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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샤를로트가 내민 손을 잡아야 할지 순간 망설였다. 악수는 남자들 간의 인사법으로, 친족 관계가 아닌 귀족 여성들과의 신체 접촉은 예법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악수를 청하신 거요?”
아르투르가 결례를 피하기 위해 확인 차 물어보자, 샤를로트는 옅은 미소를 띄며 답했다.
“예. 무슨 문제라도?”
그녀의 당당한 표정에 아르투르는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아르투르는 한번 헛기침을 했다. 대해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 어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르투르의 상식 속에서, 샤를로트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들이 사회적인 활동, 그것도 상행과 같이 험하고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지불해주신 대금은 확실하게 갚겠소. 이 자리에서 차용증을 써드리겠소.”
샤를로트는 호의적인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공과의 친분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지요. 공을 직접 만나기 위해 백색 산맥을 넘어온 참입니다.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자신도 이제 제법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 실감이 된 아르투르는 즐겁게 웃었다.
“미인의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그대가 내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나도 그대가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게 되길 바라오.”
“공정한 말씀이십니다. 우선 자리를 옮겼으면 합니다. 이곳은 눈과 귀가 너무 많군요.”
***
두 사람은 하이에버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야기가 아주 잘 통했다. 역사와 전쟁이 그들의 공통 화제였다. 하이에버를 다스리는 아르길락 가문의 역사를 설명하며 자기 지식을 뽐내려던 아르투르였다. 그런데 샤를로트는 오히려 자신의 지식보다 더 깊은 설명을 해주었다.
아르투르는 금세 그녀의 역사에 대한 조예가 전문적인 학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르투르는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통 아가씨들이 관심을 지니는 역사는, 아름다운 미녀와 공주들이 얽힌 사랑 이야기 아니오? 왕과 전쟁들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지니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역사도 가치는 있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여왕과 왕들에 대한 것만큼 중요하진 않지요. 한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하다, 무너지는 이야기엔 많은 교훈이 담겨있죠. 사랑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꿀 뿐이지만, 전쟁은 수백만의 삶을 바꾸기 마련입니다. 격이 다른 이야기지요.”
“놀랍군. 놀라워. 나는 여자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 가문의 안녕 외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줄 알았소.”
샤를로트는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성 안뜰에 있는 별관에 도착했다. 그곳은 샤를로트가 머무르는 숙소였고, 그녀는 자신의 호위병들을 바깥에서 대기시키고 둘이서 들어갔다.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상황 같소만.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서 그대의 명예에 누가 되진 않겠소?”
샤를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는 태도였다.
“어차피 여인의 몸으로 상행을 다니다 보면 온갖 소문이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써서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사실이 아닌 것에 신경 쓸 필요 없지요.”
샤를로트는 별관에 딸린 지하실로 아르투르를 안내했다. 조금 냄새가 나긴 했지만, 누가 들을까 걱정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샤를로트는 직접 의자를 두 개를 들고 왔고, 아르투르는 기겁을 하며 자신이 대신 받아들고자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제가 손님을 모셨으니 응당 제가 대접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결국 그녀는 기어이 자기가 테이블을 셋팅한 후, 유려하게 세공된 유리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오른손에는 유리에 담긴 포도주 한 병이 들려있었다.
“앙저뱅 지방에서 가져온 포도주입니다. 아마 귀 공의 입맛에도 맞을 겁니다.”
아르투르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겁 없는 아가씨의 행동이 퍽 재밌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외간 남자와 밀실에서 포도주를 마신다는 게 부담되진 않으시오?”
질문의 내용과 달리 그것은 힐난이 아닌 호기심 어린 질문이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샤를로트의 대답하는 목소리는 평온했다.
“글쎄요. 제가 그런 것에 위축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경을 뵈러 올 일이 없었겠지요. 저는 소심한 숙녀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랍니다. 그러니 한잔 하시죠. 술이 조금 들어가면 이야기가 훨씬 매끄러워지니까요.”
두 사람은 짠 - 하고 유리잔을 부딪쳤다. 시큼한 포도주 향이 코를 타고 올라왔다.
“이 포도주가 왕대비 엘레노어를 가장 강력한 영주 중 한명으로 만들어준 상품이라지요. 포도주 장사로 군대를 꾸리다니, 재밌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와 왕대비는 사이가 결코 좋았던 적은 없지만, 걸물인 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긴 하오. 자,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무엇 때문에 백색 산맥을 건너 나를 만나러 온 것이오?”
“경에게 사고 싶은 게 있어서 이곳까지 왔지요.”
“난 섭정 직위 빼면 가진 것 하나 없는 알거지요. 내 약혼자는 팔 만한 게 많지만.”
“아니요. 경께선 무엇보다 귀중한 상품을 가지고 계시죠. 정보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눈을 껌뻑였다. 뭘 산다고?
“정확한 정보는 미래를 앞당겨볼 수 있게 해줍니다. 미래를 먼저 보는 자가 기회를 차지하고, 기회가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지요. 공은 데네토르 왕국을 지나가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외부인들은 모를 속사정들과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시죠.”
샤를로트의 예리한 눈빛이 아르투르를 직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먹이를 찾는 매처럼 단 하나의 숨겨진 정보라도 얻고자 했다. 그녀는 아르투르의 표정에서 눈빛, 감정, 태도, 어투를 모두 살피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대화가 흥미롭게 느껴졌기에,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어떤 것에 대해서 알고 싶으시오?”
“우선은 세 왕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분들과 형제들이니, 아시는 것이 많겠지요.”
두 사람은 그 뒤로 한참을 왕국에서 곧 벌어질 내전에 관해 이야기했다. 샤를로트는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고, 자신이 흘려주는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 진실에 근접한 추론을 해내곤 했다.
‘인상적인 능력이군. 왕국 바깥에서 정국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 정도로 유추해 내다니.’
처음에는 단순한 흥밋거리로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아르투르도 점차 현 상황에 대한 상대의 견해가 궁금해졌기에 진심으로 대화에 응했다. 그렇게 말이 오가던 중, 무게감 있는 화제를 먼저 꺼낸 것은 샤를로트였다.
“따라서,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가장 유리한 계승자는 당신입니다. 아르투르 공.”
말을 마친 샤를로트는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르투르는 황당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내가 제일 유리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난 사생아라서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오.”
“바로 그 점 때문에, 공께서는 가장 많은 지지 세력을 얻게 되실 겁니다. 오'데르만 왕가가 약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까요. 당장 제 고향, 레무리아 반도에 있는 도시 국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희는 데네토르가 한명의 강력한 왕 아래 통합될 경우, 저희의 안보를 보장 받기 어려워집니다. 페르넬 대왕의 아들 중 한명이 왕국을 규합해 반도로 진격해온다면, 어느 도시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왕이 되면 데네토르가 가장 약해질 것이기 때문에 레무리아 인들이 나를 지지 할거다?”
샤를로트는 아르투르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는 지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그렇진 않아보였다.
“저희들만이 아닙니다. 오'데르만 왕조의 힘에 눌려지내는 왕국의 유력 가문들, 심지어 교황 성하께서도 왕조의 약화를 바라고 있지요. 그리고 공께서 왕이 되신다면 공을 지원해준 세력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귀족들과 교회의 권리가 확대될 것이고, 상업적인 권리들은 레무리아의 도시들이 장악하게 될 겁니다.”
아르투르는 헛웃음을 지었다.
“반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왕이겠군. 내가 왜 그런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샤를로트는 포도주가 가득 담긴 잔을 흔들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부 대륙의 주인이란 자리는 그만큼 매혹적이니까요. 달리 말하면, 지금 기회가 아니면 공은 왕이 되실 기회가 없습니다. 공의 형제들과 달리 독자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반면, 지금 왕위에 대한 도전을 시작하신다면 대륙의 온갖 세력들이 당신을 지원할 겁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언제쯤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드실 겁니까?”
아르투르는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재밌게 될 줄이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궁정의 사생아가 이제는 세상의 주목을 받는 왕위 계승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 즐겁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이제 다들 내게 관심이 많군.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내가 왜 오늘 만난 사람에게 그 질문에 답해야하오?”
“제가 공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돈과 명분이요. 레무리아의 상인 가문들과 공을 연결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군자금 문제는 단숨에 해결될 겁니다. 게다가 저희 가문이 교황청에도 연줄이 있으니 그걸 중계해드릴수도 있죠. 교황 성하께서 사생아 신분을 면제해주신다면, 공은 합법적으로 왕위에 도전할 권리를 얻게 되실 겁니다. 대가는 싸지는 않겠지만, 지금 공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요.”
“예컨대 아가씨께선 내가 벌일 왕위 계승 전쟁에 투자를 하러 오신 셈이군.”
샤를로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말이 통하는 사내였다.
“저로써도 확신할 수 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위험부담도 많이 져야했구요. 하지만 대화를 해보니… 그럴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공께선 충분히 경쟁력 있는 왕위 주장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계획을 일러주신다면 그것에 맞춰 저희 가문이 자금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유리잔에 남은 포도주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샤를로트를 가만히 내려 봤다. 자신 또래의 이 곱상한 아가씨는, 예쁘장한 얼굴 뒤에 승부사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이 여자는 큰 위험을 짊어지고 자신을 찾아왔으니 자신도 진심을 밝혀주는 게 합당한 도리리라.
“그렇다면 내 요구 사항을 말씀드리지. 더 이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오. 나는 왕위 계승 전쟁에 나설 생각은 없소.”
샤를로트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신지요?”
“말 그대로요. 나는 지금 이 상태가 좋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고, 다스릴 영지도 있고, 괜찮은 약혼자도 있단 말이오. 언젠가 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길 원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그런데 자꾸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자신들의 전쟁에 끼우려 드는군. 숙부님도 그렇고, 조프루아 경도 그렇고, 이젠 당신마저 그러는구려.”
“그렇다면 아르투르 공은 왕위에 대한 열망이 없으신 겁니까? 공은 그렇게 생각할 지라도, 공의 형제들은 생각이 다를 텐데요.”
“물론 형님들이 날 해치려 든다면 그땐 자기 방어는 해야겠지. 생각이 복잡했는데, 당신과 이야기하다보니 정리가 됐소. 나는 내가 왕이 되면 이득을 얻는 자들에게 등이 떠밀려 왕이 되지도 않을 거고, 형님들이 무서워서 달아나지도 않을 거요. 나는 기사 아르투르요. 언제나 당당할거고, 내 명예에 충실할 거란 말이오.”
아르투르는 말을 마치고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샤를로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아르투르의 어조는 단호하고 당당했다. .
“… 놀랍군요. 손만 내뻗으면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데, 그걸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아르투르는 흥겹게 웃었다.
“더욱이, 사생아라는 열등감에 가득 찬 채, 야망만 넘치는 풋내기가 그럴 수 있을 줄은 모르셨겠지.”
아르투르가 말한 바가, 바로 샤를로트가 그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얼마 전까진 그랬지.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소. 세상 사람들이 날 사생아라고 부르건, 북구인 잡종이라고 부르건 아무 관심도 없소. 그러니 아버지의 유산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거요. 내게는 내 운명을 개척할 힘이 있고, 나는 내 명예 앞에서 내가 당당하오. 그런데 남들의 시선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소?”
샤를로트는 턱을 괴고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여전히 의구심에 찬 표정이었다.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왕관을 쥘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아르투르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의 대화는 여기까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내일 사적으로 만납시다. 그땐 좀 더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소. 샤를로트.”
그는 빙긋 웃으며 샤를로트의 눈을 응시했고, 샤를로트도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전 약혼자가 있는 몸인데요. 외간 남자와 사적으로 만나긴 좀 그러네요.”
“나도 마찬가지니 걱정 마시오. 편히 즐깁시다. 내일 정오에 검은달 유랑극단이 재밌는 공연을 한다니, 그곳에서 만납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