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아르투르가 의식이 들었을 때는, 녹색의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호수의 표면에 반사되어 빛났다. 시원한 미풍이 자신을 간지럽히며 지나간다.
- 여긴 어디지?
“네 의식 속이지. 어린 기사야.”
여인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순백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에서 보았던 자였다. 물에 젖은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데, 이마에는 물결무늬 문신이 있어 푸른빛을 냈다.
“무슨 - 이게 어떻게 된 거요?”
“나는 네 의식에 직접 말을 걸고 있는 거다. 너희에게 익숙한 표현으론 마법이지.”
“- 마법? 그건 용들이 멸종하며 사라진 것이 아니오?”
여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하게 아름다웠지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아름다움에 가까웠다.
“아직 최후의 용이 남아있단다. 놈이 깨어났으니 마법의 힘도 다시 강해질 거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시오?”
“매일 나의 권능이 돌아오는 걸 느끼거든. 용이 깨어나면 잊혀졌던 것들이 돌아올 것이다. 발타리아가 닫았던 신비의 문이 열리고, 신비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질 테지.”
아르투르가 배운 고대 신화에 따르면, 고대의 레무스 제국은 용들에 의해 멸망했고, 한때 모든 인간은 죽음의 위기를 눈앞에 두었다고 한다. 그 때, 발타리아가 분연히 일어나 용들에 맞서 싸웠고, 그들을 죽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인간들은 그를 신의 화신이라고 부르며 구세주로 칭송했고, 그렇게 오늘날 대륙을 지배하는 레무스 정교가 생겨났다.
하지만, 천년은 지난 신화 같은 이야기다. 오늘날에도 별로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은, 옛 설화가 구세주, 용살자 발타리아에 대한 전승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배운 고대 설화가 다 사실이라고 치고, 용이 깨어났다는 건 흉조인거요? 길조인거요?”
“그 점은 차차 알려주겠다. 지금은 너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백색의 여인은 논점을 돌리며 아르투르의 눈을 직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신비로운 빛이 가득 했다.
“네 목숨은 이미 끊어졌다. 검의 힘이 너를 이승에 붙들어두지 않았다면 진즉에 명계로 추방되었겠지. 지금 네가 이끌어낼 수 있는 검의 힘으로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시간이 없으니, 내 말을 잘 듣고, 같은 점을 되묻지 말거라.”
이게 무슨 소린가? 아르투르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용과 마법, 사후 세계와 신화 속의 검이라니, 농부나 독실한 신도들이나 믿을 법한 옛 설화에 불과했다. 과거의 전설, 하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은 현실이었다.
빠르게 적응할 수밖에.
“그럼, 이 검이… 아버님이 물려주신 검이 날 살려주고 있단 말이오? 마법의 힘이 담긴 유물이라도 되나보지?”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이 만든 피 묻은 왕관보다 훨씬 가치 있는 보물이지. 고대의 기준으로도, 가장 강력한 유물 중 하나다. 그 검은, 믿음을 위해 헌신하는 자를 위해 힘을 빌려준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다는 것도,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너무나 우스운 시대가 되었기에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 힘을 이끌어낼 줄 아는 자에게 제국을 세우고 무너뜨리는 건 간단한 일이니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토록 강력한 유물이 왜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가? 아버지는 왜 내게 이것을 주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피어났다.
“그렇게 강력한 유물이라면, 이 검이 왜 낡아 해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오? 장식품인줄 알았단 말이오.”
아르투르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괴면서 대답했다. 목소리에선 옅은 불쾌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야 모두가 탐내지 않겠느냐. 진정한 보물은 가치를 알아보는 자에게만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다. 황금의 검은 오직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의 네가 그랬듯이.”
아르투르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는 자격을 인정받은 것 입니까?”
“그래. 드디어 황금의 검이 널 주인으로 인정했기에, 네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지. 너는 네가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다. 약한 자들을 위해 싸우겠노라 했던 맹약을 지켰고, 절망 앞에서 용기를 가졌지. 자신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이들만이, 검의 선택을 받는다.”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제길, 진작에 알았더라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를 원망할 필요도, 영지가 없는 것에 괴로워 할 일도 없던 것 아니오.”
여인은 소리내어 웃는다.
“그랬더라면, 네가 검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겠느냐. 소년아. 너는 네가 얼마 전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었나보구나. 너는 네가 싸운 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자였다. 나는 너의 영광만을 위해 싸웠고, 더 화려하고, 멋진 것을 욕망했을 뿐 어떤 믿음도 없었다. 가장 볼 폼 없는 인간들조차 하는 일이지. 검의 주인은 비범한 자여야 한다.”
“비범한 자라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현실에 굴복하고, 타협하려는 자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자 하는 자, 그런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비범하고, 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니라. 너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 힘을 가지면,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 지 잘 보았을 것이다. 네 형제들, 미치광이 프레드릭, 망나니 위고, 널 죽인 기사들. 하물며 인간의 권력 따위로도 그러한데, 신의 권능을 아무나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이 검이 부여하는 힘은 아주 무거운 짐이다.”
신의 권능이란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빛을 내고 있는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지 아버지의 유품이기에 소중히 여겼던 것이건만, 이것이 그렇게 강력한 유물이란 말인가?
지금 나는 이미 죽었고,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을 거두고, 믿음을 가져라. 네 안의 빛을 따르거라. 아르투르. 검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그 곳에는 발타리아의 의지가, 힘이, 영혼이 깃들어있다. 당장 알려준 말은 이 정도구나. 날 따라 오거라.”
여인이 등을 돌려 걸었고, 아르투르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그녀는 아무리 봐도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키는 자신만큼이나 컸고, 몸의 주변으로는 신성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인간들은 나를 호수의 여신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우린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니 이름을 알려주마. 엘라카르시스, 엘리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알고 있다. 페르넬의 아들 아르투르. 나는 페르넬이 죽은 순간부터, 네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개입해서 살려준 적도 있었지. 케이를 만나기 전, 펠릭스가 보낸 기사들에 의해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았느냐?”
아르투르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 형님, 펠릭스가 보낸 열 명의 기병들과 맞서 싸웠고 그들을 모두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큰 상처를 입었고, 산 속에서 정신을 잃었지. 깨어나 보니 상처는 없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져있었다.
“…고맙습니다. 당신 같은 신성한 분이 개입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검이 선택하기 전까지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꺾은 것이었지. 다행으로 알거라. 처음엔 네가 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죽게 내버려둘까 했으니까, 페르넬의 안목을 믿어보았을 뿐인데, 나쁘지 않았구나.”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아르투르는 당황했다.
“무슨 소립니까? 저희 아버지가 당신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래. 네 아버지가 어떻게 한 세대 만에, 수십 갈래로 나누어져있던 서부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던 일이었어. 검이 그에게 힘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충격적인 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서부의 통일이 페르넬의 용맹과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의 지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신도 얼마 전까진 그러했고.
“- 어떻게, 그 일이 알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페르넬은 검의 힘을 숨기길 바랬고,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검의 힘을 마구 사용했다면 용은 더 일찍 깨어났을 거야. 그보다, 이제 알겠느냐? 네 아버지는 네게 가장 귀한 것을 물려준 것이다. 데네토르의 모든 영지를 합친 것보다, 그 검이 귀하다. 즉, 페르넬은 검의 주인에 니가 제일 적합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 것이지.”
아르투르는 잠시 침묵에 잠겨,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겼던 유산과 그를 대했던 자신의 태도를 되돌이켜보았다. 좋게 말해도,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일이었다. 자신은 사생아임에도 왕족들과 함께 자라는 축복을 받았고, 그 덕분에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보물마저 물려주지 않았는가.
문득, 아버지에게 향했던 자신의 분노와 불만이 부끄러워졌다.
“당신은, 그 검과 무슨 관계인겁니까?”
“그건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군.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난 그 검의 수호자다. 적법한 검의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검을 보관하고, 후대에 물려주고, 주인을 시험하는 역할이지. 검은 나의 혼과 연결되어 있느니라.”
“그렇다면 내 일거수일투족을 당신이 보고 있단 말이군요.”
엘리는 가볍게 웃어보인다.
“부끄러워 말거라. 나는 최초의 인간이 피고 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그들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보았지. 또한 나는 발타리아를 도와, 동족들에 맞서 너희가 멸종되는 것을 막았다. 역사의 시작 전부터, 나는 너희를 보살펴왔으니 너희 인간들은 내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지.”
아르투르에게, 그녀의 말은 황당할 정도로 거대한 이야기라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걸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당황한 아르투르의 표정을 보며, 엘리는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킬킬 웃었다.
“내 소개가 길었구나. 자, 드디어 도착했구나.”
그들의 앞에는 녹색 호수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엘리가 앞장서서 물길 속으로 들어가자 아르투르가 뒤를 따랐다. 아르투르가 첫 발을 호수에 내딛는 순간, 수많은 잔상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각 잔상들은 호수를 먼저 방문했던 남자와 여자, 아이와 노인, 강자와 약자, 황제와 야만인들의 기억이었다. 그들은 모두 긴 여정 끝에 호수에 도착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엘라카르시스, 호수의 여신이 물속에서 나타나 그들의 이마에 성호를 그었다.
여인의 손에서 흘러내린 물이 그들의 몸을 적셨고, 신성한 축복이 그들의 힘에 깃들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이 호수를 거쳐갔으며, 호수의 여신에게 축복을 받았고, 빛의 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그 와중, 아르투르는 유난히 눈에 띄는 잔상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아버지였다. 젊은 아버지의 눈에는 총기와 야망이 가득했고, 전란에 휩싸인 대륙을 통합해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굳건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자들이다.”
엘리의 목소리가 끝나고, 그들의 손에 있던 낡은 검이 빛을 발하며, 아름다기 그지없는 황금빛을 내는 지고의 보검으로 변했다. 환상에서 깨어난 아르투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이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 앞서 갔던 자들의 기억이군요. 검의 앞선 주인들 말입니다.”
“그래. 그들은 모두 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고, 빛의 검은 기꺼이 그들의 이상을 위해 힘을 빌려주었다. 너도 마찬가지다. 검의 힘을 완전히 끌어내기 위해서는, 나를 찾아와서 축복을 받아야만 하느니라. 네 아버지가 가라고 한 곳, 네가 오기 싫어한 곳, 서쪽 끝의 섬, 아발로니아로 말이다.”
아르투르는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무언가에 말문이 막혔지만, 시간이 없다는 엘리의 말이 떠올랐다. 서둘러 물어보아야 했다.
“…그래서, 이 검을 가진 자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훌륭한 질문이다.”
엘리는 아르투르를 마주 보며 답했다.
“발타리아의 검은 그들의 이상을 위해 힘을 빌려주었지, 그들 중 몇몇은 성공해서 자신이 그리던 세상을 만들어냈고, 누군가는 처참히 실패했으며, 혹은 차라리 없던 것이 나은 존재가 되기도 했지.”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해서 성공하실 수 있었습니까?”
아르투르의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엘라카르시스.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네 아버지, 페르넬은 자신이 원하던 이상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인간들이 그를 뭐라고 칭송하건, 페르넬은 자신의 명예와 양심을 저버린 것에 평생에 걸쳐 고통 받았다. 그는 네가 그 전철을 뒤따르길 원치 않을 것이다.”
“뭐-라고요?”
아르투르의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흡사, 엘라카르시스의 평가가 부당하다는 듯이.
“네 아버지가 바라던 것은 대륙의 평화였고, 그것을 위해 정복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빛의 검의 보호를 받는 네 아버지를 누가 쓰러뜨릴 수 있었겠느냐. 하지만, 그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피가 흘렀지. 그건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엘라카르시스는 잠자코 말을 잇는다.
“그리고, 보거라. 그가 죽자마자 와해되기 시작되는 평화를, 질서를. 그러고도 과연 페르넬이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켰고, 엘리는 그런 아르투르를 바라보다 물 속 깊숙이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진한 안개가 주변에 차올랐고, 시야가 가려졌다. 호숫물은 따스했지만, 시야조차 분간할 수 없으니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버지께서 실패하셨다고? 하지만 그 분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왕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으셨어. 모두가 그리워하는 위대한 왕,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했던 대왕. 그게 우리 아버지야.’
그럼에도, 마음 속 한 구석에선 엘라카르시스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엘리는 자신을 향해 낡은 보검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주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장난기와 웃음이 넘치던 표정은 사라지고, 엘라카르시스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준엄한 심판관과 같은 모습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이 검을 받기 전에, 네가 명심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아르투르.”
태고적부터 존재해온, 신성한 존재의 목소리가 자신의 가슴에 와 닿았다.
“빛의 검은, 네게 세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하지만 검은 네게 힘을 빌려줄 뿐, 네 믿음을 지켜주지도, 길을 인도해주지도 않는다. 이것은, 한 인간이 다루기엔 너무나 강력한 힘이다.”
엘리의 빛나는 눈동자가 아르투르를 바라보는 가운데, 침묵 속에서 아르투르는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이전의 주인들을 보아왔겠지. 그들은 하나 같이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중 영웅으로 남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현실의 무게에 찌들어 익사해갔고, 일부는 힘에 취해 최악의 악당이 되어갔다. 그러니, 항상 너를 되돌아 보거라. 이 힘은 판단해주지 않는다. 오직, 힘을 빌려줄 뿐이다.”
아르투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다가, 이런 검이 만들어지게 된 겁니까?”
“빛의 검은, 절망의 시대에 범접할 수 없는 적들에 맞서 벼려진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용들과 싸우기 위해, 불가능한 승리를 얻고자 만들어진 무기. 너희가 구세주라고 믿는, 발타리아가 자신의 혼을 담아내 만들어낸 무기다. 그러니 인간에겐 과분한 무기지.”
엘라카르시스는 냉정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본다.
“나는 네가, 검에 어울리는 자인지 지켜볼 것이다. 힘에 취해서 새로운 지옥을 만들 자가 아닌 지, 오직 너만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자는 아닌 지, 감시할 것이다.”
말을 잇는 호수의 여신.
“- 하지만, 네가 또 다른 기적을 만들 수도 있겠지. 다시금 발타리아의 유산이, 신의 힘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네가 검의 주인일까? 예정된 종말로부터 세상을 구해낼,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아르투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금새 결심을 굳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이 내미는 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의 명예가 이곳으로 너를 데려왔지. 앞으로도 명예를 네 길잡이로 삼는다면, 검의 무한한 힘으로부터 너를 지켜줄 것이다. 길을 이끄는 나침판이 되어줄테지.”
엘라카르시스가 말을 마치자, 검신이 빛을 발하며 녹슨 검신과 손잡이가 순식간에 새 것처럼 되었다. 빛을 받아 번쩍이는 보검.
“너는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것이니라, 이것은 보상이 될 지어다.”
아르투르는 떨리는 마음으로, 검집에서 빛나는 검을 뽑아들자, 찬란한 황금의 빛이 새어나왔다. 처음엔 한 줄기에 불과하던 그 빛은, 수천 갈래로 나뉘어 하늘로 날아가 별처럼 하늘을 밝혔다.
아르투르가 검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자, 태양처럼 빛나는 빛의 파도가 일어났고, 그 물결은 자신을 환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광채가 자신이 피 묻은 왕관을 대신하여 선택한 것.
왕관의 황금보다 더욱 찬란히 빛나는 것.
이것이.
명예를 위한 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