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황금의 검이 빛을 발하자 겁이 많은 자들은 미지의 힘에 공포를 느끼며 도망갔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을 비롯한 주요 인원들은 남아있었다. 도망가기에는 아르투르의 목을 가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컸다. 그들의 기다림에 부응해 아르투르를 감싸고 있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빛이 사그라들자 보인 것은, 그들의 기대는 배신하는 것이었다. 상처 한 점 없는, 모든 부상이 아문 아르투르가 빛 속에서 나타났고, 그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황금의 검의 검집 속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아르투르는 크리스티안을 한번 노려보고는, 빛의 검을 뽑아들었다. 광원이 줄어들어 오직 검신에만 빛이 흘렀다. 그 광경을 본 적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행동을 멈추었지만, 크리스티안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한 놈이야! 석궁 쏴!”
넋 놓고 있던 석궁수들이 탄환을 발사했다. 아르투르가 검을 앞으로 내밀자 빛의 방패가 형성되었고, 탄환들은 힘없이 튕겨서 바닥에 떨어졌다. 아르투르는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며, 번쩍이는 빛의 검을 내리쳤다.
크리스티안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빛나는 검은 방패를 가른 후, 투구를 부숴버리며 닿는 모든 것을 절단했다. 빛나는 검은 뼈와 근육, 장기들이 엉겨 붙는데도 전혀 느려지거나 멈춰서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머리부터 사타구니에 이르는 부위에 줄이 하나 그어지더니, 둘로 쪼개져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쓰러졌다.
형제단원들은 등을 돌려 도망쳤지만 아르투르는 그들을 추격해 모조리 죽였다. 용감히 싸우다 항복한 적이 아닌, 신의를 저버린 배신자들에겐 관이란 없었다.
마지막 한 사람, 크리스티안의 종자가 몸을 덜덜 떨면서 케이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케이는 그가 떠는 틈을 타서 날렵하게 빠져나와, 그의 사타구니를 걷어찬 후 안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단검을 뽑아 그가 마무리하려던 차에, 아르투르가 케이를 제지했다.
“아직 열다섯 살이 지나지 않았다. 책임을 묻기엔 너무 어린 나이야. 그의 마스터의 잘못을 그에게 묻지 말거라.”
“하지만… 살려두면 복수를 하러 올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때 가서 상대해주면 될 일이다. 가자. 시간이 없다.”
아르투르는 쓰러진 크리스티안의 종자를 내버려두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케이는 아르투르의 상처가 재생되고 피가 멎은 것을 보며 놀라워했다.
“마스터? 어떻게 된 거에요?”
“빛나는 검의 주인을 만났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해주마.”
광장에 도착하자, 레오폴트와 검은 기사들이 중앙에 몰려있고 란트레서 가문의 창병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기다릴 것 없이 창병들이 가장 밀집된 곳으로 자신의 몸을 날렸다.
“덤-벼-라!”
창병들은 황급히 창날을 내려 아르투르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르자 대여섯의 창대가 깔끔히 잘려나갔다. 창병들 사이로 아르투르가 파고들어 빛나는 검을 휘두르자 핏빛 폭풍이 일어났다. 사람의 잘려나간 신체와 부서진 갑옷 조각, 부러진 무기들이 휘날린다.
남들에게는 아르투르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번쩍일 때마다 서넛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으로 보였다. 검, 저것을 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분명 인간의 무기는 아니었다. 갑옷을 종이처럼 자르고, 아무리 피를 묻혀도 녹슬지 않았다. 그런 무기가 역전의 기사에게 손에 들려있으니,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모여서 한꺼번에 공격해!”
그럼에도 보병 지휘관들은 병력을 모아 반격에 나서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무용만 믿고 날뛰는 얼간이들을 침착하게 지휘해서 쓰러뜨린 적이 많았고, 이번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살 행위였다.
단숨에 밀집 방진 속으로 도약한 아르투르는 지휘관을 반으로 갈라 죽이고,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검을 휘둘렀다. 한 개의 대형이 통째로 전멸했다. 검의 궤도에 있으면 그것이 몇 명이건, 갑옷을 입었건 입지 않았건 모두 한 번에 죽었다.
“도망쳐라! 살고 싶으면 도망쳐!”
이 광경은 잔인한 싸움을 이골이 나게 한 북부 군조차 공포에 질리게 했다. 어떤 의미 있는 저항도 해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니, 도망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원수를 갚고 싶었지, 개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도망치는 북부군 병사들의 뒤로, 스무 명에 달하는 완전히 무장한 기사들이 달려왔다.
“하! 역시 평민들은 겁이 많군! 우리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주마!”
아르투르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정면으로 돌격해 맞섰다. 아르투르가 선봉의 기사에게 빛의 검을 휘두르자, 그도 검으로 받아쳐 맞서려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빛나는 검은 적의 검을 동강 내고, 그대로 내려가 갑옷과 뼈도 갈라버렸다.
다른 기사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분명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일격에, 그것도 상체가 잘려죽었다. 이건 상식이 붕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본능적인 전투 경험을 살려 아르투르를 둘러싸고 맹공을 가했다.
아르투르는 제 자리에 서서 공격해 들어오는 공격을 살폈다.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좋았기에, 무기가 날아올 예상 경로가 모두 보였다. 아르투르는 그곳을 모두 지나칠 수 있게, 빛나는 검을 한번 휘둘렀다. 창대를 베고, 검을 부수고, 한번 빛이 번쩍일 때마다 수많은 것들이 잘려나갔다.
그가 몇 차례 반복하자, 아르투르를 상대하던 기사들은 모두 주 무장을 잃었다. 막대기만 남은 전투 망치, 자루가 없는 도끼, 부러진 칼을 지닌 그들은 즉각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했다.
아르투르의 주변에는 절단면이 깔끔한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다. 그에게 생겨난 상처는 얼굴에 긁힌 것이 전부였으나, 그나마도 순식간에 치유되어 없던 상처처럼 되었다.
레오폴트와 검은 기사들은 멍하니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홀로 전장을 지배하는 아르투르의 은빛 갑옷은 피로 가득 물들어있었지만, 그의 손에 걸린 황금의 검은 그토록 많은 목숨을 뺏어놓고도 얼룩 한 점 생기지 않은 채 고고히 빛났다.
“…믿기지가 않는군.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
그의 종자, 막시밀리안도 넋 놓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같은 걸 보고 있습니다. 마스터. 저 검은 대체….”
아르투르는 호흡을 바로 잡으며, 레오폴트에게 걸어갔다.
“좋아. 여긴 끝이 났고, 가자.”
“…도망치는 계획은 전면 수정이냐?”
아르투르는 검집에 빛의 검을 도로 넣었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성 내를 바라봤다.
“이제 도망 칠 필요가 없겠어. 나로부터 시작된 소란이니, 내가 마무리 할 생각이다.”
***
아르투르는 폭동을 벌이던 군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은 아르투르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영해주었고, 그는 경비대와 군중을 중재하여 더 이상의 사망자를 막았다. 물론 모두가 아르투르의 말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물러나라니! 폭도들에게는 이 기회에 본때를 보일 것이오! 방해하지 말고 비키시오!”
경비대장은 두 집단 사이의 충돌을 가로막는 아르투르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아, 그런가?”
아르투르는 대답을 하며 빛을 내뿜는 검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투구 앞쪽과 갑옷이 쩍 - 하고 쪼개졌고 그의 볼에서 피가 흘렀다.
“더 할 말이 있나?”
경비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고, 강경하게 진압하려던 기사들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성의 혼란은 빠르게 잦아들어 갔다. 란트레서 가문 병사들과의 전투가 몇 차례 있었지만 일방적이었고, 아르길락 영주는 사태가 더는 번지지 않기를 원했기에 적극적으로 병력을 투입해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피가 흐를 대로 흘렀다. 손님들을 보호하지 않은 그의 행동은 아르길락 가문의 씻을 수 없는 오명이 될 것이었다.
사태가 마무리되자,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와 함께 란트레서 가문의 진영을 찾아가 싸움의 승자로써 항복을 받았다. 늙은 늑대는 항전하고자 했지만 병력도 얼마 없었고, 부인과 가신들이 말렸다.
그는 자기가 직접 손도끼를 들고 달려갔다가, 단숨에 오른팔이 잘려나가며 무릎을 꿇었다.
“저주받을, 저주 받을 놈! 어디서 악마의 무기를 가져와서는…”
란트레서 공작은 분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봤다. 늙은 늑대를 바라보는 아르투르의 시선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실로,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자였다. 아르투르는 그의 행동을 일갈해 지탄하려다가, 이미 절망에 빠진 늑대의 눈과 두려움에 떠는 그의 가신들을 보며 뒤돌아섰다.
“흠? 내버려둘 건가?”
레오폴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이미 충분히 많은 피가 흘렀다. 늙은 늑대는 이미 충분히 대가를 치렀어. 눈앞에서 세 아들을 잃었고, 오른팔까지 잃었지. 도적이나 할 법한 급습도 자행했으니 가문의 위신도 급격히 추락할 거야. 원하는 게 있다면 네가 알아서 받아내라. 난 관심 없다.”
일이 정리되고 나자, 숙부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검은 군단이 성 내로 진입했다.
‘숙부는 숙부의 계산이 있었겠지. 하지만 내가 혼자서 란트레서 가문을 제압한 건,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일 것이고.’
하지만, 그건 숙부의 계산이다. 굳이 자기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지하 감옥으로 향한 아르투르는 단숨에 카밀의 방으로 향했고, 쇠창살을 베어버렸다.
잘려나가는 쇠창살을 보며, 어둠 속에서 카밀이 걸어나왔다.
“무사한가?”
“…그렇습니다. 주군.”
카밀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르투르가 자신을 위해 결투를 벌인다고 했을 때도, 고맙기는 했지만 어린 기사의 치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자신의 앞에 섰고, 자신을 구해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고, 남들은 비웃었을 뿐이건만, 그는, 어찌된 일이지 이것을 실제로 해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삶을 다시 살아갈 희망을 느꼈다, 타고 남은 잿더미만 있던 영혼의 난로에 다시 열정의 불꽃이 타올랐다. 생전에 다시는 느껴볼 일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살아있다는 감각.
카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르투르에게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친구여, 다시 태어나거든 그대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지요. 제 맹세를 지킬 시간이 왔습니다. 저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걸어서 저를 구해주셨으니, 남은 삶은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나의 명예를 위해 싸웠다. 그러므로 그대의 충성은 고맙게 받아들이겠으나 그대의 삶은 그대의 것임을 잊지 말아라.”
아르투르가 인장 반지가 새겨진 오른손을 내밀자, 카밀이 그곳에 입을 맞추었다.
“제 활과 검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대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인다. 그대는 나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충의에는 사랑으로, 용기에는 영광으로, 배신에는 죽음으로 보상할 것이다. 이 맹세는 한 명이 파기하거나, 죽기 전까지 계속 될 것이다.”
충성 서약을 마친, 아르투르는 카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데네토르 왕국을 떠날 것이다. 이곳에는… 낡은 것들이, 오래된 것들이 너무 많군.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할 것 같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주군?”
“일단은 아발로니아로 갈 생각이다. 하지만, 일단은 우린 떨어져서 가게 될 거다. 이번 일로 많은 귀족 가문들이 내게 원한을 지녔고, 보복을 위해 사람들을 보내올 것이다. 그러니 그대를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시킬 순 없다.”
“저는 주군과 고난과 기쁨을 모두 함께하길 바랍니다.”
“자네의 일도 쉽지는 않을거야. 케이를 데리고 레오폴트를 따라가라. 나를 대신해 종자를 보호하고, 적절한 시기에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아르투르의 말이 끝나자, 케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 따져 물었다.
“마스터! 위험한 길을 가신다면, 저도 함께 해야합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이는 아르투르.
“지금은, 혼자가 더 안전하다. 명령이니 따라라. 케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카밀은 고개를 숙여보였고, 레오폴트는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정말 혼자서 떠나려고? 이곳에 남아, 새롭게 네 세력을 모을 수도 있을 거야. 우리도 힘을 합치게 될 거고.”
아르투르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이 땅의 피비린내엔 질려버렸고, 지금 내가 여기 있어봐야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야. 지금은 너도 나와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카밀과 케이를 부탁하마.”
어느새, 케이의 손에 이끌려온 에쿠잘루스는 등을 숙인 채 아르투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 데려가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꼭 다시 뵙고 싶습니다.”
“당연한 말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르투르는 케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에쿠잘루스에 올라탔다. 성 내를 가로질러 백마 탄 기사가 질주했다. 여러 힘 있는 귀족들은 이번 사태에서 친지나 아끼는 부하를 잃어 그에게 보내는 시선이 곱지 않았고, 폭동의 원인이 아르투르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원망이 가득한 눈빛들. 시선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것, 정혼자를 잃은 여인의 것.
모두 감당해야만 하는 원망들이리라. 쓰러뜨린 자들의 가족의 저주를 받는 것은 검을 쥐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들이 견뎌내야만 하는 업이리라.
‘내게 현상금을 붙이고, 암살자도 보내겠지.’
성 밖으로 나온 아르투르를 향해,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농민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명예로운 아르투르 경께서 가신다!”
“경의 이름을 서부 대륙 전역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광대와 음유시인들, 농부와 거지들이 모두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하이에버 성을 질주해서 빠져나갔다.
이제, 자신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 더는 아버지의 왕좌가 필요하지 않았다. 형제들의 자리를 열망하지 않으니, 그들과 싸울 이유도 없다. 아르투르는 온전히 에쿠잘루스에게 몸을 맡긴 채, 하이에버의 푸른 초원을 질주해 백색 산맥으로 나아갔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