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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들의 처벌이 끝나고 논공행상이 이뤄질 시간이었다. 우선 전쟁 배상금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수령 하되, 몸값은 아르투르가 가지기로 했다. 또한 페르디난트는 관대한 조건으로 전쟁 배상금 피오렌 금화 4만 닢을 아델라이데 백작에게 빌려줬다.
“당장 논공행상을 치르고 영토를 복구할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따로 상환 기간은 정하지 않겠다. 여유 자금이 생기는 대로 되갚도록 해라. 물론 이자도 필요 없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숙부님.”
재판의 결과로 절반에 가까운 귀족들이 숙청되었지만 그들의 빈자리는 금방 메꿔졌다. 우선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귀족과 기사들의 영지를 두 배로 늘려주었다. 그 결과 알튼 남작은 도파뉴 백작령의 명실상부한 2인자로 떠올랐다. 무릎을 꿇어보이는 알튼 남작.
“합당한 보상이군요. 백작 각하. 앞으로도 위르마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델라이데는 미소로 답한다.
“물론이에요. 두 가문 간의 유대는 여러 세대를 넘어 이어져 왔지요. 앞으로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다음엔 아르투르를 초기부터 따랐던 인원들이 포상을 받았다. 우선 크리스티안은 위르마넨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고 남작이 되었다. 그는 아델라이데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반지에 입 맞췄다.
“제 검을 그대와 그대의 후계자에게 바칩니다. 아델라이데 폰 위르마넨 백작 각하.”
“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그대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인다. 그대는 나를 대신 하여 일디스 남작령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 충의에는 사랑으로, 용기에는 영광으로, 배신에는 죽음으로 보상할 것이다.”
다른 형제단원들도 두둑한 포상금을 받았고, 다른 모든 참전자들도 신분과 공적에 맞게 각기 땅과 금화, 작위를 부여받았다. 특이한 일은 카밀이 포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카밀, 그대도 많은 공적을 세웠다고 들었다. 그대에게 고유 문장을 지닐 수 있는 세습 귀족의 작위와, 마을 두 곳에서 세금을 거둘 권한을 내리겠다.”
“포상에 감사드립니다. 백작 아가씨. 하지만 저는 귀족 작위가 어울리지 않는 놈입니다. 그냥 금으로 주시지요.”
아델라이데는 의외의 상황에 자신의 곁에 있는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르투르는 카밀의 판단이 의아했지만, 다뤄야 할 안건이 많기에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아르투르가 아델라이데에게 귀엣말을 하자, 아델라이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존중하겠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라.”
논공행상이 끝나고 아델라이데는 하루 간의 축제를 선포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데다, 전쟁을 겪어 물자를 풍족하게 풀지는 못했지만 군대를 해산하기 전에 한번은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는 아르투르의 뜻이었다. 아르투르를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영주의 연회장에 모였다.
아델라이데도 영주로써 모습을 비추었고, 미리 써둔 축사를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제 영지와 가문을 구해주신 미래의 부군께 감사드립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의 충정도 잊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축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이 잔을 들어 올리며 주군의 안녕을 기원했다.
“아델라이데 백작께서 오래도록 통치하시길!”
크리스티안도 외쳤다.
“아르투르 공과 백작 각하를 위하여 건배!”
술잔이 오가자 참석자들은 요란하게 떠들었다. 대부분은 허풍 섞인 무용담이나 보상을 얻은 새로운 장밋빛 미래에 대한 내용이었다.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아델라이데는 어지러워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아르투르는 그녀를 영주 관저의 입구까지 바래다줬다.
“딸국..! 아버지가 영주는 술을 잘 마셔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딸꾹!”
아르투르는 맥주 한 잔에 만취한 소녀 백작의 모습을 보며 귀엽다고 느꼈다. 케이와 동갑에 불과한 소녀가 억지로 어른인 척 하는 것이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무리하지 마시오. 혼례를 치룬 이후엔 어차피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내가 할 테니까.”
아델라이데는 혼례라는 말에 홍조를 띄우며 부끄러운 듯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 아르투르 경. 할 말이 있어요.”
아르투르는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녀를 되돌아봤다.
“당신은 지금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거에요. 저는 배 나온 아저씨나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지 않을지 항상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저를 구해주신 위대한 왕자님과 결혼하게 되다니, 꿈만 같은 일이죠.”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멈춰 서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경이 정말 좋습니다. 언젠가 당신도 절 좋아해 주셨으면 해요.”
아르투르는 여전히 그녀가 자신의 부인이 될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에겐 귀여운 소녀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지리라.
“날씨가 춥고 밤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 보시오. 그 나이엔 일찍 자야 키가 잘 크거든.”
“네! 알겠습니다. 미래의 서방님.”
아르투르는 연회장으로 돌아와 참석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알튼 남작이 첫 상대였다.
“알튼 남작. 한동안 당신의 도움이 절실할 겁니다. 나는 결국 외지인이니까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오. 잘해봅시다.”
“걱정 마십시오. 저와 제 주군을 구해주셨으니 공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우린 주종 관계이기 전에 같이 싸운 전우라는 걸 잊지 마시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함께 극복할 수 있을 것이오.”
아르투르는 씨익 웃으며 잔을 내밀었고, 알튼 남작도 잔을 부딪치며 맥주가 넘쳐흘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섭정 나리, 서둘러 결혼하시고 백작 각하가 되셔야지요. 하하하!”
둘은 술통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마시며 자신들의 주량을 자랑했고 결국 먼저 쓰러진 것은 알튼 남작이었다. 아르투르는 마지막 한 잔을 퍼마시고도 정신이 말짱했다.
그때, 지나가던 크리스티안이 닭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이 친구,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술도 잘 마시는군. 호걸다워. 호걸. 내 잔도 한 잔 받게.”
“나와 대작하고 싶다면 자네도 앉아야지.”
두 사람의 주량 차이는 무술 실력만큼 차이가 났기에, 승패는 금방 갈렸다. 얼큰하게 취한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정말 고맙네. 아르투르! 진짜 고맙다고! 자네 덕분에 나도 영지를 가진 진짜 귀족이 되었어. 자네와 함께한 것이 신의 축복이었다고! 앞으로도 언제고 나를 불러주게. 자네가 내게 안겨준 이득에 꼭 보답하겠네.”
아르투르는 작게 웃어 보였다. 서로 경계하는 사이로 만났던 두 사람이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 신기했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고 같이 넘긴 전우라는 것은 이토록 특별한 유대감을 주는 것일까.
‘마음속 깊은 곳까진 털어놓지 못하더라도, 친구로는 충분히 지낼 수 있겠군.’
말을 마친 크리스티안은 의자 뒤로 넘어가 뻗어버렸고 그의 종자가 마스터를 모셔갔다. 그 뒤로도 아르투르는 여러 귀족 및 기사들과 잔을 기울였다. 그들이 하나둘 쓰러질 때쯤, 어느새 취기가 올라와 눈앞이 흐릿해졌다.
“쩬장, 어지간히 많이 마신 모양인데.”
그때 아르투르의 눈에는 구석에 앉아 홀로 술잔을 들이키는 카밀이 보였다. 아르투르는 카밀의 앞에 거칠게 앉으며, 그의 술병을 뺏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이 좋은 날, 왜 자넨 혼자 마시고 있나?”
“흠. 제가 나으리와 이야기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리께선 훌륭한 고용주시고, 저는 제 빵값만 다 하면 되는 거지요. 그리고 술은 본디 혼자 마시는 게 제 맛입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식으로 선 긋지 말라고. 난 자네랑 알고 지내고 싶어. 그런데 도통 자네가 이야길 안하니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거 아닌가. 난 자네처럼 강직한 사람들이 좋아. 진짜 사나이!”
아르투르는 카밀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자신의 것에도 채웠다.
“누구 앞에 서건 움츠려 들지 않는 용기는 모든 남자들의 귀감이라네. 자, 이제 말해보게. 왜 귀족 작위는 거부 한 건가? 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어. 얼른 기회를 잡으라고.”
카밀은 술을 들이켜더니,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보통 고용주들은 제가 입을 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도적들에게 재판을 열어주자고 했을 때, 경께서도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셨죠.”
“이 쪼잔한 친구 같으니.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뒀나? 난 잊은 지가 언젠데. 게다가 결국 자네 말도 들어줬잖아! 그런데 왜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나?!”
카밀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재차 맥주를 들이켰다.
“저도 놀라긴 했습니다. 보통의 고용주들은 그렇게 말하면 제 혀를 자르겠다고 위협하거나 그냥 무시하죠. 제가 끝까지 나리와 함께 싸웠던 이윱니다.”
“그래. 자네가 과묵한 이유는 알겠고, 그래서 귀족 작위는 왜 거절한 건가?”
카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라고 하셨으니 저도 친구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귀족들을 혐오합니다. 기사도도 혐오하지요. 그러니 둘 다 가지기 싫습니다.”
카밀의 단호한 말에 아르투르는 화가 나기보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왜?”
“귀족들은 싸가지가 없거든요. 불알 두 개, 눈알 두 개 달린 건 똑같으면서 자신들은 사람이 아닌 양 평민들을 다루죠. 기사도라, 기사도는 어린아이들이나 믿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기사가 도적보다 나은 건 싸움을 훨씬 잘한다는 것뿐이죠.”
“그래? 그럼 자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데? 나도 그런 오만한 거짓말쟁이로 보이나? 게다가 세상엔 좋은 귀족도 많아. 자네가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카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나리는 도련님치고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히셨죠. 하기야, 차별이란 걸 받아보셨으니 저희 입장을 이해하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진짜 군주들, 가령 나리의 형님들은 저를 절대 친구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카밀은 쓴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좋은 귀족은 없습니다. 그저 유능한 귀족과 무능한 귀족이 있을 뿐이죠. 좋은 사람도 귀족이 되면 변합니다. 제 친구 중엔 저와 같은 농노 출신으로 무공을 세워 영주까지 된 자가 있습니다.
나리의 아버님에게 무공을 인정받아 남작이 된 그 친구는 지금 영민들을 혹독하게 착취하기로 유명합니다.”
“- 아니, 그러니까 아아아 - 왜 나쁜 놈들 사례만 드냐는 거냐고.”
“그 친구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웃들을 위해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죠. 하지만 귀족이 되자 사람이 변하더군요. 더 높은 자리와 명성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영주들이란 결국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아랫것들을 착취하는 자들입니다. 심장이 돌처럼 차가운 이들이죠.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도구처럼 내던지고, 남들의 고통 위에 위업을 쌓아가지 않습니까?”
카밀은 웃음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잔을 흔들었다. 그가 냉소를 표현하는 방식이리라. 아르투르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를 주의 깊게 살폈다.
“장담하건대 나으리도 다른 영주들과 비슷한 인간이 되실 겁니다.”
“- 나는 달라. 모두에게 공평한 영주가 될 걸세. 내가 지켜야 하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 점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나리의 야망이 일개 백작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나리는 매 순간 고민하지요. 당신의 야망과 명예 사이에서 말입니다. 결국 나리도 야망을 좇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카밀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친구로서 부탁하건대 오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남들을 구원한 영웅적인 기사 말이죠. 언젠간 세월에 깎여나가더라도, 그건 기억할 가치가 있는 모습입니다.”
가만히 카밀의 말을 듣던 아르투르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 이야기를 하랬더니, 왜 훈계를 하고 있어. 술맛 떨어지게.”
카밀은 껄껄껄 웃는다.
“사람이 늙으면 잔소리가 많아집니다. 그러려니 하십쇼.”
두 사람은 깊은 새벽까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카밀은 종종 자신의 이야기를 숨겼지만, 아르투르는 구태여 그것을 추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이야기 해주리라. 친구로서 그렇게 믿었다.
오랜 술자리 끝에 카밀이 쓰러지자, 그는 케이에게 카밀을 옮기라고 지시하고자 했다.
“케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케이를 찾아보니 그는 십대 병사들과 도박판을 벌이다 잠들어있었다.
‘종자란 놈이 기사보다 먼저 쓰러져? 술 마시는 법부터 가르쳐야겠군.’
아르투르는 여전히 체력이 남았기에 남은 술병을 들고 성 밖으로 나가 병사들과 어울렸다.
“편하게들 해. 편하게.”
병사들은 술기운과 축제 분위기에 힘입어 정말로 아르투르를 편한 동네 형으로 대했다. 아르투르는 그들과 술게임도 하고 고민도 들어주며 알지 못하던 세상을 배워나갔다.
그는 비로소 농민들의 세상을 바로 봤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하나씩 버려나갔다. 아르투르는 병사들과 함께 잔디밭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동이 틀 때까지 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