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44화 (4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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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해가 중천에 떴어요. 일어나셔야죠.”

케이가 아르투르를 흔들었다.

“… 아…. 머리야.”

아르투르가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생각건대 자신의 꼴은 말이 아닐 것이다. 머리도 정돈되지 않았고, 면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종자 생활도 끝났는데 이제 수염이나 기를까?’

지금의 자신은 너무 어려 보였다. 좀 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선 수염이 필요했다. 콧수염은 위생상 불결하니, 턱수염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과 비슷한 몰골인 기사들 수십 명이 있었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거나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자들, 토악질을 해대는 자도 있었다. 종자들은 기사를 깨우거나 업어가려고 용을 썼다.

혼미하던 그의 정신을 깨운 것은 차가운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어제 레슬링을 하던 간이 원형 경기장에서 조프루아가 두 명의 기사와 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기사를 상대로도 데리고 놀다시피 하며 싸웠고, 그의 무용에 구경꾼들이 박수를 쳤다. 아르투르가 웃음을 지었다.

“일어나자마자 열심이시군. 케이, 먹을 걸 좀 가져와라. 배부터 채워야겠어.”

“네!”

두 사람은 나무 그릇에 담긴 닭고기를 뜯어 먹으며 조프루아가 차례로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사람보단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다. 먼저 나간 도전자들이 손쉽게 쓰러지자, 그와 싸우겠다는 도전자들이 없었다. 나와도 일방적인 경기뿐이었다.

“오늘도 형님의 독주를 막을 자는 나뿐인가.”

아르투르는 하품하며 지루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새롭게 도전한 신참 기사가 칼자루에 얼굴을 얻어맞고 실려 나갔다. 그때, 새로운 기사 무리가 도착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서부 왕국 출신들이군.”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망설임 없이 창 한 자루만 쥐고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서부의 기사들이 이름을 연호했다

“로드리고! 로드리고! 로드리고!”

로드리고는 조프루아보다 머리 세 개는 작았고, 덩치는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유롭게 조프루아의 주위를 돌며 창을 허공에 휘둘러 자신의 무예를 뽐냈다. 마치 장난감 다루듯 창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아르투르에게 감명을 주었다. 고작 몇 년을 단련해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거, 애송이들이나 때려 잡아놓고 뭐가 그리 자신만만하신가?”

로드리고의 말에 조프루아는 웃음을 지으며 칼을 고쳐 잡았다.

“내 반토막만한 놈이 배짱은 좋구나.”

이번엔 북부 출신의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골격이 장대한 흰 피부의 사내들이었다.

“조프루아! 조프루아! 조프루아!”

왕국의 서부와 북부는 일찍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관중들 사이에선 은근한 경쟁심이 느껴졌다. 마침 두 기사는 서로의 지방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명성도 높고, 신분도 고귀한 자들이었다.

경기장을 돌며 탐색전을 벌이던 그들은 곧 교전에 들어갔다. 조프루아가 앞으로 달려 나가 묵직한 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날렵하게 공격을 피하더니, 창의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공격했다. 조프루아는 방어를 굳혔지만, 로드리고의 속도가 더욱 빨랐기에 막기 쉽지 않았다.

몇 차례 무기를 주고받자, 서로의 장단점이 명확해졌다. 조프루아의 공격은 묵직하지만 맞지 않았고, 로드리고의 공격은 재빨랐지만 치명적이지 않았다. 누가 앞선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갑옷을 입지 않은 평복 대련이었기에, 승리는 로드리고에게 돌아갔다. 결국 조프루아의 목젖 아래 창이 겨눠진 것이다.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지다니. 역시 검은 내 손에 안 맞는단 말이오.”

로드리고는 웃음을 지으며 창을 거둬들였다.

“전쟁터에서도 그런 말이 통하나 봅시다.”

“전쟁터에선 갑옷을 입고 싸우겠지. 그러면 당신의 그 쥐좆만 한 창으론 상처 입힐 방법이 없소.”

“그건 당신 생각이지. 나도 실전이었다면 창에 독을 발라 나왔을 거요.”

두 사람은 경기가 끝나고도 신경전을 벌였다. 겉으로 두 사람은 악수하고 서로의 실력을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적의를 감추고 있었다.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통합하기 전까지 북부와 서부는 서로 원수였거든. 300년간 전쟁을 했으니 사이가 나쁠 만도 하지. 진심으로 싸우지 않은 게 다행일걸?”

그들이 경기장에서 나가려고 할 때, 아르투르는 먹던 닭다리를 뒤로 던지고 경기장에 난입했다. 여명이 칼날에서 뽑혀 나온 뒤였다.

“두 분. 다시 무기를 드시오.”

조프루아가 대답했다.

“흠? 대련은 언제든지 환영이네만. 누구와 할 건가? 아우님?”

로드리고도 창대를 어깨에 걸치고,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동시에 덤비시오. 한 분만 덤벼서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소.”

로드리고와 조프루아는 서로를 어이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애송이가 뭐란 거냐?

“그쪽에서 오지 않으면 내가 가겠소.”

아르투르는 여명을 높이 들고 조프루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

얼마 뒤, 구경꾼들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저 건방진 도련님이 흙바닥에서 뒹굴며 공격을 피해내는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자신 있게 두 명의 실력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여 쩔쩔매는 애송이의 모습만 눈에 보였던 까닭이다.

“일 대 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했잖소? 사생아 경.”

로드리고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서 창을 돌렸다. 자신이 아르투르의 행동을 견제하고 그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이, 조프루아가 공격에 집중한 것이 전부였음에도, 아르투르는 조프루아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진정한 실력자가 누군지 보여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 아우님!”

조프루아가 소리를 치며 검을 내리쳤다. 이번에도 아르투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간신히 공격을 쳐냈다. 잇달아 로드리고의 창이 날아들자 이번엔 또 바닥을 굴러야 했다. 로드리고는 그의 목에 창을 겨눌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낄낄거리며 끝을 내지 않았다.

“난 아직 지지 않았단 말이오! 덤비시오!”

아르투르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다시금 도전했지만, 번번이 깨져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누가 봐도 승산이 없었다. 아르투르의 실력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애초에 상대인 로드리고와 조프루아 역시 젊어서부터 두각을 드러내던 명성 높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아르투르보다 열 살 이상 많아 경험도 많고 아직 노화도 오지 않은 무인의 절정기에 있었다. 이 대 일은 커녕 일 대 일로 싸워도 이기기 어려운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이 기사들은 아르투르를 허풍쟁이 경이라고 불리며 놀리고 있었다. 명성 높은 실력자들이 싸움을 벌인다는 소식에 하이에버에 있는 거의 모든 기사가 몰려들었고, 그들은 아르투르가 바닥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며 더욱 웃었다.

“무예는 몰라도 허풍은 최고시구만! 오늘 뒤로는 허풍쟁이 경이라고 불러야겠소.”

“허풍쟁이 경! 힘내시오! 마음만은 삼 대 일도 이길 수 있을 거요!”

케이는 울상을 지은 표정으로 대련을 보고 있었다. 그때 레오폴트가 툭, 하고 케이의 어깨를 치며 옆에 앉았다.

“인마, 왜 그렇게 울상이야?”

“… 이 대 일쯤이라면 마스터가 간단히 이길 줄 알았죠. 일 대 백도 이기셨으니까요.”

레오폴트는 피식 웃었다.

“로드리고 경과 조프루아 경 모두, 자기 지역에선 이름깨나 날리는 기사들이야. 일개 도적들과 비교하는 건 모욕적인 일이지. 둘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아르투르가 대단한 실력을 갖췄다는 증거야.”

레오폴트가 말하는 사이, 경기는 더욱 빠르게 진행됐다. 슬슬 대련을 끝내고자 마음먹은 두 사람은 좌우에서 협공을 가했고 아르투르는 정신없이 막으면서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그때 레오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투르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결국 코너에 몰린 아르투르는 검을 떨어뜨렸다. 아르투르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항복! 항복! 내가 졌소! 두 분 모두 내가 형님으로 모시겠소. 또한 오늘 술값은 내가 책임지리라.”

그 말에 몰려들었던 백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폭소했다. 아르투르는 온몸에 먼지와 진흙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있었다. 사생아가 왕의 아들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자들은 아주 속 시원해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을 쳤다.

“아이고, 우리 미련한 마스터. 이럴 거면 허세는 왜 부려가지고… 사람만 우스워졌잖아요.”

하지만 레오폴트는 정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저거, 괴물 새끼 다 됐네. 바야르 경이라도 보는 줄 알았잖아.”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새끼 일부러 진 거야. 제대로 안 싸웠어.”

그제야 케이는 아르투르의 상대들이 마냥 웃고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겉으론 농담을 던지고 있었지만 눈빛은 긴장하고 있었다. 요제프와 같은 실력자들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르투르를 보고 있었다.

아르투르의 이 대 일 결투가 우스꽝스럽게 끝나고, 그가 주최하는 연회가 열리자 가득 모여든 기사들은 술과 고기를 미친 듯이 퍼먹으며 아르투르의 패배를 안줏거리로 삼았다. 북부와 서부의 기사들이 동석해서 같이 그를 소재로 떠들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그들에게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일화가 생긴 것이다.

수많은 양과 돼지들이 끌려와 도축 당했고, 끊임없이 고용인들이 몰려와 술잔을 채워주었다. 기사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기사가 모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흔치 않았기에 모두 흥분해있었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기예를 두고 시합을 벌였다. 레슬링, 검술, 승마술, 궁술, 술 싸움. 심지어 오줌 멀리 누기까지. 모든 종목에 걸쳐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기사들이 투덕댔다.

특히 이번 연회에는 명성 높은 기사들도 대거 참가했는데, 평소에는 자신들과 비슷한 실력의 대련 상대를 만날 수 없었지만, 이곳에선 걸맞는 실력의 적수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모임의 주최자로서 술자리를 돌며 왕국 전역에서 온 기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온갖 시합에도 참가해 모든 종목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레슬링과 검술은 한 번의 패배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에게 패배를 안긴 기사는 왕실의 친위기사인 ”용감무쌍한” 아그라베인 경이었다. 아르투르는 넘어진 자리에서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났고, 아그라베인 경은 아르투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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