중한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있는가?”
중후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건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늑대 밥이 되는 것은 면했지만. 여기까지군…’
에렌의 의식이 끊기기 직전, 금발의 사내가 자신의 검을 자신의 이마에 댔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검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에렌의 몸을 휘감았다. 빛은 무척이나
따뜻해서 자신의 몸을 휘감았다. 괴사했던 피부가 되살아나고, 멈추었던 피가 돌았다. 아득하던 정신도 멀쩡해졌다.
“무, 무슨, 천사라도 되십니까?!”
청년은 유쾌하게 웃었다.
“지나가던 기사일 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