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챙 -!
이른 아침, 위르마넨 백작 관저의 개인 훈련장.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두 명의 건장한 청년이 평복 차림으로 검격을 주고받는다. 둘의 행동은 무척 빠르고 민첩했다. 아르투르와 그의 사촌인 레오폴트 백작이었다. 레오폴트 백작은 한눈에 띄는 미남자로, 숙련된 기사들이 그러하듯 역삼각형의 잘 단련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주로 레오폴트 백작이 공세를 가했지만, 아르투르는 쉽게 방어하며 능숙하게 공수의 전환을 이뤄 레오폴트의 목을 겨눴고, 그는 손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젠장, 항복! 항복!”
아르투르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여명을 도로 검집에 꽂았다.
“레오폴트,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 네 발놀림이 너무 느려졌다.”
“내가 느려진 게 아니라 니가 빨라진 거야. 작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말이야. 그때, 검으로 대련했을 때는 네가 다 졌잖아. 아, 젠장. 그나마 내가 이기던 게 평복 검술이었는데, 이제 와선 그것도 답이 안 나오네. 괴물 같은 놈. 그 사이 이만큼 성장한 거냐. 어떻게 되먹은 거야?”
“글쎄….”
실은 아르투르도 느끼고 있었다. 최근 자신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검술만큼은 레오폴트가 자신을 능가했다. 그는 왕궁의 귀공자들 가운데 제일검으로 유명했고, 벌써부터 “장검의 레오폴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실전 경험의 차이 같은데.”
“하기야, 듣기로도 넌 죽을 고비만 수십 번을 지났다며. 그럼 사람이 바뀔 만하지. 바야르 경 말이 맞다니까. 이 불공평한 천재 자식아.”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냐. 넌 이제 고작 스물인걸.”
“어쭈, 누가 들으면 넌 서른쯤 된 줄 알겠네. 넌 벌써 네 힘으로 영지도 얻고, 어리고 예쁜 약혼자도 생겼잖아. 이젠 검술로도 날 능가해? 넌 내 박탈감을 모를 거야. 난 대체 뭘 하고 있담. 기사 서임을 받았는데 사람 한번 죽여본 적이 없단 말이야. 얼른 전쟁이 나야 무공을 세울 텐데.”
레오폴트는 땅에 드러누워 투정을 부렸다. 그 역시 야심에 찬 귀공자답게, 자신의 업적을 이루고 싶어 했다. 남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했다. 위대한 아버지, 고귀한 혈통, 아름답고도 강인한 육신. 하지만 레오폴트는 타고난 것에 안주하지 않았다.
“에라이, 이 미친놈아. 전쟁이 애들 장난이냐? 살인도 썩 유쾌한 경험은 아냐.”
아르투르의 핀잔에 레오폴트는 삐딱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어쭈, 먼저 전쟁 좀 경험해봤다고 어른 행세라 이거지.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아버지들이 대륙을 다 정복해서 싸울 적도 없고 공적을 세울 기회도 없다고 한탄하던 놈이 누군데? 솔직해져 임마. 너도 지금이 더 좋잖아. 나도 너처럼 되고 싶은 거라고.”
“왕국 2인자의 상속인이 투정을 부리면 사생아인 나는 뭐라고 해야 하냐? 성인식 선물로 백작 작위를 받은 놈이 칭얼거리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다가, 아르투르가 레오폴트를 가볍게 한 대 때렸다. 그러자 레오폴트가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아르투르, 너 많이 컸구나. 형님한테 좀 맞아야겠다.”
“형님은 무슨. 이틀 먼저 태어난 놈이. 맨날 나한테 쥐어 터졌으면서 뭘 믿고 덤비냐?”
두 사람은 사촌 간의 장난을 벌이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격투를 벌였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으며 나자빠지는 싸움이 벌어지자, 케이가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호위 기사 나리들! 뭐하십니까! 백작님들께서 싸우십니다!”
그때 레오폴트의 종자, 막시밀리안이 케이를 붙잡았다. 그는 케이 또래의 소년이었지만 좀 더 체격이 다부졌다.
“내버려둬라. 원래 저러고들 노신다.”
“야, 니 눈엔 저게 장난으로 보이냐?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 건데?”
막시밀리안은 짜증을 섞어 말했다.
“내버려두랬지. 저분들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니까. 날로 들어온 종자 주제에 귀찮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케이의 표정이 구겨졌다.
“날로 들어와?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냐? 뒤질래?”
막시밀리안은 케이를 비웃었다.
“마스터께 네가 어떻게 종자가 됐는지 다 들었다. 자격 검증도 거치지 않고 열두 살에 종자가 됐다며? 기사의 종자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 양이나 치던 평민이 아르투르 공 같이 위대한 기사의 종자가 되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만 까불고.”
“너, 당장 나한테 시비 건 거 사과해. 우린 다 같은 기사의 종자야. 이전에 뭐였든 간에.”
“싫으면 어쩔 건데?”
“너 이 새끼, 양치기한테 안 맞아봤지? 내가 동네 싸움 최고였어!”
흥분한 케이의 주먹이 막시밀리안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혔다.
‘됐다. 제대로 꽂았어. 근데… 왜 이렇게 단단하지?’
고개를 올려보니 막시밀리안은 침을 흘리며 쓰러진 것이 아니라, 씨익 웃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다냐?”
막시밀리안은 무릎으로 케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케이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자빠졌고, 막시밀리안은 케이의 배에 올라타 머리를 마구 때렸다. 케이는 지지 않고 그의 오른팔을 물고 늘어졌다.
“으아악! 이 비겁한 새끼야!”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딨어!”
그들이 끙끙대는 소리에, 티격태격하던 기사들이 싸움을 멈추고 되돌아봤다.
“야, 뭐해! 저 새끼들 떼어놔!”
결국 호위 기사들이 달려들어 두 소년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본디 기사들은 거친 사내라 말을 안 들으면 사람을 팼다. 싸움의 결과로 케이는 온몸에 멍이 들고 코피를 흘렸고, 막시밀리안은 오른팔의 살점이 뜯겨나갔다.
막시밀리안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케이를 노려봤다. 그러자 레오폴트의 불호령이 내렸다.
“종자 놈이 뭘 잘했다고 웃어! 당장 갑옷 입고 나와! 연병장 열 바퀴다!”
레오폴트는 막시밀리안의 머리를 때리면서 그를 데려갔다. 아르투르는 쓰러진 케이를 보면서 혀를 찼다.
“한심한 놈아. 그걸 지나? 먼저 때려놓고? 어? 어디 가서 내 종자란 소린 하지 마라. 맞고 다니는 종자는 둔 적 없으니까. 넌 오늘부터 특훈이다. 일단 네 갑옷 가지고 연병장으로 와라!”
결국 두 소년은 갑옷을 입고 어깨동무를 하며, 연병장을 뛰는 형벌을 받았다. 둘은 그들의 마스터를 의식해 애써 사이좋은 척을 해야 했다.
“제때 못 돌면 너희 모두 마구간 청소를 하게 될 거다!”
아르투르의 외침에 두 종자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야, 너 때문에 말똥 치워야 되면 뒈질 줄 알아. 잘하자? 응?’
‘편히 자란 도련님 주제에 누굴 걱정해? 너나 잘해. 너나.’
두 기사는 종자들을 보며 웃었다, 자신들도 딱 저맘때쯤 만났고, 저렇게 싸웠으며 덕분에 금세 친해졌다. 그들이 옛날이야기에 빠져 있는 동안, 불쑥 그들의 등 뒤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날랜 반사 신경으로 고개를 돌리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들의 등 뒤에는 눈가만 드러내놓는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음침하기 그지 없었다.
“주인님께서 여러분들을 찾으십니다.”
“- 난 네놈 같은 놈을 주인으로 둔 사람을 모르는데.”
아르투르는 여전히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그를 노려봤다. 그때 레오폴트가 아르투르의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 우리 아버지가 새로 들인 부하야. 가자. 아르투르.”
아르투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복면의 사내는 목례하더니 골목의 그림자 사이로 들어가더니, 금세 사라져버렸다. 어떤 인기척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저놈은 뭐하는 놈이야? 숙부님 부하 중에 저런 사람도 있었나?”
“너도 알잖아. 우리 아버지가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주워오는 취미가 있는 거. 재는 동방의 성묘에서 데려온 녀석이래. 이교도라는 소문이 있던데, 아마 맞겠지. 왠지 재수 없어 보여서 이야기 해본 적은 없어.”
두 사람은 찝찝한 표정으로 복면의 사내가 떠난 곳을 바라보더니, 페르디난트가 기다리는 성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성을 나와 지휘 막사로 향하는 도중, 그들은 검은 군단이 철군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깍듯이 고개를 숙여 귀공자들에게 복종을 표했다. 레오폴트는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이 지휘 막사에 들어갔을 때 페르디난트는 부관들과 철군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의 부관들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숙장들로 이뤄져 있었고, 다들 몸 한 곳 정도는 성하지 않았다. 안대를 끼거나, 팔 하나가 없거나, 목발을 짚고 다닌 다거나.
“그럼,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페르디난트가 의자에 앉아 손짓을 하자, 그의 부관들은 깍듯이 경례하더니 하나씩 막사에서 나갔다. 두 사람은 앉으라는 말을 기다리며 멀뚱히 서 있었다.
“부르셨다면서요. 아버지.”
페르디난트는 레오폴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허공에 말한다.
“알라힘. 누구도 우리의 대화를 엿듣지 못하게 하라. 들은 자가 있다면 즉각 처단하라.”
그러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인이시여.”
아르투르는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 아니, 눈에만 보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적과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두 사람 모두 앉아라. 너희를 부른 것은 아르투르에게 제안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레오폴트, 너는 오늘은 의견을 내지 말고 듣기만 하거라.”
레오폴트는 속이 상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 예. 예. 그러믑죠. 아버지.”
페르디난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도파뉴에서 벌인 활약을 모두 듣고 있었다. 홀로 백 명을 베어 넘기고, 각자 영지에 웅크리고 있던 영주들을 연합시켰다지. 그 뒤에는 프레드릭을 제압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뛰어난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아르투르는 페르디난트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 그럼, 삼촌께선 도파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래. 네가 혼자서 어디까지 해내는 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네 진짜 능력을, 그릇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아르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빨리 지원해주셨더라면 훨씬 사람들이 덜 죽었을 텐데. 하지만 그랬다면 자신이 아델라이데와 결혼할 기회가 없었겠지.
“- 일부러 제가 이 지방을 평정할 수 있게 놔두신 거군요.”
“맞다. 네가 해내지 못하면 레오폴트를 보내 영지를 정리하고, 아델라이데와 결혼시키려고 했지. 도파뉴 영지는 그만한 가치를 지닌 곳이다. 영토 크기보다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지. 그런 만큼 네가 얻어낸 영지는 축하해 마땅하다.”
아르투르는 머리가 아파왔다. 본심을 숨긴 채 겉도는 대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빠르고 직관적인 대화가 그의 방식이었다. 비록 상대가 왕국의 2인자인 페르디난트의 앞이지만 자신도 어엿한 영주였다.
“그래서 요점이 무엇입니까? 숙부.”
“앞서 말했듯, 네게 제안할 것이 있다.”
페르디난트는 언제나 그랬듯,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말씀하시지요.”
“- 너를 아버지의 왕좌에 앉혀주겠다.”
아르투르와 레오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반역모의였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