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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47화 (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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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르투르는 검은 달 극단의 공연장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오늘 그는 갑옷 밑에 차려 입는 천갑옷인 갬비슨 대신, 사촌인 레오폴트의 비단옷을 빌려 입은 참이었다. 너저분하던 수염도 깔끔하게 면도했다. 그는 어쩐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광대 옷을 차려입은 호객꾼이 나와 공연이 시작되니 서둘러 입장해달라고 외쳤다. 공연장 주변에서 노닥거리던 관객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케이는 아르투르의 표정을 보며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 바람맞으셨다니까요.”

“아냐. 분명히 올 거야.”

케이는 애써 올라오는 웃음을 찾았다.

“체면을 자주 구기시네요. 마스터한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냥 들어가지 그래요?”

케이는 자신의 배낭에 가득한 손수건들을 내보였다. 실은 아르투르가 영지에 도착한 이후, 여러 귀부인이나 아가씨들이 케이에게 뇌물을 주며 아르투르에게 추파를 던져오곤 했었다. 대련과 체력 단련에 정신이 팔린 아르투르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거지만.

“아까 레오폴트 백작님이 무지하게 비웃으면서, 옆에 다른 예쁜 누나 끼고 들어가던데요. 나올지 말지 모른다고 말했다면서요. 그건 그냥 완곡한 거절이라니까요. 지금도 마스터한테 관심 있는 아가씨들 있던데, 아무나 데리고 들어가요.”

아르투르는 억울한 듯 말했다.

“내가 '아무' 여자나 만나려고 한가하게 공연 따위나 보러왔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시시한 여자들을 만나느니 그 시간에 칼을 한 번 더 휘두르겠다. 생각해보고 오겠다고 했지 오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케이는 딱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 마스터도 여자 앞에선 별수 없구나. 나는 저런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요란하게 터졌다. 아르투르는 속으로 여러 감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때때로 아가씨들이 일부러 애를 태우기 위해 늦게 도착한다는 경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경우가 케이의 말대로, 그냥 차인 거였다.

“케이, 돌아가자. 특훈이다.”

케이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아르투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샤를로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늦었네요.”

아르투르는 화를 내기 위해 획 고개를 돌리자 생각지 못한 미인이 그곳에 있었다. 푸른색으로 물들인 가슴골이 파인 드레스와 번쩍이는 보석 장신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본 사람이 맞았으나,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미녀에서, 오늘은 자신이 본 여자 중 손에 꼽히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있던 것 아닌가.

샤를로트는 아르투르의 곁에 붙어서 팔짱을 끼더니 눈을 찡긋이며 웃었다.

“에스코트 부탁할게요. 왕자님.”

아르투르는 왜 늦었냐며 화를 내려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극단의 직원들은 옷차림만으로 신분을 알아봤고, 편히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귀빈석으로 모셨다. 아르투르는 이동하던 도중에 다른 귀빈석에 자리 잡은 레오폴트 백작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르투르는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내가 네 파트너보다 예쁜 애로 데려온댔지.’

‘시발. 운 좋은 새끼.’

이 광경을 보는 백작의 종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면 동네 형과 다를 바가 없는 군주들이었다. 자리에 도착하자, 샤를로트는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계약이 있었거든요. 물건을 가져왔는데 대금을 줄 수 없다고 해서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꾸며서 나온 것도 오래간만이라서요. 단장에 좀 시간이 걸렸네요.”

아르투르는 조금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늦게 나온 것 아니오?”

샤를로트는 빙긋 웃었다.

“원래 미인을 얻으려면 인내심이 좀 필요한 법 아닐까요.”

그녀의 반응이 하도 노골적이라 아르투르는 그냥 웃고 말았다. 실은 오늘 옷차림을 본 순간 화는 풀어진 지 오래였다.

“뭐, 됐소. 나와준 것으로 충분하오. 난 당신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껏 차려입고 나와서 기쁜 게 더 큽니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약혼자가 있는데 이러고 나오는 건 입방아에 오르지 않겠소?”

샤를로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왕자님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제 약혼자도 제가 곁에 없을 때는 매춘부를 옆에 끼고 살지요. 남자들은 누구나 그렇다고 변명할 테지만, 그렇다면 제가 백마 탄 왕자님과 밀회를 즐기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아르투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 약간은 충격적인 사고방식이기도 했다. 보통, 귀족 처녀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정절과 순종이었다.

“그래서, 제가 약혼자를 따로 두고 외간 남자를 만나는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아르투르는 피식 웃어 보이곤 포도주잔을 부딪혔다. 귀빈들에게는 따로 요리가 전달되었고, 식사하며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개인적인 삶과 전쟁, 경제,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높은 밀도의 대화를 장기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화제가 잘 맞는다고 느꼈다. 그러던 와중, 샤를로트가 말했다.

“왕자님, 청이 하나 있는 데요.”

“말씀해보시오.”

“사석에선 말을 놔도 될까요?”

아르투르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도 비슷하고 나이대도 비슷하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역시 말이 통하네. 앞으로 잘해보자고.”

샤를로트는 아르투르의 반응에 활짝 웃었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여성의 몸으로 활동하며 적지 않은 문제를 겪었으리란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1부 공연은 '난쟁이 기사와 일곱 공주'이라는 희극이었다. 아르투르도 왕궁에서 한번 봤지만,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형제들 사이가 아니라 병사들 틈에 껴서 봤던 설움만 기억이 났다.

극의 내용은 볼품 없는 늙은 기사의 짐꾼으로 일하던 난쟁이 윌리엄이 기사의 유언으로 서임을 받고, 기사도를 실현하기 위한 여정에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극 중에서 그려지는 현실적인 기사들의 모습과 달리, 진정으로 기사도를 추구했다. 약자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 싸움에 도전했다. 그때마다 비참한 처지에 처하지만 우연히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기사와 귀족들은 모두 그를 비웃는다.

극의 절정에 이르면 용이 공주를 요구하며 왕국에 쳐들어오자, 모든 기사가 달아나지만 난쟁이 윌리엄만이 싸움에 응해, 왕국을 구해내고 공주와 결혼해,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르투르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저게 뭐가 재밌다고 다들 저렇게 박수를 치면서 보는 거지? 그냥 웃기는 희극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인기가 좋지. 저런 기사가 현실에 없으니까 백성들은 이렇게라도 위안 받고 싶은 거 아니겠어? 설령 운 좋게 저런 기사가 있다고 한들, 얼마 가지 못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쓰러질 게 뻔하잖아.”

“내 말이 그거다. 그런데 지금 관객들은 저런 삼류 연극에 몰입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단 말이지. 나한텐 오히려 다른 기사들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보여.”

“너, 예술 분야는 공부를 많이 안 했구나. 원래 대중 예술은 평범한 이들의 소망을 담아 만들어지는 거야. 현실의 기사들이 명성과 권력, 개인의 영광을 위해 싸운다는 건 누구나 알아. 하지만 극의 주인공은 달라서 사람들이 몰입하는 거야. 진정으로 약자를 위해 싸우는 기사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가 겪는 고통에 공감하며 울고 웃는 거지.”

극 중에서는 난쟁이 월리엄이 초야권을 행사하려는 거인 기사와 싸우며 공처럼 날아다니는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월리엄은 꿋꿋이 그때마다 일어나서 싸웠고, 결국 우연에 힘입어 거인 기사를 쓰러뜨리고 초야권의 악습을 폐지했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건 더 괴로운 일일 뿐이야.”

“꿈속에서 사는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하게 들리네. 어제 네가 나한테 말한 게 진심이라면, 넌 저 난쟁이 기사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걸. 뭐, 그런 점도 나쁘진 않다만.”

샤를로트의 목소리엔 약간의 우울함이 담겨있었지만, 아르투르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는 모든 생각을 미뤄두고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이렇게 평온한 시간이 또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1막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선언되었다. 아르투르는 이미 공연의 배우들을 보는 척하면서, 샤를로트의 얼굴을 옆으로 훔쳐보고 있었다. 샤를로트는 모른 척하다가 실수로 시선을 마주친 척했고, 눈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샤를로트가 부드럽게 아르투르의 머리를 감싸며 자신에게 끌어당겨 입 맞추었다.

입맞춤의 짜릿한 감각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격렬한 입맞춤을 한 두 남녀는 입을 때서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상대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서로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읽어냈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다시 입을 맞추려는 순간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저 자식 죽여 버려! 날 때렸어!”

“감히 우리 영지 사람을 때리다니!”

와아아아아아아 -!

아르투르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샤를로트도 놀랐다기보단 짜증나는 표정이었다.

“뭐야?”

곧 무대 근처에서 두 무리의 사내들이 얽혀 치열한 난투극을 벌였다. 그들은 주먹, 혹은 몽둥이와 의자를 이용해 싸웠다. 그중 상당수는 무기를 찬 병사들이라, 여차하면 유혈 충돌로 번질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끼어들어야 하는 일인지 차분히 살피다가, 기겁하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다름 아닌 곰 문양의 휘장을 입은 기사들과 늑대 문양의 휘장을 입은 기사들, 즉 위르마넨 가문과 란트레서 가문의 사람들이 싸우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두 멈춰라! 경거망동하는 자는 모조리 베겠다!”

아르투르의 벼락같은 고함이 들리자, 싸움을 벌이던 수십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아르투르는 상황을 파악했다. 서로 싸움을 벌이던 수십 명의 사내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지만, 죽음에 이르거나 불구가 될 만한 부상을 입은 자는 없어 보였다. 그때, 란트레서 가문의 병사들 너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그 자식 붙잡고 있어. 내가 팔을 잘라버리겠다.”

날카로운 장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투르는 병사들을 밀치며 나아가보니, 그곳엔 늑대의 인장 반지를 낀 호리호리한 미청년이 장검을 뽑아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호위 기사들이 붙잡고 있는 카밀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카밀의 뒤에는 피투성이가 된 난쟁이 연극배우와 상반신의 옷이 반쯤 찢어진 훌쩍이는 여배우가 있었다.

“당장 멈춰라!”

아르투르의 호령에 미청년은 움찔했지만, 곧 표독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보시오. 아르투르 경. 부하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드리겠소. 이 천한 놈이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팔을 빼앗을 거요.”

청년이 검을 들어 올렸지만, 어느 샌가 그 앞에 다가온 아르투르가 그의 검을 쥔 손목을 잡더니 반대로 꺾어버렸다. 우드득하는 소리가 나며 뼈가 으스러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미청년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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