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50화 (5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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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경기장에선 마상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육중한 군마들이 질주하는 가운데, 가문의 문장을 외친 기사들이 뭉툭한 창과 방패로 기량을 겨루었다. 창이 부딪힐 때마다 방패가 깨지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기사가 나왔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면, 관중들의 환호성과 야유가 들린다.

젊은 기사는 자신이 눈여겨본 처녀에게 다가가 승리의 화환을 건네주고, 음유시인들은 기사들에게 새로운 이명을 붙이며 노랫가락의 새로운 소절을 만들어냈다. 아르투르는 단연코 오늘의 참가자 중 가장 눈에 띄는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아르투르와 에쿠잘루스는 매 경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일궈냈다. 그의 창이 번득일 때마다 상대가 낙마했다.

결승전은 왕실 기사인 아그라베인 경과 치러졌는데, 세 번의 창이 교차한 이후에 아그라베인 경도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아르투르에게는 아르길락 가문의 챔피언인 요제프 경과 맞설 기회가 주어졌다. 아르투르와 요제프가 함께 경기장에 입장했고, 그들의 종자가 말을 이끌고 들어왔다.

“5년 전에 그대의 마스터와 겨룬 적이 있었지. 이제는 그 제자와 시합을 하게 되다니 재미있는 일이오.”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이런, 스승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군. 잘 부탁드리오. 요제프 경.”

“그나저나, 만약 귀 공이 승리하실 경우 우리 가문에 무엇을 요구하실 생각이오?”

“그건 승리한 다음에 말씀드리겠소.”

“자신만만하시구려.”

두 기사는 호승심에 느끼며 서로를 마주보며 악수를 했다. 서로 기세에서 밀리지 않게 힘을 가득 주었다. 두 사람은 각자 지정된 위치로 향했다. 에쿠잘루스는 덩치가 크고 육중했지만, 요제프 경의 말은 더 조그맣고 날랬다. 두 기사는 투구의 안면가리개를 내린 후 겨드랑이에 창을 끼웠다.

“경기를 시작하라!”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돌격 나팔이 울렸다. 두 기사는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질주했다.

다그닥 - 다그닥 - 다그닥!

먼지가 휘날리며 두 기수의 사이가 점차 가까워졌다. 두 사람 모두 정확히 상대방의 가슴을 향해 창을 움직였기에, 서로의 마상창이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나 파편을 흩뿌렸다. 그들은 다시 경기장의 끝에 도달했고, 말머리를 돌려 마주 보았다. 종자들은 그사이 새로운 마상창을 가져다주었다.

두 기사는 다시금 말을 달렸다. 공격이 교차했다. 아르투르의 창이 요제프의 가슴을 향해 나아갔지만 그는 날렵하게 방패로 막았고, 요제프의 창이 아르투르의 가슴에 빗맞았다. 아르투르는 휘청했지만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고, 경기는 계속되었다.

세 차례, 네 차례, 다섯 차례 공방이 이어지며 바닥에는 부서진 마상창만이 가득했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기에 공수를 주고받으며, 서로 위태로운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각 기사를 응원하는 관중들은 가슴을 졸이거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공방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말과 사람 모두 지쳐갔다. 마침내 일곱 번째 공방쯤 되자, 요제프 경과 그의 말은 숨을 헐떡였다. 반면 아르투르는 땀을 흘리고 있을 뿐, 호흡은 침착했다. 이번 질주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요제프 경이 집중력을 잃었기에 그의 창은 느려졌고, 그 사이 아르투르가 먼저 요제프 경의 상반신에 마상창을 직격시켰다. 요제프 경은 한순간 하늘을 날아 바닥에 쾅하고 쓰러졌고, 위르마넨 가문의 병사들을 필두로 한 친 아르투르파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리 영주님이 이겼다!”

“아르투르 백작님 만세!”

위르마넨 가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승리한 양 진심으로 기뻐했고 적지 않은 관객들이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박수를 보냈다. 페르넬의 아들이라는 점이 합쳐져, 많은 음유시인들은 그의 압도적인 실력을 칭송하는 시를 떠올렸다.

아르투르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려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면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받았고, 승리의 화환을 창에 걸어 샤를로트에게 내밀었다. 샤를로트는 일순간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어 보이고는 그것을 받아들여 목에 걸었다. 귀빈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소피 부인의 표정이 좋진 않아 보였다. 숨을 헐떡이던 요제프가 갑옷을 업고 아르투르에게 다가왔다.

“훌륭한 시합이었소. 스승에 이어 제자에게 또 패배의 고배를 마시는군. 이거, 수련에 정진해야겠소. 마상 창시합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아르투르는 한번 웃어 보이고 손을 내밀었다. 요제프도 그의 손을 맞잡은 후, 종자를 데리고 경기장에서 퇴장했다. 레오폴트는 관중석에서 주먹을 쥐고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한동안 박수갈채와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아르투르는 그것을 즐기며 경기장을 맴돌았다.

얼마 뒤, 아르길락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도전자여! 그대는 각지에서 모여든 모든 명성 높은 기사들과 아르길락 가문의 챔피언마저 꺾었다. 그대는 우리 가문에 무엇을 원하는가? 하이에버의 통치권과, 우리의 보검 '유성'을 제외한 무엇이든지 주겠다.”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몰고 나가 아르길락 영주가 위치한 연단의 아래에 섰다. 수백 명에 달하는 관중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과연 그가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어떤 이들은 아르투르가 이곳에서 아르길락 가문의 충성을 요구하며, 왕위에 대한 야망을 밝힐 거라고 보았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아르길락, 란트레서 가문의 지지를 받는 아르투르는 왕위 계승 경쟁에서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터였다.

“내가 청할 것은 공정한 재판이오. 아르길락 공.”

순간 사방이 조용해졌다.

“누구에 대한 재판을 말하는가?”

“나의 부하인 카리오스가 재판도 거치지 못하고 아르길락 가문의 감옥에 억울하게 감금되어 있소. 그는 현상 수배범이자 반역자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의 결백을 확신하오. 그러니 토너먼트 우승자의 자격으로 그에 대한 재판을 열어줄 것을 요구하오.”

아르길락 영주의 얼굴에 순식간에 경멸과 혐오가 담겼다. 란트레서 가문 사람들은 격노해서 목청을 높이고, 좌석을 가득 메운 귀족들은 혼란스럽거나, 화를 내는 표정이었다.

“토너먼트의 보상은 한 가지뿐이다. 정말로 위대한 무인들의 후예인 아르길락 가문에게 요구할 것이 그것뿐인가? 달랑 농노 한 명에게 재판을 열어 달라?”

“그는 단순한 농노가 아니오. 그자는 선왕의 밑에서 종군했던 역전의 용사고, 나의 친구요. 본디, 그의 공적과 성품에 미루어볼 때 합당한 재판을 치러주는 것이 옳으나 영주께서 그것을 거부하셨기에 부득이하게 이렇게 요청하는 것이오.”

관중들은 아르투르의 말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르투르가 평민에 불과한 그의 부하를 친구라고 부른 것에 놀랐고, 그가 귀족 살해자라는 것이 알려지자 경악과 분노를 드러냈다.

‘이미 예상하던 반응이야.’

페르디난트 대공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고, 샤를로트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르투르를 쳐다봤다. 레오폴트도 황당한 표정이었다. 소피 부인의 표정은 경악과 분노 그 자체였다.

“아르투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겠어. 이번 판단은 잘못 됐어. 물론 나도 미친 늑대와 그 개새끼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하지만… 지금 카리오스를 두고 공개 재판을 하자는 건… 란트레서 가문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냐? 하다못해 재판하더라도 승소 가능성은 없어. 우리 푸른 피의 귀족들 중에 그놈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고.”

아르투르는 활짝 웃으면서 레오폴트를 바라봤다.

“없긴, 너와 내가 있잖냐. 귀족은 아니지만 왕족이 둘이나 있는 셈이지.”

“야 이, 미친 새끼야. 지금이 장난칠 때냐? 이러면 란트레서 가문과는 진짜로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 한다고! 너도 미친 늑대 성미 알잖아?”

아르투르는 그저 웃어 보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선언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르길락 영주는 가만히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번복할 기회를 주겠네. 카리오스는 주군의 일가를 살해하는 하극상을 저지른 반역자일세. 이미 왕실에서도 공인했던 바야. 다른 요구를 하게.”

“기사의 말은 강철보다 무겁소. 아르길락 당주. 한번 내뱉어진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오.”

그 말에 아르길락 영주는 끓어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냈다.

“제정신인가? 페르넬의 사생아? 지금 뭐하자는 짓이냐?”

“뭐하긴, 공정한 재판을 치르자는 거지. 당신은 재판이나 진행하시오.”

아르길락 영주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바라는 것이 정 그렇다면 말대로 해주지. 페르디난트 대공이 네게 왕의 자질이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도 늙은 모양이군. 왕은 커녕 백작령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할 놈이었어. 이런 요구를 해주면 나야 좋지. 여봐라! 그 반역자 농노 놈을 끌고 와라.”

쇠사슬에 묶인 카리오스가 끌려 나왔다. 고작 일주일가량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뿐인데, 지극히 쇠약해지고 수척해 보였다. 그를 본 미친 늑대는 곧장 도끼를 들고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의 동생들이 말려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르길락 영주는 경멸적인 시선으로 카리오스를 내려다봤고, 카리오스는 지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리오스, 너는 란트레서 가문을 섬기던 농노였다. 맞는가?”

“그렇다.”

“입 조심해라. 비천한 농노야. 너는 지금 영주를 대하고 있다.”

“나는 누구도 섬기지 않는 자유인이다. 너희는 내 육신을 굴복시킬지언정, 정신은 결코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아르길락 영주는 서둘러 재판을 끝내고 이 농노를 본보기삼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꼬챙이 형과 살을 포뜨는 것, 혹은 사지를 찢는 것 중 무엇이 좋을까.

“카리오스, 너는 란트레서 가문의 막내아들을 죽이고 셋째 아들인 위고도 죽이고자 했다. 맞는가?”

“그것도 맞다. 막내 놈은 아주 처참하게 죽었지. 자기 내장이 흘러나오는 걸 자기 눈으로 보면서 죽어갔어. 눈알은 뽑아서 까마귀들에게 던져줬다.”

그의 충격적인 말에 귀부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기사들은 격분했다. 어찌 농노가 감히 주인에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좀 더 냉정한 자들은 이것이 아주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여겨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반드시 본보기를 보여야만 했다. 아르길락 영주의 생각도 같았다.

“그렇다면 볼 것도 없군. 판결은 끝이다. 하이에버의 성주로서 명한다. 너를 거열형에 처할 것이고, 그 전에 사흘간 고문할 것이다. 이상 판결을 마친다.”

아르투르가 도중에 끼어들어 말을 끊는다.

“인정하지 않겠소. 그는 나의 깃발 아래 있는 사람이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처벌할 수 없소.”

아르길락 영주는 손짓했고, 곧장 아르길락 가문의 기사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관중석에 앉은 위고 란트레서를 지목했다.

“나는 위고 드 란트레서를 강간 살해 및 반종교적인 잔학 행위, 영지민에 대한 보호의 의무를 방기한 죄로 고발하는 바요. 카리오스의 살인은 정당한 복수였소.”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관중석을 향해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위고 드 란트레서는 흉악한 범죄자고, 그를 감싸는 다른 란트레서 가문의 사내들도 공범이오.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는 저버린 채, 오직 권리만 남용해 영지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우리들의 명예와 자긍심은 이 정도인가?! 우리는 고귀한 힘과 의무를 타고난 자들이다. 기사들이여, 약자들을 위해 그대들의 검을 휘두르겠다는 맹세를 잊었는가? 명예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겠다는 선언은 어디로 갔나!”

그 때, 얼굴이 벌게진 위고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거짓말, 거짓말이오! 저 사생아가 배은망덕한 농노를 시켜 우리 가문을 모함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늑대의 피가 흐르는 고귀한 가문의 말을 믿을 것이오? 아니면 비천한 농노의 말을 믿을 것이오? 현명하게 생각하시오! 이 재판은 처음부터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소!”

위고는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설령, 내가 고발당한 죄목이 사실이라고 한들 주군을 해치는 것은 어떤 것보다 큰 죄요. 이것은 우리 고귀한 자들에 대한 도전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요! 어떤 이유로도 말이오!”

“옳다!”

많은 기사와 귀족들이 위고의 외침에 호응에 외쳤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르투르의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무엇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확신하지 못한 채 판단을 보류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아르투르에게 동의하는 자는 없었다.

위고는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띈 채로 아르투르를 내려다봤다. 카리오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친구여. 남은 운명은 내가 받아들이겠소. 생애 마지막으로 모실 가치가 있떤 분을 모셨던 것이 영광이오. 다시 태어나거든 내 목숨은 당신을 위해 바치겠소.”

아르투르는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 카리오스는 죽고 카밀만 남는 것이오. 내가 당신을 살려줄 테니, 평생 나를 위해 일하시오. 함부로 죽지 마시오. 당신에게 시킬 일이 아주 많으니까.”

카밀에게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허리춤에서 여명을 뽑아들고 외쳤다.

“나, 페르넬의 아들인 아르투르가 선언한다. 나는 카리오스의 결백을 내 명예를 걸고 보증하겠다. 이 시간 이후로 그를 의심하는 자는, 내 명예를 모독한 것으로 간주해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아르투르는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아르길락 영주를 올려다봤다.

“당신의 판결은 쓰레기요. 애초부터 결론을 정해두고 재판을 할 거면 하지 말았어야지.”

“어쩌겠나? 내가 이 땅의 주인인 것을.”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아르투르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두를 돌아보며 선언했다.

“죄의 여부는 결투를 통해 가리겠다. 나는 페르넬의 아들 아르투르다. 너희에게 감히 그것을 거절할 권한을 허용치 않겠다. 이를 거부한다면 누구도 내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르투르의 선언에 좌중의 사람들이 깊은 탄성을 들이마셨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도저히 돌이키기 어려운 정치적 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카밀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아르길락 영주는 아르투르를 비웃기 시작했다.

“좋아. 결투 재판을 수락하마! 네놈이 그렇게 좋아하는 결투로 끝을 내자꾸나. 공평하게 말이야. 단.”

그의 입가가 일그러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가문의 명예를 건 싸움이니 일 대 일 결투 아닌, 집단 결투로 치러져야 할 것이다. 칠 대 칠의 결투를 선언한다. 이 땅의 재판관으로서 결투의 형식을 정할 권리는 내게 있으니 반론은 받지 않겠다. 위고 드 란트레서와 '사생아' 아르투르는 내일 정오까지 여섯 명의 신의 있는 친구들을 데려오도록 해라. 만약 숫자를 채우지 못하더라도, 결투는 예정대로 이뤄질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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