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45화 (4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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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전역을 통틀어, 오직 열두 명의 기사만이 황금 망토를 입을 수 있었다. 왕실 기사들은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로, 다른 어떤 가치보다 왕의 수호를 우선시했다. 이들은 기사가 이를 수 있는 명예의 정점으로 존중받았다.

아그라베인 경은 그 지위에 걸맞은 격을 지닌 사내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 그는 아르투르보다 힘과 민첩함이 떨어졌지만, 노련한 기술로 그를 패배시켰다. 물론 간발의 차이긴 했지만. 자리에 쓰러졌던 아르투르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아직 왕실 기사들에겐 어려운 것 같군요.”

아그라베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답한다.

“저는 왕실 기사들 가운덴 실력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다른 기사들과 맞서신다면 결과는 볼 필요도 없겠지요.”

‘거짓말.‘

왕실기사단장인 아르투르의 옛 마스터는 아그라베인 경은 왕실 기사들 가운데서도 중상위권에 위치한다고 평가했다. 연이은 시합으로 힘과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그를 여기까지 몰아붙였다.

‘어지간한 왕실 기사들은 내가 이길 수 있겠어.’

“어쨌든 즐거운 대련이었습니다. 술이라도 한잔하러 가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하지만 아그라베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금 망토의 기사들은 언제고 정신이 온전해야 합니다.”

아르투르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와 술 한 잔 하며 이야길 나눠보고 싶었는데. 오죽하면 웃지 않는 아그라베인 경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으니.

“뭐, 그렇다면 아쉬운 대로 악수라도 합시다.”

아르투르가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아그라베인은 어떤 미소도 짓지 않은 채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아르투르의 의아한 눈빛에 아그라베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답했다.

“데네토르의 루이스 대왕께서 도파뉴 백작의 섭정 아르투르 경에게 안부를 전하십니다.”

“!”

“그분께서 전하시길, 이번 토너먼트는 순수한 친선 목적의 시합이니 무엇도 걱정하지 말고 잘 즐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력 가문들이 모의해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고자 한다는 불온한 소문은 헛소문에 불과하니 믿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덧붙여, 페르디난트 대공과 아르투르 공이 각별한 사이임을 알고 계시니 페르디난트 대공께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이 전언만 잘 기억해주시면, 형제간의 우애는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루이스의 경고였다.

모든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되는.

이번 토너먼트는 정치의 장이다. 네가 숙부의 도움을 받아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얻고, 왕이 되고자 하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알아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너도 내 적이 될 것이다.

그런 내용의 선언이자, 위협이었다.

“저는 역할을 다 했으니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그라베인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마치고 뒤로 돌아섰다. 황금 망토가 펄럭였고, 그의 뒤로 무장 종자들이 뒤따라갔다. 아르투르는 그의 뒤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이 싸움은 못하시더니 정치 감각은 아주 예리하시군.’

아르투르는 피식, 하고 웃었다. 왕위의 유지에는 이렇게 재빨리 대처하시는 분이, 도파뉴 백작령에서 있던 일은 그때까지 손 놓고 내버려두셨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앞으로의 행보를 어떻게 한담?’

지금까지, 왕이 되기 위해 형님과 싸울 마음은 없었다. 숙부가 뭐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기사였지, 음모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일거수일투족을 견제당하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젠 내가 형님의 감시 대상에 올랐으니 쉬지 않고 견제를 해오시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둘 중 하나였다. 납작 엎드려 형님의 충신임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깃발을 내걸고 왕위를 주장하며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둘 다 내키지 않는데.’

아르투르는 깊은 짜증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지 않던 싸움의 틈바구니로 말려드는 모양새였다.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댈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권력의 속성이 이렇다면, 자신은 권력을 다루는 일과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숙부는 여기까지 내다보신 거군. 이런 상황이 되도록 날 몰고 갔거나.’

아르투르는 고민으로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마음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는 신뢰 할 만한 동료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레오폴트였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촌이며, 왕궁에서 같이 자란 그라면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봐. 진짜라니까. 너를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 레오폴트 백작께서는 술에 가득 취해선 여종업원들에게 구애하고 있었다. 왕족의 끈질긴 껄떡댐에 종업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에게 한신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케이라면 어린 나이에도 상당히 분별력이 있는 친구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으니 신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사들의 대련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금세 마음을 거두었다.

‘…똑똑한 녀석이긴 한데, 그렇다고 정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야.’

나머지 인원들은 자신이 완전히 신뢰할 순 없는 이들이거나 정치에 무지한 자들이었다. 페르디난트 숙부는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라고 이야기할 것이고, 크리스티안은 더 출세할 수 있는 쪽에 붙자고 할 것이다. 카밀은 귀족을 증오하니 별로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진 못할 것이었다.

그는 영지에 두고 온 알튼 남작이 그리워졌다. 그 늙고 의리 있는 귀족이라면 분명 판단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제기랄. 숙부의 도움을 받은 게 문제였어. 차라리 만프레드에게 돈을 주고 물러가게 할 걸. 그랬다면 이런 문제에 휘말리진 않았을 거야. 애초에 백작과 약혼한 것도 얼떨결에 추진된 거라고, 난 내가 구한 땅이 폭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그것 때문에 형님들과 피를 보며 싸워야 한다고?’

아르투르는 스스로 잔에 술을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야망, 형제애, 왕국의 미래, 권력 투쟁, 기사의 명예와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며 아찔하게 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데. 이야기할 상대도 없으니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지나가는 기사들은 술을 권하려다 자기네들끼리 지나쳤다. 아르투르가 스스로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어두운 생각의 바다에 빠져 있던 아르투르에게, 뱃살이 두툼한 술집 주인이 다가왔다.

“저, 왕자님?”

아르투르는 자긴 왕자가 아니라고 고쳐주려다가 말았다. 왕자라고 불리는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으니까. 술집 주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저, 오늘 연회비용에 대해 계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술집주인은 고개를 숙이며 양손으로 장부를 내밀었다. 장부에는 숫자와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르투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자신의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금화가 부딪치며 짤랑 이는 소리를 냈다.

“자, 여기 있네. 거스름돈은 자네가 가져도 좋아. 오늘 연회는 아주 만족스러웠거든.”

술집 주인은 금화 주머니를 받아 개수를 새어보곤, 민망한 표정으로 아르투르에게 재차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주십시오. 왕자님. 깎아드릴 수는 있지만… 액수가 너무 모자랍니다.”

그 말에 아르투르는 잠기운이 번쩍 달아났다. 그는 장부를 낚아채 목록을 읽어 내려갔다.

-양과 닭 각각 2000마리, 돼지 1000 마리, 맥주 500통, 호밀빵 2000 개, 대형 천막 50여개 대여료, 파손된 기물 목록…-

아르투르는 그는 기겁한 표정으로 술집 주인에게 외쳤다.

“이게 대체 뭔가?!”

“몇 번이고 확인해봤지만 …이게 맞습니다. 주문하신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인근의 농가와 상인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뉘 면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아르투르는 뒷골이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연회를 연다고 했다지만…· 도대체 이 터무니 없는 비용은 어디서 나온 거란 말인가?

“양, 돼지, 닭을 다 합치면 5천 마리야! 대체 뭘 어떻게 하면 하루 만에 짐승 5천 마리를 먹었다는 건가!”

아르투르의 고성에 술집 주인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기사 나으리들이 워낙 잘 드시기도 하셨고, 그분의 종자들도 마음껏 드신 지라… 또한 축제가 열렸다는 소식에 몰려든 구경꾼들까지 합치면 그 정도로 먹고도 남습니다.”

여관주인은 조심히 손가락을 들어 수북이 쌓여있는 술통을 가리켰다.

“…내가 기사들에게 마음껏 먹고 마셔도 좋다고 했지, 아무나 초대해도 된다거나 그 일행도 먹여준다는 이야긴 한 적이 없는데?”

“용서하십시오. 그런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하셨습니다.”

술집 주인은 턱하고 두루마리를 내밀었고, 아르투르가 살펴보니 사실이었다. 자신의 서명도 떡하니 있었다. 이제서야 전후 상황이 떠올랐다 기사들과 술내기를 하던 중, 취기가 잔뜩 올라 오늘 돈은 자신이 얼마든지 낼 테니 누구나 마음껏 축제를 즐겨도 좋다고 선언하며 계약서에 사인했었지.

아르투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발, 염치없는 돼지 새끼들. 작작 처먹었어야지… 얼마나 처먹었으면 금화 천 닢이 나와?”

비탄에 빠진 아르투르의 목소리를 듣는 술집 주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여나 아르투르가 귀족의 권위를 내세워 떼먹기라도 한다면 자신과 이 인근의 상인들은 때로 파산하게 될 것이었다. 이번 행상을 위해 많은 빚을 졌던 자신은 미래가 없어질 테니, 이곳에서 밧줄에 목을 매고 죽으면 딱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지불해준다면? 자신과 인근 상인들은 땡 잡은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 역전, 평생에 걸쳐 팔 짐승들을 다 판 것이다.

아르투르는 계속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네. 하이에버를 떠나기 전에 지불해주지. 당장은 나도 현금이 없네.”

술집 주인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한번 되묻기로 했다.

“…저, 송구하지만 담보라도 하나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냥 좀 가게.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어.”

아르투르는 눈을 문지르며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희도 돈이 있어야 장사를 계속 할 수 있습니다. 사정 좀 봐주십쇼.…”

아르투르는 머리에 손가락을 짚었다. 너무 기분을 냈던 모양이었다. 금화 천 닢은 고급 전투마 여덟 필에 살 수 있는 거금이었고, 평민도 가문 이름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백작에게 내지 못할 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충동적으로 쓸 만한 금액은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현금이 없어. 못 낼 돈은 아니지만, 이걸 위해 다른 영주들에게 손을 벌리면 내 위신이 떨어질 거야. 아오, 어쩐담.’

아르투르가 테이블에 손을 타닥, 타닥 두드리며 방법을 궁리했고 여관주인은 불안해하며 기다렸다. 그때, 옆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그 금액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여성을 호위하고 있는 호위병이 품에서 금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술집 주인은 젊은 여성과 아르투르를 향해 잇달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더니 떠나갔다. 울상이던 그의 표정은 환희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아르투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시름 덜었군요. 날 도와주신 아가씨는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아르투르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여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큰 키와 긴 갈색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의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갈 곳이 들어가고 나온 곳이 나온 몸매도 제법 봐줄 만 했고, 얼굴도 귀티나게 생겼다. 특이한 것은, 그녀는 여자 옷이 아닌 남자들처럼 바지와 셔츠를 입은 차림이었다.

그녀는 아르투르에게 당당히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저는 이곳 발음으로는 샤를로트, 샤를로트 델 라이랜더입니다. 피오렌치아 상인 길드의 마스터 중 하나로, 북부 상행을 책임지고 있지요. 백인을 벤 아르투르 오'데르만 공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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