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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아르투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가 어두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모양이군.
“일어났어?”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달콤한 입술이 와서 맞닿았다. 아르투르는 샤를로트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은 정열적인 시간을 보냈고, 어느 사이 창가로 햇빛이 들고 있었다. 품에 안긴 샤를로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이번 결투는 두려운가 보네.”
“두려워한다니?”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거든. 두 번 다시 여자를 안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처럼.”
아르투르는 피식 웃어넘겼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마음 속 한 구석이 무거웠다. 오후에, 아르길락 영주가 선포한 집단 결투가 이뤄질 것이다. 여태 한 사람의 동료도 구하지 못한 자신과 달리, 위고는 실력 있다는 말로는 모자랄, 대단히 뛰어난 기사들, 여섯의 지원을 받았다.
홀로 일곱 명의 기사들과 싸워야 할 판국이었다.
“몰래 나와 함께 떠나는 건 어때? 당신 몫 정도는 내가 책임져줄 수도 있는데.”
갑작스런 샤를로트의 말에, 아르투르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냐?”
샤를로트는 작게 웃어보였다.
“오해는 하지 말고. 너도, 나도 돌아가야 할 곳이 있잖아? 그걸 전제로 하고 만났던 거고. 레무리아로 오면 당신 거처와 생활 정도는 내가 책임져주겠다는 이야기야. 친구로서,”
“재미 보는 친구 사이 말이군.”
밝게 웃는 아르투르.
“우리 둘 다 약혼자가 있으니까, 남들이 눈치 챌 만한 장소에선 재미를 보긴 힘들겠지. 안타깝게도.”
아르투르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입으며 말했다.
“아, 난 거리낄 게 없어. 이제 약혼자가 없거든.”
바로 어제였다.
***
그 일은 자신이 결투재판을 선언했던 직후에 벌어졌다.
화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피 부인.
“아르투르 경, 그만 두십시오. 란트레서 가문은 제 친정이고, 위고는 제 조카에요. 즉, 그대의 아내가 될 아델의 사촌들이란 말이죠. 잘 아실거에요. 그걸 알면서도 살인자의 편을 들겠다는 건 아니지요?”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뜬 채 자신을 노려봤지만, 아르투르는 단호한 표정으로 답한다.
“부인, 카밀에겐 죄가 없습니다. 위고가 살인자지요. 잘 아실 겁니다. 기사로서 이런 일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소피 부인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로 자신을 바라봤다.
“우리 같은 고귀한 이들은 일의 경중을 따지는 교육을 받지 않던가요? 선택하십시오. 주인을 무는 개를 구하는 것이 귀한 지, 우리의 가족이 되는 것이 중한 지 말이에요. 나는 아델을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아델라이데도 당신을 좋아하죠. 당신도 그걸 받아들이고 싶다면, 우리를 가족으로 여겨줘야죠. 결혼을 하게 되면 아델라이데의 친척은, 즉 당신의 친척이 되죠.”
아르투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빛이었다.
“부인, 저는 위고가 사촌이 아니라 친형제였어도 같은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제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소피 부인은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없군요. 나는 당신이 아델라이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내 딸을 내줄 생각이었죠. 경 같이 신의 있고 명예로운 기사라면 아내를 위해 무엇이든 해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대에겐, 그대의 명예와 긍지만이 중요하군요. 결혼을 파기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떠나갔다. 아르투르와 동행하던 위르마넨 가문의 기사들은 눈치를 살피다, 아르투르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보이곤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저희는 위르마넨 가문에 봉사하기로 맹세했기에, 경을 도울 수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아르투르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맹세를 지키시오.”
***
샤를로트는 여전히 침대 위에, 순백의 나신을 드러낸 체 아르투르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해봐. 오늘 결투는, 자신 없는 거지?”
아르투르는 정적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다, 답했다.
“- 맞아. 적들 가운데는 일대일로 싸워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이들이 여럿이 있어. 그들이 함께 공격해온다면, 어렵겠지. 운이 좋다면 둘이나 셋 정도는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 있겠지만.”
샤를로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지 말라고 한다고 들어줄 리도 없겠지. 결투는 보러가지 않을 게. 당신 머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재차 웃어 보이는 아르투르.
“아쉽게 되었군. 내 생에서 가장 멋진 일주일이었어.”
“다행이군요. 나의 왕자님. 살아남는다면 다시 찾아오세요. 그땐 더 재밌는 시간을 보내자.”
“약혼자가 있으니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나?”
샤를로트는 대답 없이 아르투르에게 입을 맞춘 후, 서서히 땠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지. 살아서 돌아오기나 해.”
긴 입맞춤이 끝난 후, 아르투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자, 케이가 에쿠잘루스의 고비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단숨에 안장을 밟고 올라섰다.
“갑옷의 수리는 끝났느냐?”
케이가 기세 좋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답했다.
“대장장이가 시합 장소로 가져다줄 겁니다. 수리가 끝난 건 제가 눈으로 확인했어요.”
“좋아. 가자.”
케이도 이젠 능숙하게 말에 올라, 아르투르의 옆자리에서 따라갔다.
“내 편지에 대답한 기사들이 있었나?”
케이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결투에서 함께 싸워 줄 기사를 찾아 하이에버를 헤맨 것은, 어제였다.
***
아르투르가 먼저 찾아간 것은 술자리를 함께 했던 기사들이었다. 아르투르가 그들에게 함께 싸울 것을 제안하자, 그들은 미안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뜨거나 그를 비난했다.
“미안합니다. 아르투르 공. 주군께서 이번 결투에는 관여치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아르투르 공,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천것들을 위해서 우리 푸른 피들끼리 왜 피를 흘려야 합니까? 사과하고 물러나시지요. 때로 자존심을 꺾는 것도 남자다운 일입니다!”
애초에 그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던 이유는, 아르투르가 알고 지내던 모든 기사가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숙부는 레오폴트와 검은 기사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위르마넨 가문의 기사들은 명에 따르길 거부했다. 크리스티안조차 난색을 표했다.
“소피 부인께서 자네를 도우면 영지를 박탈하겠다고 경고하셨네. 나는 아델라이데 백작과 위르마넨 가문에게 충성 서약을 했지, 자네에게 했던 것은 아니니까 양해해주게. 만약 결투를 무르겠다면 내가 중재할 의향이 있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몇몇 방랑기사들이, 막대한 보수를 지급한다면 함께 싸워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뒤, 상대편이 더 많은 보수를 제시했다며 계약을 물렀다.
많은 귀족들은 단지 아르투르가 자신의 부하가 잡혀간 것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겼다. 카밀의 생사가 문제가 아닌, 아르투르의 권위에 대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그들은 타협을 시도해왔지만, 어떤 경우에도 카밀이 살아남지는 못했다.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죄가 없는 자가 처벌을 받는다니.
어젯밤 늦게, 미친 늑대가 술냄새를 가득 풍기며 찾아왔다. 금괴가 가득 담긴 상자를 내려두면서.
“아우님. 아우님. 미안하네. 내 성의를 봐서 물러나 주실 순 없겠나? 나도 내 망나니 동생들이 문제라는 점은 잘 알고 있네. 영지민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도.”
아르투르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걸 잘 아시는 분이, 어째서 그들을 바로 잡지 않고 저 지경으로 내버려두신 겁니까?”
“후, 동생들이 내 맘대로 되나? 놈들을 두들겨 패기도 하고, 추방해본 적도 있지만 못된 짓만 늘어서 돌아오더군. 그나마 집안에서 붙들고 있어야 저 정도에 그치는 거야.”
아르투르는 말없이 조프루아를 바라봤다. 조프루아는 아르투르의 눈빛에서 자신에 대한 경멸을 읽어냈고 격렬한 반응을 내보였다.
“씨발, 씨발. 그래도 그놈들은 내 동생이야! 사람이나 죽이고 겁탈하고 다니는 개새끼들일지라도, 우리 집 개새끼들이란 말이다. 내 피붙이라고! 그걸 다른 놈들이 해코지 했던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늑대를 건드리면 어떤 대가가 있는 지 분명히 가르쳐야만 하네! 아르투르, 부디 날 이해해주게. 자네가 남이 아니기에 하는 부탁이야! 이번만 넘어가 주면 아우님을 잘 모시겠네.”
솔직히 말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싶었다.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평민 부하 한 명만 포기하면 권력과 부를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반면 그를 지키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해 줄 것이다. 이해 해줘야 한다.
내가 왜 자처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지.
미친 늑대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것은 죽도록 얻어맞은 난쟁이 배우와 그를 보며 두려움에 떠는 여배우였다. 감히 귀족들이 모인 곳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놈이니 제 가문의 영지에 가선 얼마나 패악질을 부릴 것인가.
- 하지만 아르투르의 마음을 다 잡은 것은, 평민들이 자신에게 보내던 선망의 눈빛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보며 그들은 정의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에게 입증해야만 했다. 명예는 귀족들의 유흥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라고. 기사도는 살아있다고 말이다.
자신이 누누이 말해온 바를 행동으로 입증할 시간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목소리에 집중한 아르투르는, 유혹을 떨쳐냈다.
“형님, 저는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한번 내뱉어진 말은 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제 신념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러니, 저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형님께선 형님의 일을 하십시오.”
대답을 들은 미친 늑대는 실성한 듯이 마구 웃었다. 비탄이었을까, 분노였을까. 들고 있던 술병을 꿀꺽 들이킨 그는, 아르투르에게 남은 병을 내밀었다.
“마시게. 우리의 마지막 술이 되겠군.”
아르투르는 그것을 받아 입가로 넘겼다. 취기가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다시 한 번 생각해주게. 난 자네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어. 그깟 명예 따위 잊어버리고, 의리와 인정을 따라주게.”
아르투르는 슬픈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
“그깟 명예가 내게는 목숨보다 소중하오. 형님.”
조프루아는 한 번 웃어 보이곤 남은 술을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내일,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죽겠군.”
말을 마친 늑대는 돌아갔다. 아르투르는 쓴 웃음을 지었고, 속이 쓰렸다.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틀림없다.
자신에게 좋은 길을 가고 있는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내려진 결정은 되돌이킬 수 없다.
맹세는 지켜질 것이고, 약속은 이뤄지리라.
명예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무고한 이를 위해서 싸우리라.
***
지난밤의 회상을 마친 아르투르는, 결투가 벌어질 원형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치는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군주들과 귀부인들, 기사와 숙녀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경 혹은 애정 어린 눈길을 자신에게 보내고 있었으나, 이제는 경멸과 적의를 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들 사이를 걸어 나갔다. 그들을 벗어나자, 몰려든 수백 명의 인파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아르투르! 아르투르! 명예로운 아르투르 경께서 가신다!”
“기사 중의 기사 납셨다!”
그들은 거지와 직공, 병사, 농부들이었다. 마음 속 깊숙한 생각으론,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약한 자들. 남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자들.
키도 작고, 배운 것은 일천하고 가진 것도 없었다. 심지어 예의조차 모르는 자들도 수두룩했다. 냄새를 가득 풍기는 거지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자, 아르투르는 그 손을 뿌리 치고 싶었다.
말머리를 돌려, 귀족들의 행렬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말이다. 자연스레 말고삐를 느슨하게 쥐자, 에쿠잘루스는 속도를 늦췄다.
귀족들은 모두 키가 크고, 체격도 건장했다.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고, 입고 있는 옷들도 멋지고 화려했다. 그 뿐인가?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 철저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가진 것이 많았기에 예의도 차릴 줄 알았다. 미래에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자들은, 분명히 저들이리라.
자신은 고귀하게 태어났다. 비록 사생아라 할지라도, 그것이 페르넬의 아들이라면 일반적인 사생아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왕족은 아닐지언정, 엄연한 귀족 계급의 일원.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 지는 명백했다. 지금이라도 편을 바꾼다면 그들은 자신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내리라.
-하지만.
나를 향해 환호하는 저들은 다시금 희망을 잃겠지. 정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명예란 귀족들만의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을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 체념한 채, 남은 날들을 살아가리라.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싸움을 위해 태어났다.
마음을 굳힌 아르투르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인파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전속력으로 경기장을 향해 달려갔다.
“아르투르! 아르투르! 우리의 기사 아르투르!”
그 순간, 이곳에 모인 평민들은 자신의 고향과 소속에 상관없이, 한 마음이 되어 아르투르의 이름을 연호했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