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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49화 (49/248)

49화

끼이이이익 -

문이 열리며 어둠만이 가득한 지하 감옥으로 빛이 스며들어왔다. 아르투르는 등불을 앞세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도로 문이 닫히자, 그가 든 등불만이 유일한 빛이 되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오물 냄새가 공기를 타고 올라와 역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아르투르는 코를 막고 내려갔고 쥐들은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달아난다.

아르투르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자, 차가운 쇠창살 속에 갇힌 카밀이 그를 바라봤다. 쇠사슬에 묶인 그의 발목 아래 빵 부스러기와 먹다 남은 검은 수프가 있었다. 카밀은 초췌한 눈동자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숙여 그를 마주 본다.

“구금된 지 일주일 만에 찾아와서 미안하네. 화를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필요했거든.”

“마침 토너먼트도 진행 중이었으니 이해하오. 한창 바쁘셨겠지.”

카밀이 빈정거렸지만, 아르투르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음이 그리 편하진 않았어. 자네에겐 극형이 선고됐네. 토너먼트가 끝나고 사지를 찢어 죽일 거라는군. 나는, 자네가 날 속였다는 감정에서 벗어나는 게 힘들었네. 차라리 자네가 솔직하게 말해줬더라면 내가 미리 손을 썼을 걸세.”

카리오스가 냉소를 머금었다.

“당신이라면 말했겠소? 이렇게 될 게 뻔한데. 놈을 죽이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오. 당신을 원망하진 않소. 귀족들이란 몇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지. 당장 내가 죽이려던 망나니가 당신 약혼녀의 사촌 오빠이니만큼, 당신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오.”

아르투르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를 위해 미친 늑대와 칼부림을 했네. 나로선 최선을 다했어.”

“아, 그러시오? 대단한 일을 하셨군. 나는 당신네 왕조를 위해 청춘을 바쳤는데! 자그마치 20년을 페르넬 왕의 전쟁터에서 보냈소. 평범하게 농사나 짓던 촌부가 살인 기계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 당신 아버지는 대왕이 됐는데, 나는 무엇을 얻었는지 모르겠소.”

“- 당시는 전란의 시대였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북구인들이 우리 땅을 휩쓸었을 거야. 그렇다면 자네 가족도 무사하지 못했을 걸세.”

“내가 말하지 않았소. 누가 지배하는 지는 농민들의 알 바가 아니오. 그저 먹고 살아갈 수만 있게 해준다면 말이지. 우리 처지는 가축이나 다름없소. 북구인이 아니라 악마가 와도 다스려도 차이가 없었을 거요.”

“그건 반역자나 할 말이다!”

“좋소. 내가 반역자라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뭐요? 전쟁이 났을 때는 같은 신을 섬기는 형제라며 달콤한 말로 꼬드기더니, 전쟁이 끝나자 왜 우리를 노예 취급하며 학대하는 것이오?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명예요?”

아르투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발에 살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군. 내 화를 북돋지 말고 네 이야기를 해라. 지금 세상에서 당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나뿐이란 것도 잊지 말고.”

카리오스는 쇠사슬에 묶인 손목을 움직여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닦아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내 가족이 그렇게 죽은 건 당신 책임은 아니오. 그때 당신은 어린아이였으니까. 원하시니 자세히 말씀드리지. 나는 왕실에 젊음을 다 바쳐 충성했지만 그들은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외면했소. 그것 아시오? 내가 당신들의 전쟁을 끝나고 귀향했을 때 목격한 것은 집은 피로 가득 물들어있었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새기는 카리오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도 없이 아들딸들이 아주 잘 자랐더군. 그런데 아들 놈은 목이 매달린 채 장기를 쏟은 뒤였고, 딸은 나신으로 젖가슴이 잘린 채 죽어있더군. 참 감사하게도, 내 아내는 석궁 과녁이 되어 옆의 나무에 걸어놨소. 자기 아들딸이 어떻게 죽는 지 눈앞에서 보게 한 다음, 숨통도 끊어주지 않은 모양이더군. 내가 그 자리에 있었거든 최소한 빠른 안식을 줄 수는 있었을 거요.”

아르투르는 말문이 막혔다.

“우스운 건 이 일을 내가 모시던 영주 집안의 도련님들이 했다는 거요.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어보니 셋째와 넷째가 유명한 망나니들이더군. 여러 마을이 공포에 떨면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뭐든지 해주고 있더군. 두 사람이 여러 마을을 거덜 내놨더이다. 빌어먹을,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내 고향이 그렇게 망가질 줄 몰랐지.”

카리오스는 큰 냉소를 지었다.

“내 가족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놀잇감이 되어주지 않았소. 그래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 본보기가 되었소.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한 당신들 때문에 내 삶이, 내 가족이 망가진 거요. 이교도 침략자들이 아니라. 내가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시오? 아니야.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똑같은 놈들 투성이였어. 그래서 그때마다 모두 지옥으로 보내드렸지. 신이 일을 안 하시니까 나라도 일해야 하지 않겠소?”

카밀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환멸로 가득찬 그 눈빛은 타오르고 남은 잿더미처럼 느껴졌다. 아르투르는 그의 말에서 거짓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처벌할 순 없었나?”

아르투르는 스스로 말해놓고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뭘? 재판관이 그 망나니들의 아버지인데. 왕실에도 탄원을 넣어봤지만 딱 한 마디가 돌아오더군. '왕실은 영주들의 불입권을 존중한다.' 그게 끝이었소. 불입권이 뭔진 모르지만 왕실도 한 패인 건 확실히 알겠더군.”

카리오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허무하게 웃었다. 아르투르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짧은 대화에 불과했건만, 왜 이리 길게만 느껴지는 것인가?

“친구로서 묻겠네. 오늘 자네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실인가?”

아르투르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영혼에 걸고 맹세코 나는 단 한 점의 거짓말도 말하지 않았소. 아르투르.”

“충분한 대답이었다.”

아르투르는 횃불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자 빛이 새어 들어왔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지하 감옥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

페르디난트 대공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토너먼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회가 시작될 무렵 하이에버에 도착한 그는 아르투르가 연전연승을 거둬 우승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결국 아르길락 가문의 챔피언만 꺾어낸다면, 아르투르는 아르길락 가문의 충성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장남인 레오폴트도 여러 명성 높은 기사들을 낙마시키며 처음으로 이름을 알려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략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과 란트레서 가문이 아르투르를 지지하고 있으니 아르길락 가문만 가세한다면 왕국의 가장 강력한 대영주들이 그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르투르와 미친 늑대가 싸웠다는 소식에 걱정했지만 갈등은 자신이 잘 봉합했다.

자신의 큰 그림이 하나씩 맞아떨어져 갔다. 자신의 인맥과 수완이라면 다른 왕들의 휘하에 있는 대귀족들도 이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왕국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고, 자신은 킹메이커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관건은 단 하나, 아르투르가 스스로 칼을 뽑아들 생각만 하면 됐다.

“숙부님.”

아르투르가 나타나 고개를 숙였고 페르디난트는 빳빳한 고개는 움직이지 않은 채 손만 까딱였다. 그는 열정적인 목소리를 담아 입을 열었다.

“카리오스의 처우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의 살인은 정당했습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재판을 치러 줘야 합니다.”

페르디난트의 목소리는 아주 건조했다.

“그가 결백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가 죽인 란트레서 가문의 망나니들이 어떤 행실을 보였는지는 진절머리나게 들었으니까.”

“- 그렇다면 조처를 하셨어야지요. 이건 우리 왕조의 명예와 정통성에 큰 수치입니다.”

“그곳은 란트레서 가문의 영지였다. 란트레서 가문이 알아서 할 일이었어. 그것이 왕국의 법도고 질서다.”

“군주의 통치 권한은 서로를 보호해주겠다는 쌍무 계약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어겼다면 왕이라면 마땅히 상위 군주로서 개입했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재판을 치러주시지요.”

페르디난트는 차가운 눈길로 보냈다.

“영주의 권리를 침해했다면 더 많은 혼란과 죽음이 초래됐을 것이다. 망나니 두 명의 비행에 눈을 감아서, 왕실과 대영주들 간에 벌어졌을 대규모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면 남는 장사지.”

“ -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보다 신의를 중히 여기기로 한 것은, 명예를 지키겠다 했던 맹세는 거짓말입니까?”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제대로 봤구나. 명예는 왕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고, 기사도는 난폭한 전사들을 길들이기 위한 목줄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이지. 너도 이제 현실에 눈을 뜰 때다. 아르투르. 꿈에서 깨어나라.”

아르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으로 시작될 것일지라도,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모인다면 진실이 될 것입니다.”

“네 아버지가 명예를 지키라 남겼던 유언 때문에 그러느냐? 신경 쓰지 마라. 네 아버지도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당한 싸움만으로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야. 우리 형제는 더 큰 목적을 위해서 무고한 이들의 피를 손에 묻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릇 권력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르투르도 고개만 끄덕였다.

“숙부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오신 지 알 것 같군요. 그런 관점은 존중합니다. 숙부 덕에 그나마 왕국이 이 정도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제가 가야 할 길은 그곳이 아닙니다.”

“설마 카리오스를 공개적으로 변호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주군의 일가를 살해한 자를?

이유가 무엇이건, 모든 귀족이 너를 경멸하고 지지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왕관을 쓰기는커녕 지금 가진 것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나 역시 너에 대한 보호와 지지를 거둘 수밖에 없다.”

아르투르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섰다.

“그렇게 하십시오. 고마웠습니다. 숙부님.”

“도망칠 셈이냐? 네가 왕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네 아버지가 해내지 못한, 마지막 목표가 있지. 그 일을 나와 마치자꾸나. 자격이 되지 않는 네 형제들을 제거하고, 그다음엔 모든 대영주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네가 바라는 네가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된다. 통일이란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지. 당장만 포기하거라.”

“도망치는 게 아닙니다. 맞설 거지요. 권력을 쥐기 위해 명예를 포기하는 자가, 더 큰 권력을 쥔다고 명예를 행할 수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때가 되면 손에 쥔 것을 지키는 데 급급해지겠죠. 그래서 저는 지금 아르길락 영주에게 재판을 요구할 것입니다.”

“재판? 누가 영주에게 하극상을 벌인 농노를 위해 재판을 열어준다고 하더냐?”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려 경기를 관전중인 아르길락 영주를 바라봤다.

“그는 재판을 열 수 밖에 없게 될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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