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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숙부는 농담 따위 하지 않았고, 웃음도 알지 못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웃지 않는 페르디난트일까.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테지. 농담도 하지 않고.”
이번에도 페르디난트의 표정은 근엄했고, 아르투르는 침을 삼켰다. 숙부는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를 아버지의 왕좌에 앉혀줄 수 있는데, 그것을 원하냐고.
“사생아에게는 계승권이 없을 텐데요.”
“강자에겐 계승권이 있지. 다시 물으마. 너는 데네토르의 왕권에, 네 아버지의 왕좌에 도전할 생각이 있느냐?”
장검만치 예리한 시선이 아르투르의 심장을 꿰뚫었다.
“네 욕망에 충실해라. 한 마디면 된다. 왕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네가 간절히 바래왔던 것이 아니냐.”
아르투르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워낙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다. 데네토르의 왕좌가 그렇게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인가?
“너무 예상치 못한 제안이군요. 답변에 앞서 알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뒤로 몸을 빼면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얼음장 같은 표정. 누구도 숙부의 속내를 알 수는 없으리라.
“루이스 큰형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두 형님들이 계실 텐데, 왜 저입니까? 숙부님께서 작은 형님들을 밀어주신다면 손쉽게 끝날 텐데요.”
“네 형제들은 모두 우리 형제의 유산을 이을 자격도, 자질도 없는 놈들이다. 루이스는 유약하고 율리안은 아둔하지. 펠릭스는 잔재주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소인배다. 그런 주제에 다들 이 왕국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어. 천만에.”
페르디난트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올라왔다. 머금은 냉소가 차가운 분노를 표현했다.
“데네토르는 우리 형제가 세운 왕국이다. 형님과 내가 말이다! 응석받이들이 형님의 무덤 위에서 춤추며 내 유산을! 형님의 유산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어! 통일된 서부 대륙! 고대 제국의 멸망 이후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그 위업을, 놈들이 망쳐놓고 있단 말이다!”
페르디난트의 표정은 마치 유리에 금이 가듯 일그러져갔다.
“나는 그놈들의 광대 짓에 애써 이룬 나의 유산이 무너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왕에 어울리지 않는 놈들이 왕좌를 탐내고 있어.”
페르디난트는 아르투르에게 다가와 책상 앞에 쿵-하고 손을 내리치며 그를 마주 본다.
“네가 페르넬의 진정한 아들이다. 사생아? 그런 건 문제 될 것도 없어. 교황에게 금 좀 쥐여 주면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다. 한 마디만 하거라. 나를 왕으로 만들어달라고. 그렇게 하면 네 적들을 내가 먼지처럼 사라지게 해주마.”
아르투르의 마음은 희망과 흥분, 기대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감정의 혼합물로 들썩였다. 기대해서는 안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요동쳤다. 왕국의 수도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대주교가 다가와 자신에게 금빛 왕관을 씌워주자 수도의 온 군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 아르투르 왕 만세! 아르투르 왕 만세! -
-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
아버지의 옥좌에 앉은 자신은 제후들을 호령한다.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자 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군세를 이룬다. 누구도 가본 적 없던 땅까지 나아가 그곳을 정복한다. 아버지에 버금가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왕이 된다. 사람들은 천 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할 것이다. 페르넬의 진정한 계승자는, 진정한 아들은 자신뿐 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사탕처럼 달디 단 꿈이었다.
…
긴 침묵의 끝에 눈을 뜬 아르투르는 말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숙부님.”
아르투르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왕이 될 겁니다.”
환한 미소를 짓는 페르디난트. 그럼 그렇지. 네가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아버지의 왕관을 물려받진 않을 겁니다. 이미 정해진 몫을 두고 형제들과 싸우지도 않을 겁니다. 아버지께선 사생아임에도 저를 차별 없이 대해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저만의 나라를 세워 왕이 될 겁니다. 페르넬의 계승자가 아니라 기사 아르투르로써 왕이 될 겁니다.”
페르디난트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진다. 아버지의 왕관이 네가 그토록 바래온 것이 아니냐고, 어째서 왕이 될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저버리냐는 무언의 질타였다.
“이미 데네토르에는 세 명의 왕이 있습니다. 네 명은 너무 많지요. 좋은 왕이 되는 일은 왕좌를 힘으로 얻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숙부님. 형제와 친구들의 피를 뿌리고 왕좌를 차지한 자가 좋은 왕이 될 수는 없겠지요.”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대륙의 지배는커녕 작은 나라마저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권력은 갈구하는 자의 것이다. 그 길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야. 오직 힘과 자격을 갖춘 이만이 갈 수 있는!”
“그렇다면 힘과 자격을 모두 갖추고, 권력을 갈구하는 숙부께서 왕이 되시면 될 일 아닌지요. 숙부께도 오'데르만 왕조의 피가 흐르지 않습니까. 저같이 가문 없는 사생아보다는 숙부께서 왕위를 주장하시는 쪽이 제후들을 설득하기 좋을 겁니다.”
“난 이미 반백년도 넘게 산 사람이다. 삶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늙은이가 이제 와서 왕관을 쓴 들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느냐. 나의 유산, 통일된 대륙이 유지되기 위해선 젊고 강력한 왕이 필요하다. 오직 너만이, 너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단 말이다.”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불쑥 앞으로 내밀며 아르투르를 직시했다. 아르투르도 그를 마주 봤다. 강렬한 의지가 담긴 초록빛 눈동자가 부딪히며 서로의 의지를 겨루었다.
“- 저는 아버지의 왕좌를 계승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네 눈빛이 흔들리는구나. 너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남들이 정해 놓은 한계에 널 가둬두고 있을 뿐이야. 사생아라서 안 된다는 변명은 집어치워라. 네겐 페르넬의 피가 흐르고 누구보다 네 아버지를 닮았다. 내 지도만 잘 따라오거라.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아르투르는 입을 다물었다. 실은 지금이라도 넙적 엎드려서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달라고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독이 든 성배라고.
정확한 이유는 떠올릴 수 없었지만, 직감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페르디난트는 답답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너도 곧 무엇이 옳은 길이고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될 것이다. 네 결단을 기다리고 있겠다.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네가 걸을 왕도를 닦아두도록 하마. 너의 아버지를 대왕으로 만들었듯, 내가 너를 형님의 계승자로 만들어주겠다.”
페르디난트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돌아가 막사를 나갔다. 대공이 떠난 자리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곱씹어봤다. 레오폴트는 한동안 곤란한 표정으로 있다가, 대뜸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가, 잔소리가 더 많아졌지? 조카인 너한테도 그러는데 나한텐 오죽하겠냐? 참아. 임마.”
두 귀공자는 낄낄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
전후 수습이 끝나자 검은 군단은 도파뉴 백작령에서 철수했지만, 페르디난트 대공은 레오폴트에게 200명의 기병 및 500명의 보병들을 맡겨 이곳에 남겼다. 아르투르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지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떠나기 전 페르디난트는 두 사람을 재차 불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왕들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 전까지 너희도 준비를 마쳐놓도록 해라. 봉신들을 소집하고, 농민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도파뉴 백작은 중부 왕국의 왕과 주종 관계로 엮어있으니, 아르투르는 루이스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다.
“내년에 출정할 군대를 모으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금 도파뉴 지방은 더 이상의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루이스 형님께서도 이해해주시겠지요.”
“네가 만약 소집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가 전후에 네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네가 도파뉴 영지를 차지한 것에 지금 녀석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거든.”
아르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군대를 모아 루이스 왕의 소집에 응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우린 루이스의 편을 들되, 따로 움직일 것이다. 우린 우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 루이스를 돕는 건 그 뒤에 가서 생각해볼 문제지. 가능한 많은 병력을 모으고 전쟁 물자를 준비하거라. 왕이 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네 영지는 지켜야겠지.”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군마에 오르며 말을 마쳤다.
“권력을 쥐는 것은 사자의 등에 타는 것과 같다. 한번 올라타면 그것을 길들이거나, 떨어져 맹수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지. 지배하는 쪽이 될 것인지, 잡아먹히는 쪽이 될 것인지는 네게 달렸다. 그럼.”
아르투르는 숙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고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대공의 뒤로 만 여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검은 건틀렛 깃발을 휘날리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보병대 사이에선 행군 북소리가 울렸고, 수천의 기병들이 좌우로 산개해서 보병대를 호위했다. 짐말이 끄는 보급 마차들이 뒤를 잇는다.
“만 명이나 되는데도 대열이 흔들리질 않네. 나는 저런 군대를 언제 가져보나.”
아르투르의 경탄 섞인 말에 레오폴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돈만 처바르면 만들 수 있어. 너도 영지에서 금광 하나만 나오길 기도하면 된다. 상징은 검은색으론 하지 마. 칙칙하니까.”
아르투르는 말을 돌려 성으로 돌아갔다.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일투성이였다.
그가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고향을 잃은 유랑민들을 바이스부르크에 수용한 것이다. 소피 부인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들이 겨울이 날 곳이 없다는 아르투르의 말에 설득되었다.
수천 명의 농민들이 물밀 듯이 바이스부르크로 몰려들었고, 아르투르는 식량 창고를 열어 식량을 지급하고 사비로 그들을 수용할 막사들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각 마을에도 추가로 식량을 공급해 겨울을 날 수 있게 조치했다.
“백작 부부께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우린 살았어! 아르투르 경 만세!”
이 모든 조치는 아델라이데 백작의 이름으로 이뤄졌지만 도파뉴 사람들은 사실상 아르투르를 주인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구해준 왕의 아들은 곧 위르마넨 가문의 마지막 후예와 결혼하고, 이 땅을 다스릴 것이다. 백성과 가신들은 두 사람의 결합이 도파뉴 지방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리라 의심치 않았다.
급한 용무가 끝나자, 아르투르는 각지에서 들어온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하나씩 검토했다. 행정 업무는 좀처럼 경험이 없어 애를 먹긴 했지만, 레오폴트의 도움으로 수월히 해낼 수 있었다.
“너, 싸움은 못 해도 공부는 좀 할 줄 아는구나? 하기야,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안 가르쳤을 리가 없지.”
“말도 마라. 위대한 군주가 되려면 검과 말보다는 숫자와 글자에 능해야 한다고 맨날 잔소리야. 너희 아버지가 이런 거로 대왕이 됐냐고? 망치로 이교도들 머리를 잘 깨서 대왕이 된 거지.”
두 사람은 서로 일을 하다가 대련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불현듯 말을 타고 나가 영지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때마다 호위 기사들이 질색을 했지만 두 사람은 똑같이 말했다.
“우리가 니들보다 세니까 걱정 마.”
공기가 서리처럼 차가워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영지의 상황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레오폴트는 한숨을 쉬며 종합된 수치들을 살폈다.
“농지의 삼분지 일이 버려지고 가축의 절반이 죽었으면… 내년에 영지가 버티려면 식량을 대거 수입해야겠어. 근데 이 와중에 내년엔 면세 조치를 하겠다고? 그럼 넌 진짜 알거지 되는 거야. 인마.”
레오폴트의 말에 아르투르가 피곤에 절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이럴 때 쓰려고 돈을 모아둔 거 아니겠어. 금고도 열고, 식량 창고도 열고, 아낌없이 베풀어야지.”
레오폴트는 기가 찬 모양이었다.
“넌 뭐 먹고 살게?… 니 와이프는 뭐라디?”
“글쎄, 갠 내가 하는 거면 다 좋다던데.”
아르투르는 기지개를 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성들의 사랑만큼 안전한 요새도 없어. 그걸 잘 설명해줬지.”
“…너 진짜 이상한 놈이구나. 그럼, 내년에 벌어진다는 전쟁엔 어떻게 참가할 건데?”
“징집도 훈련도 안 할 거야. 내년에 전쟁이 닥칠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막아내면 그만이야. 이 상태에서 군사 원정을 준비하면 싸워서 죽는 사람보다 굶어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나 혼자 300명 역할 정도 하면 돼. 내 권력 다툼에 영지를 파탄 낼 생각은 없어. 지금 도파뉴는 휴식이 필요하거든. 나도 잠 좀 자야겠고.”
레오폴트는 아르투르의 오만한 자신감을 보며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알던 아르투르가 아닌 기분이었다.
‘사생아라고 한탄하면서 열등감에 쩔어 살던 그놈 어디 갔냐고? 완전히 다른 놈이 됐구만. 저놈은 진짜 기사가 되어 가는데, 난 뭘 하고 있는 거람?’
레오폴트는 새해에는 자신도 진정한 기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사촌이 변했다면 자신도 변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