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42화 (42/248)

42

아르투르의 동행자들은 레오폴트 백작, 소피 부인, 크리스티안과 카밀이었다. 레오폴트 백작과 크리스티안은 각각 토너먼트에 직접 참가할 생각이었고, 소피 부인은 그녀의 본가인 란트레서 가문이 참석한다는 소식에 혈육을 보기 위해 나섰다.

아델라이데는 참석을 희망했지만, 겨울 날씨가 위험할 수 있다는 아르투르와 소피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알튼 남작은 아르투르를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기 위해 남았다.

하이에버가 가까워지자, 한 무리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검은색 바탕에 호랑이가 새겨진 깃발이었다. 두 행렬은 서로를 보며 말을 멈춰 세웠다. 선두에 있던 기사는 투구를 벗으며 아르투르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투르 경. 레오폴트 공과 소피 부인도 환영하는 바입니다. 아르길락 가문의 후계자인 요제프 폰 아르길락입니다.”

요제프는 풍성한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였다. 아르투르가 일행을 대표해 앞으로 나서자, 요제프는 오른손에 쥔 물통을 건넸다. 아르투르는 그것을 마신 후, 요제프의 종자가 내민 소금을 입에 넣고 넘겼다.

무장 집단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경계심이 봄눈이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서로를 손님과 주인의 자격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상호 간의 안전과 신뢰가 확보된 셈이었다. 손님은 머무르는 동안 주인집의 규칙을 준수하겠다는 선언이었고, 주인은 손님이 자신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접대의 관습은 실로 오래되어, 이것을 어기는 자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누구도 이것을 어기려 들지 않았다. 친족살해자보다 중한 죄가 있다면 손님을 죽이거나, 손님으로 가장하여 주인을 해하는 자들이었다.

“아르길락 가문의 환대에 감사드리오. 본인을 추천해주신 것에도 고마움을 표하는 바요. 사자공 요제프.”

“백인을 벤 기사를 모시는 것이 영광이지요. 귀한 분들이 오셨으니 직접 성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경에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말을 마친 요제프는 묘한 눈길로 아르투르를 쳐다봤다. 아르투르는 그가 자신에게 강한 호기심과 경쟁심을 느끼고 있다고 여겼다. 실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요제프는 창술과 기마술의 달인으로, 왕국 최고의 기사로 알려진 인물 중 하나였다.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이 남자와 맞서게 되겠지. 그를 패배시킨다면, 세상은 내 이름을 다시 평가하게 될 거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인 페르넬이, 요제프의 아버지를 토너먼트에서 패배시킨 후 복속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승리해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한다면,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는 정치적 명분에도 부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엔? 정말로 왕이 될 생각이냐? 형제들을 죽이고, 숙부의 꼭두각시가 될 길이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아르투르는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을 경고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무용담에 대해 물어봤다. 마음속으로는 상대가 토너먼트에서 어떤 경쟁자가 될지 가늠하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보이는 호의는 진심이었다. 강력한 자들과 맞설 기회를 얻었다는 호승심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르투르 경, 이번 토너먼트에는 저명한 기사들이 많이 참석합니다.”

아르투르의 표정은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하하하하! 그것참 기대되는군요. 그래. 어떤 참석자들이 왔습니까?”

“이름만 들어도 흥미로우실 겁니다. 북부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떤다는 ”미친 늑대” 조프루아 경, 마상창 시합 최다 우승자인 기욤 경, 왕실 기사인 아그라베인 경도 오셨습니다. 그 외에도….”

요제프는 그 뒤로도 한참을 참석자들의 명단을 부르며, 그들의 별칭을 소개했다. 모두 아르투르가 한번 쯤 들어본 뛰어난 명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사실상 왕국에서 가장 저명한 기사들의 절반쯤은 이곳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한편으로 아르투르는 자신의 마스터가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랬더라면 우승은 포기해야 했을 테니까.

참가자들의 명단만으로도 아르길락 가문의 위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인원을 한겨울에 불러 모을 수 있다니.

‘수많은 유력 가문들이 아르길락 가문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기사들을 보냈군. 이 정도면 역대 최대 규모겠는데.’

“참가자들의 명단은 마음에 드십니까?”

긴 설명을 끝낸 요제프의 말에, 아르투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름을 떨칠 무대로는 제격이군요. 이런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것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아르투르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요제프는 크게 웃었다. 실은 요제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사의 길을 걷는 사람치고, 이런 기회를 마다할 자는 드물었다. 왕국의 강자들과 겨뤄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더욱 성장할 기회를 마다할 기사가 어디 있겠는가?

어느 사이 그들은 하이에버의 수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요제프는 정중히 작별 인사를 했다.

“저는 다른 손님들을 맞이하러 가보겠습니다. 숙소나 식사에 관한 것은 집사에게 이야기해두었으니 잘 처리될 겁니다. 이틀 후 아버지께서 참석자들을 환영하는 만찬을 열 예정이니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십시오. 토너먼트의 시작은 일주일 후입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아르투르는 세부적인 사항은 크리스티안에게 위임한 후, 종자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 레오폴트와 단둘이 성을 나섰다. 호위 기사들이 그들을 말렸지만 이 치기 어린 귀공자들을 말릴 순 없었다.

하이에버의 회색 거성 주변에는 수많은 막사와 행렬이 가득했다. 부와 명예, 야망을 위해 몰려든 기사들과 유력 가문들이 데려온 수행원들의 인원수를 합치면 수천에 달했다. 인근 주민들은 진귀한 구경을 하고자 몰려들었고, 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이는 일이 드물기에 이 기회에 한 몫 잡으려는 상인들도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먼 지역에서 온 상인들과 광대들, 단순한 여행자들, 그리고 서로의 기량을 겨누어보는 기사들과 심부름에 바쁜 귀족의 하인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은 도시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즐길 거리가 가득한 기회를 놓치면 바보라 이 말이지.”

레오폴트는 활짝 웃으면서 앞장섰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 모두 기사 서임을 받은 뒤부터 한창 바빴던 까닭이다. 특히 아르투르는 몇 달 만에 긴장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두 귀공자는 흥미로운 것을 찾아 축제 현장을 둘러봤다. 흥겨운 음악 소리와 상인들의 흥정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에서는 우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를 두고 내기를 하는 도박사들도 있었다.

“동방에서 들어온 진귀한 비단이 있습니다! 귀부인들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선물이라지요!”

“그 이름 높은 검은 달 유랑극단이 왔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입장료 단돈 은화 한 닢! 최고의 공연으로 모시겠습니다!”

“한 푼만 줍쇼! 귀족 나으리들, 복 받으실 겁니다!”

그들의 체격과 신분은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미남으로 유명한 레오폴트를 보고자 많은 여인들이 가득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레오폴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에 눈짓으로 화답했다. ‘저놈 또 시작이구만.’

귀공자들의 처음으로 흥미를 가진 것은, 공기 중을 타고 전해지는 고기 냄새였다. 그들은 꿀에 이끌리는 벌 마냥 이끌려갔다. 그곳에선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돼지를 굽고 있는 도축업자가 눈에 보였다.

“야, 저거 맛있어 보인다.”

레오폴트가 값을 지불한 후 그 자리에서 곧장 돼지를 집어삼켰다. 두 사람은 전투적으로 식사하며 순식간에 돼지 한 마리를 먹어치웠다. 그들은 뼈다귀만 남기고 한동안 낮잠을 자다가, 새로운 풍경을 찾아 나섰다.

길거리를 서성이는 그들에게, 앳된 청년 한 명이 다가왔다.

“용맹한 기사 나리들이시군요! 흥미로운 일을 찾고 계신 겁니까?”

귀공자들이 그에게 시선을 줬다.

“지금 나으리들께서 아주 좋아하실만한 것이 있습니다. 저희 불타는 태양 주점에서 레슬링 시합을 열고 있거든요. 만약 10회 연속으로 승리하신다면 쓰러지실 때까지 마음껏 술을 드실 수 있습니다. 명성 높은 기사 분들이 잔뜩 와 계십니다!”

아르투르는 명성 높은 기사라는 말에, 레오폴트는 공짜 술이라는 말에 눈이 돌아갔다. 두 사람이 청년의 뒤를 따라가 보자, 과연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둥글게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기사 계급으로 보였다.

“이겨라! 이겨라! 이겨라!”

“미친 늑대! 미친 늑대! 미친 늑대!”

아르투르가 인파를 헤치고 나가자, 두 사내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뺨에 흉터가 난 덩치 큰 사내는 상대를 압도했고, 순식간에 붙잡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주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사내가 울상으로 외쳤다.

“란트레서 가문의 조프루아 경께서 9연승을 달성하셨습니다. 한 번만 더 이기시면 쓰러지실 때까지 마음껏 술을 드실 수 있습니다. 다음 참가자 계십니까? 참가비는 단돈 은화 한 닢입니다.”

아르투르는 주인장의 처지를 생각하며 웃었다. 경제관념 없는 기사들을 호구 잡아 참가비도 걷고, 눈요깃거리로 흥행을 시켜 술도 팔아볼 생각이었을 텐데 웬 괴물 하나가 나타나서 판을 접게 만들 판이었다. 상대가 귀족이니 인제 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아르투르는 이 불쌍한 주인을 돕기 위해, 실은 미친 늑대와 겨뤄보기 위해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

“내가 해보지.”

아르투르는 갑옷을 벗고 평복 차림으로 도약해서 경기장에 뛰어들었다. 조프루아는 회색 턱수염을 길게 길렀고, 오른쪽 뺨에 큰 십자 흉터가 난 곰 같은 사내였다. 그는 아르투르만큼이나 키가 크고, 몸 곳곳이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 이번엔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군. 주인장, 파산을 각오해야겠는데. 난 어지간한 술론 취하지도 않거든?”

조프루아의 무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이 란트레서 가문의 미친 늑대로군. 북구인 광전사들보다 격렬하게 싸운다고 하던데, 소문이 진짜인지 알아보고 싶소.”

아르투르가 도전적인 시선을 보내자, 조프루아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서라. 내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넌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도망갈 거다. 내게 한 번에 쓰러지더라도 부끄러워 말아라. 화초처럼 자란 도련님은 내 상대가 못 되니까.”

아르투르는 씨익 웃었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는데, 벌써 노환이 온 것이오?”

조프루아도 껄껄 웃었다.

“어디 한번 보지. 입만 살았으면 네 정강이뼈를 부러뜨려버리겠다.”

그가 자세를 낮추고 단숨에 아르투르에게 달려들었다.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