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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54화 (5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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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트레서 공작의 선언은 경기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결투 도중의 난입은, 어지간한 기사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불명예였다. 평판과 신뢰가 사람을 평가하는 근간인 봉건 사회에서, 명예를 잃는다는 것은 엄청난 불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도 명예가 없는 자와 결혼하거나, 동맹을 맺거나, 봉신 계약을 할 리는 없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단순히 명예가 옳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자신이 프로 싸움꾼으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기에 그것을 지켰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크다면?

란트레서 가문의 상속녀와의 결혼은, 보이지 않는 명예 따위보다 훨씬 큰 이득을 가져다주리라. 유혹에 이끌린 자들이, 무기를 뽑아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투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해야하는 아르길락 영주는, 낌새를 눈치 채고 머리를 굴려보았다.

‘난 결투의 주최자로서, 공정성을 지켜야할 의무와 아르투르의 신변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 하지만… 이번 일로 놈은 나에게 원한을 가졌을 거야. 그러니, 놈이 살아남는다면 내게 좋을 일은 없겠지.’

그는 결정을 내렸다. 아그라베인이 승리해서 아르투르를 끝장내준다면 좋을 것이고, 만약 그가 패배하더라도 란트레서 공작이 자신들의 기사를 보내 아르투르를 죽이는 걸 내버려두면 된다.

자신이 손님인 그를 죽이는 일은 있을 수 없었지만, 란트레서 가문의 손을 빌려 제거한다면 책임을 그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자신은 약간의 불명예와 멸시만 감수하면 그만이리라.

하지만, 정치적 계산에 밝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아그라베인은 아르길락 영주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항복을 선언하겠소.”

아그라베인은 검을 도로 칼집에 넣고, 뒤돌아섰다.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싸운다면 아그라베인이 승리할 공산이 매우 높아보였다. 아니, 그 전에 아그라베인은 한 치의 인간미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아그라베인의 선언에 격분한 아르길락 영주가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시오! 칼 한번 맞대보지 않고 항복을 선언하겠다니, 당장 선언을 무르시오. 신께서 지켜보시는 재판에 무슨 짓이오?”

냉소를 짓는 아그라베인 경.

“그대의 형편없는 신앙심과 가져본 적 없는 명예로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마시오. 나의 눈은 멀지 않았소. 아르길락 공, 란트레서 공. 그대들은 내가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몸임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오. 내가 국왕 폐하에 대한 충성보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추구하는 몸이었다면 두 분은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날선 말을 남긴 아그라베인은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아르길락 영주는 떨면서 그의 등을 노려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는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분한 표정으로.

“ - 신께서 판결을 내리셨다! 아르투르 공이 승리했으므로, 위고의 말은 거짓이다! 카리오스는 결백하다!”

선언을 마친 아르길락 영주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고, 기사장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아르길락 가문의 병사들은, 더 이상 경기장으로 난입하려는 기사들을 가로막지 않았다. 란트레서 영주는 웃어 보인다.

“당장 저 잡종놈의 목을 가져와! 목을 가져오는 자에겐 내 딸을! 사지 중 하나를 가져오는 자에겐 성을 하나씩 주겠다! 죽여!”

그의 말에, 서부에서 온 다른 귀족이 덩달아 외쳤다.

“놈의 목에는 펠릭스 왕께서 내거신 현상금도 있다!”

왕의 현상금이란 말에 항상 경비가 쪼들리는 평기사와 방랑기사들이 혹했다. 지치고 부상당했으니 손쉬운 적이었고, 죽이더라도 손가락질 하나 받을 일 없었다. 명예로운 일이냐고? 결코 아니었지만, 명예가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진 않으리라.

돈과 권력을 쥘 기회가 생기자 그들은 돌변했다. 정당성과, 명예, 기사도를 외치던 자들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향해 몰려들었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명예를 따르는 기사들은 오히려 그들이 아르투르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섰고, 사건이 이 지경에 이르자 잠자코 방관하던 병사들이 나섰다.

“나리들, 물러나십시오. 신께서 누가 옳은 지 판결하셨습니다.”

“이들의 말이 맞네. 물러나게. 어쩌다가 우리 기사들이 평민 병사들만도 못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지 말고, 물러나게.”

그러자 작위에 눈이 먼 기사들은, 대답도 없이 무기를 꺼내들어서 공격했다.

“닥쳐! 난 공작이 될 거야! 네놈들이 뭘 알아!”

순식간에, 얼마 전까지 관중이던 자들끼리 칼부림을 시작했다. 아르투르를 지키려는 자들과 제거하려는 자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제거하려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어느 사이 아르투르는 여섯 명에 달하는 기사들에게 포위 되었다.

레오폴트는 퉁퉁 부은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아르투르의 곁에 섰고, 그도 할버드를 꽉 붙잡았다.

여섯 명의 기사들은 두 사람을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아르투르의 입에서 왈칵 피가 쏟아졌다.

‘장에게 맞았던 도끼가 치명적이야.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겠어. 속전, 속결.’

아르투르는 눈앞의 상대를 향해 다가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선봉에 서 있던 기사의 목이 날아간다. 남아있는 다섯 기사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르투르의 손이 쉬지 않고 할버드를 현란하게 움직인다. 일격이 가해질 때마다 신체가 절단되며 피가 흩뿌려진다.

하지만 작위에 눈먼 기사들은 끝이 없었다. 어느새 두 명의 기사들이 뒤로 돌아와 아르투르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레오폴트가 쌍검을 휘두르며 아르투르의 후방을 지켜냈다.

레오폴트는 씩 웃어 보였다.

“이봐, 내가 아그라베인한테 맞고 다니니까 만만해보였지?”

아르투르도 자신이 있었다. 결투에서 무찌른 기사들에 비하면 이들은 경험도 기교도 부족했다. 아르투르와 레오폴트는 고함을 지르며 남은 힘을 끌어냈다. 두 사람은 같은 마스터 밑에서, 오랜 종자 생활을 해왔다. 합을 맞추는 일은 두 사람에게 지극히 쉬웠다. 한 몸이 된 그들은 적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아르투르가 할버드를 크게 휘둘러 무모한 공격을 가하면, 그의 측면과 후방을 레오폴트가 방어해줬다.

채 일 분이 지나기 전에 여섯 중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기사는 항복 의사를 표현했지만 레오폴트는 목을 치는 것으로 대답했다.

“살려두면 뒤통수 칠 새끼들은 죽어야지.”

두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니 경기장에서 무차별한 난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르투르가 결투에서 승리했지만, 암살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군중은 병사들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을 진압해야 할 경비병들은 오히려 거기 가세하거나, 뒷짐 지고 물러나버렸다. 때문에 소수의 기사들이 출동해서 폭동 분자들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이런 와중에, 결투의 결과를 존중하려는 기사들과 아르투르의 목을 가져가 신세를 고치려는 기사들의 싸움이 벌어지니 하이에버 성은 전쟁터가 된 것이었다. 케이와 막시밀리안이 무장한 채, 그들의 마스터를 찾아온 것도 그때였다.

“서둘러 빠져나가야 합니다! 란트레서 가문의 군대가 하이에버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르투르가 눈을 찌푸렸다.

“애초부터 재판의 결과에 승복할 의도 따윈 없던 거군.”

“백작님들, 일단 성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케이의 부축을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바깥에서는 오히려 귀족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 하이에버에는 왕국 각지에서 온 가문들이 있었고 그중엔 해묵은 원한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한번 혼란이 발생하자, 기회를 틈타 원한을 갚으려는 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토너먼트 장은 친선의 장에서 한순간에 피가 흐르고 비명이 들리는 살육의 현장이 되어있었다.

“ - 일단 이곳을 떠나야 해. 하이에버 외곽에 우리 아버지가 군대를 이끌고 주둔 중이시다. 거기로 가자.”

레오폴트의 말에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많은 말을 하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얼마 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인파를 헤치고 나타났다. 그들은 레오폴트를 데리러 온 대공의 기사들이었다.

“백작 각하, 묜시뇰께서 각하를 구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즉각 따라오시지요.”

“오, 제때 와줬군. 좋아. 같이 나가자고.”

레오폴트의 말에, 검은 기사들이 머뭇거렸다.

“하지만, 묜시뇰 전하께서는 아르투르 경을 모셔오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서 날 여기 두고 갈 건가? 나는 내 사촌과 함께 할 생각이야. 자네의 임무는 나를 보호하는 것이니 날 따라와야 하네. 나는 아르투르와 그의 동료들을 모두 구해서 나갈 테니, 자네도 와야 하네.”

레오폴트의 일방적인 선언에 검은 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승복했다. 그는 주인이 아끼는 후계자였고, 훗날 자신들의 주인이 될 자였다. 아르투르 일행이 코너를 돌아 출구를 찾고 있을 때, 수십 명에 달하는 무리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주군의 복수를!”

“감히 늑대 가문을 해친 자가 누구냐!”

란트레서 가문의 기사들을 필두로, 북부군 병사들이 쏟아지듯 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미친 늑대의 죽음에 분노해서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저들은, 내 목을 바라고 있군.’

.레오폴트는 투구의 안면가리개를 내리며 검은 기사들의 앞에 섰다.

“케이. 네 마스터 데리고 샛길로 먼저 빠져라. 여긴 내가 담당할 테니.”

아르투르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 뭐? 무슨?”

“시끄럽고 네 종자 데리고 꺼져 있어. 지금 부상자 신경 써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레오폴트는 곧장 선봉에 서서 돌격했다. 검은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돌격은 맹렬해서 단숨에 란트레서 가문의 선봉을 짓밟고 대열을 와해시켰지만, 수적으로는 불리했다. 하지만 그 사이 케이는 아르투르를 잡아끌어 샛길로 빠져나갔다.

“지금은 레오폴트 백작님 말씀이 맞아요. 싸우러 가셔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케이의 말에 아르투르는 분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수긍했다.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골목을 거치며 빠져나가는 길을 찾았다. 성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아르투르의 숨은 점차 가빠졌다. 다시 입에서 피를 토한 아르투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피가 주르르 흘러나와 벽을 적셨다.

“케이… 잠시 쉬어가자.”

케이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아르투르의 상처 부위를 감았다. 도끼에 맞았던 가슴이 뼈가 드러나 있었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서둘러 응급 처치를 해야 하는데 시간을 끈 것이 상처를 더 악화시킨 모양이었다.

그때, 다른 귀에 익은 목소리가 건너편 골목에서 들려왔다.

“아르투르!”

크리스티안과 드류 숲의 형제단이 아르투르를 향해 걸어왔다. 크리스티안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자네를 구하기 위해 왔네! 때를 맞춰 온 것 같아 다행이군.”

썩 마음이 맞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게 되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크리스티안….”

아르투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미소를 지었다.

“이러다간 과다 출혈로 죽게 생겼군. 자네, 남는 붕대 좀 있나?”

크리스티안은 아르투르에게 다가와 부서진 갑옷과 피에 젖은 옷을 들춰보며 상처를 살폈다. 아르투르의 호흡은 지금도 가빠지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나?”

“그건 가능하네.”

“싸우는 건?”

“병사 한둘 정도는 제압할 수 있겠어. 그게 전부야.”

“흠. 그렇다면 장소를 옮기긴 어렵겠군. 케이! 내 종자와 함께 의료 도구를 가져와라. 그가 위치를 안내해줄 거다!”

케이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마스터, 버티셔야 해요!”

케이는 다급히 크리스티안의 종자를 따라갔다. 아르투르가 그들의 뒤를 바라봤다.

“종자 두 명만 보내면 위험해. 무장 병력을 딸려 보내야 하네.”

아르투르의 말에 크리스티안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네. 그들은 안전하니까.”

푹 - !

차가운 금속이 자신의 목덜미를 뚫고 들어왔고, 고통이 느껴졌다. 피가 역류해서 숨이 막히고, 혈관이 찢어졌다.

“미안하군. 난 자네를 좋아하지만 공작 작위와 금화 50만 개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야. 이해해주게. 우리 모두 필요에 따라 손을 잡은 사이 아니었나? 일이 끝났으니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지.”

아르투르는 힘겹게 여명을 뽑아 휘둘렀지만 크리스티안은 잽싸게 뒤로 굴러 피했다. 형제단의 석궁수들이 아르투르의 가슴팍에 잇달아 탄환을 쏘아 맞혔다.

“쿨럭 - !”

목에는 단검이, 가슴에는 네 발의 석궁 탄환이 박혔다. 아르투르는 여명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바로 주저앉아버렸다. 그의 주저앉은 자리에는 혈흔만이 가득했다.

“잘 가게. 옛 친구. 자네 덕에 내가 크게 출세하겠어.”

다른 단원들도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맙소. 대장. 이 천것이 이제 귀족도 되어보겠구려.”

크리스티안은 장검을 들어 아르투르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 콰지끈 - !

그 순간, 아르투르를 향해 휘두른 장검은 산산이 조각나서 흩뿌려졌고, 강한 충격파에 휩쓸린 크리스티안은 수 미터를 날아가 나뒹굴었다. 아르투르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낡은 보검이, 빛을 발하며 둥근 보호막을 형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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