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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41화 (4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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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안개가 자욱한 풀숲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머리까지 자란 기다란 갈대들이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것들을 헤쳐 나가며 앞으로 향했다. 숨이 가득 차오르고 땀이 옷을 적셨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헤맨 것인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분명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왼쪽 허리띠가 텅 빈 느낌이 들어 매만져보니 항상 차고 다니던 검이 비어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셨던 황금의 검. 쓸모없는 골동품이지만 자신에게만은 의미 있는 것.

‘어디 갔지? 찾아야 해!’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 깨달은 아르투르는 갈대 사이를 쓸고 다니며 반짝이는 것을 찾아다녔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지?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자신의 의식이 현실에서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따금 시야가 흐려지며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검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갈대밭을 뒤졌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보이지 않았다. 간절히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거지.’

아르투르는 숨을 가득 몰아쉬며 근방에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건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데. 내가 아버지께 받은 유일한, 유일한 유품이란 말야. 아르투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망감이 엄습할 무렵, 흐릿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워낙 달콤하고 신비로워 황홀경에 빠져든 것만 같았다. 아르투르는 꿈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무릎을 피고 일어났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풀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는 마침내 갈대밭에서 벗어나자 안개가 걷히며 끝없이 펼쳐진 녹색 들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판 한가운데엔 녹색 빛 호수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호수 표면에서 반사된 햇빛이 번쩍였고, 호수 주변에는 짐승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목소리는 호수 속에서 들려왔다. 아르투르는 멍 하니 그곳을 향해 손짓을 내밀며 걸어 나갔다. 호수에 발을 내딛자 냉기가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쫓아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의 허리까지 물이 차오를 무렵, 갑자기 노랫소리가 끊겼다. 그제야 황홀경에서 벗어난 아르투르는 주변을 둘러보고 혼란스런 표정으로 멈춰 섰다.

“무슨 일이 -”

툭 - 툭.

그때 차가운 무언가가 등 뒤에서 자신을 쿡쿡 찔렀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르투르는 탄성을 내뱉었다. 물에 흠뻑 젖은 순백색의 옷을 입은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이라는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금빛 머리카락은 문자 그대로 번쩍였고, 눈동자는 푸른빛으로 번득였으며, 이마에 새겨진 물결 문양의 문신은 녹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인간이 아니야. 어떤 인간도 이렇게 아름답고, 신성할 수는 없을테니까.’

여인의 입가가 씰룩이며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말했다. 아르투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다시 귀 기울였다. 여인의 표정이 찌푸려지며 다시금 말했다. 아르투르는 이번에는 여인의 입술을 보고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선택하라.’

“무엇을 말입니까?”

여인의 양손이 녹색 빛으로 번쩍거렸다. 오른손에 각각 들린 것은 푸른 보석이 박힌 금관이었다. 아버지의 왕좌를 상징하는 왕관이었다.

서부 대륙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왕관. 아르투르는 홀린 듯 왕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 갑자기 빛을 잃고 피로 얼룩졌다. 왕관에서는 피가 가득 묻어 뚝뚝 떨어지며 호수를 붉은색으로 물들여갔다. 아르투르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자 여인은 왼손의 것을 내밀었다.

자신이 찾던 아버지의 유품, 보검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낡고 헤진 골동품이 아닌, 자신이 보아온 검 중 가장 훌륭한 명검이었다. 뿐만 아니라 빛을 가득 발하고 있었다. 검의 광채는 갈수록 강해졌고, 아르투르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가운데, 머릿속에서 노랫소리와 같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가장 귀한 것을 받았다.-

***

“마스터? 무슨 생각하세요?”

케이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겨있던 아르투르를 깨웠다.

“아. 잠자리가 좀 뒤숭숭해서 말이지.”

아르투르는 허리띠 왼쪽에 매여 있는 낡은 검을 매만졌다. 꿈에서 보던 광채는 없었고 단순히 낡고 해진 의장용 검이었다.

‘그건 무슨 꿈이었을까? 예언? 신탁? 아니면 단순한 개꿈인가?’

그들은 지금 백여 명에 달하는 인파를 이끌고 도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선두에는 아르투르와 레오폴트가 서서 만담을 수시로 나누며 웃어대고 있었고, 기사들의 종자는 은근한 신경전을 벌였다.

두 군주는 행렬에서 승마술이 가장 뛰어나 자연스레 일행의 앞에 섰는데, 케이는 그를 따라가지 못해 쩔쩔맸다.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승용마를 걷어찼지만, 승용마는 오히려 샛길로 빠져 엉뚱한 곳으로 갔다. 그 광경을 보고 아르투르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레오폴트의 종자인 막시밀리안은 보란 듯이 전투마를 타고 케이의 앞을 오가며 그를 약 올렸다. 케이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의 마스터를 더 이상 망신시킬 수 없었기에 꾹 참아 눌렀다.

아르투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가렸다. 레오폴트가 키득키득 웃었다

“네 종자 진짜 대박인데.”

“젠장… 열 받으니까 놀리지 마라.”

결국 케이는 결국 승용마를 멈추긴 했지만, 이미 대열에서 한참 떨어진 뒤였다. 어느 샌가 뒤로 다가온 아르투르가 한숨을 쉬었다.

“케이. 너 말 내려. 걸어서 따라와라.”

“네….”

일행은 계속 나아갔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행렬은 멈춰 섰다. 종자와 하인들이 급히 돌아다니며 천막을 쳤고 기사들은 그늘진 천막에 들어가 편히 앉았다. 행동이 굼뜬 자들은 체벌을 받기도 했다. 아르투르는 행렬을 돌아다니며 아픈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케이는 그런 아르투르의 모습을 보며 왠지 뿌듯했다. 이제 '아랫것들'에게도 신경 써주시는 게 보였으니까. 그때 막시밀리안의 퉁명스런 소리가 들렸다.

“얼간아. 왜 멍 때리고 있냐? 요리 준비 안 해?”

등 뒤에서 나타난 막시밀리안이 그를 툭 건드렸다. 케이는 떨떠름하게 뒤를 바라보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으. 응. 해야지.”

“얼씨구, 자기도 얼간이인건 아나보네. 얼른 고기나 썰어. 마스터들께서 드시는 건 우리가 직접 준비해야 하니까.”

막시밀리안은 토끼의 사체를 거칠게 내밀었고, 케이는 사체의 가죽을 벗겼다. 한창 가죽을 벗기던 케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땠다.

“야, 있잖아.”

막시밀리안은 벌써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뭐?”

“나한테 종자 일 좀 가르쳐줄 수 있을까?”

막시밀리안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간이, 왠 일이냐? 나한테 도움을 다 요청하고?”

케이는 풀이 죽은 채 말했다.

“열두 살에 종자 생활 시작하니까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너는 벌써 마스터를 도와 싸울 수도 있지만, 나는 돌멩이를 던지는 게 전부인걸. 네 도움이 필요해. 도와줘.”

막시밀리안은 피식 웃었다.

“겸손하네. 배울 자세는 되어 있군. 좋아. 도와주지. 그러면 일단 이것부터 해라.”

그는 자신이 썰던 토끼 고기를 건네주었고, 케이는 받아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막시밀리안은 그렇게 자신이 아는 지식을 알려주기 시작했고, 케이는 감사를 표하며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것을 레오폴트가 알았다는 것이다. 그는 케이에게 이래라저래라 말하며 뒷짐 지고 있는 막시밀리안을 보며 왠지 울화가 치밀었다.

‘녀석, 종자 생활 폈네? 제대로 좀 굴려줘야겠는데?’

레오폴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덕분에 두 종자들은 한동안 개같이 고생하며 굴러야했다. 물론 그 와중에 서로 간의 우정이 생겨난 것은 덤이었다.

아르투르는 쓰러진 종자들을 보며 낄낄 웃었다.

“제대로 굴렸네. 잘했어.”

“우리 때는 저러면 뒈졌는데 말이야. 요즘 것들은 말이야….”

두 사람은 종자들이 손질해둔 토끼를 직접 냄비에 넣고 요리했다. 종자 생활을 소재로 삼아 이야길 시작하니 끝이 나질 않았다. 많은 기사들의 무용담은 자신이 종자 생활에 얼마나 고된 생활을 보냈는가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가 갈리고 피를 토할 것만 같은 상황이 자주 나오는 일이리라. 아, 덕분에 아가씨와 귀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야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직접 조리한 토끼 고기 스튜를 다 먹어치울 무렵, 날씨가 좋아져 안개가 걷히며 시야가 트였다. 그러자 모든 방문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회색 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뚝 솟은 첨탑들과 견고한 이중 성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거성의 주변에선 왕국 전역에서 몰려든 기사들과 재미있는 구경을 하러 온 근방 주민들, 사람이 많이 모이니 수익을 거두기 위해 찾아온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자신들이 하이에버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

사건의 발단은 겨울을 날 준비를 하던 아르투르에게 아르길락 공작의 서신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번 겨울에 토너먼트를 주최하고자 하니, 아르투르가 참가해서 자리를 빛내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이었다.

무예와 전쟁을 숭상하는 유서 깊은 무가, 아르길락 가문은 5년 주기로 엄청난 규모의 토너먼트를 주최했다. 왕실이 주최하는 토너먼트에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거나,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르길락 가문에게 토너먼트에서 우수한 기사들을 선발하는 것은 신성한 의식이었다. 이들은 토너먼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기사들에게 큰 상금을 수여하는 것은 물론, 영지를 받아 봉신이 되거나 통혼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이 토너먼트에서 선발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금과 작위, 때로는 사랑을 찾아 구름 같이 모여든다.

따라서 아르길락 가문이 누군가를 초청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오직 당대 최고의 기사들에게만 초대장이 갔으므로, 이들의 토너먼트에 참가 요청을 받는 것은 기사의 큰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시국을 생각해볼 때 이번 토너먼트는 단순히 무예를 겨루기만을 위한 자리도 아니었다. 강력한 대가문인 아르길락 가문은 어느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 일정을 당겨 겨울에 토너먼트를 주최하겠다고 밝혔다. 호사가들은 이 결정을 두고 이렇게 해석했다.

-가장 뛰어난 성적을 내는 기사들이 있는 세력에 가담하겠다.-

토너먼트의 우승자에겐 아르길락 가문의 챔피언에게 도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고, 만약 챔피언에게도 승리한다면 우승자는 아르길락 가문에게 하이에버의 통치권과 가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이런 자리인 만큼 나도 빠질 수 없었다는 거지.”

레오폴트는 아르투르의 설명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냥 겨울 내내 성에 박혀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 하던 것 같은데?”

“…….”

아르투르는 애써 딴청을 피우며, 에쿠잘루스를 불러 출발을 준비했다. 그가 워낙 빨리 음식을 먹는 편이었기에 다른 일행들은 허겁지겁 식사를 마쳐야했다. 일행에 동행하고 있던 소피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이 급합니다. 사위. 좀 더 세심할 필요가 있어요.”

“뭐, 제대로 된 식사는 성에 도착해서 하시죠! 도착이 머지않았습니다.”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에 올라, 빠르게 말을 몰았다. 이번 토너먼트에서 명성 높은 무인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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