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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37화 (3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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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마넨 가문의 산하에 있는 모든 가문들이 바이스부르크로 소환되었다. 몇몇 눈치 빠른 자들은 영지에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검은 군단의 기마 궁수들에 의해 붙들려왔다. 백작의 접견실이 주요 봉신들과 그 가족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일 때, 문이 열리고 아르투르와 아델라이데가 들어왔다.

모두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길을 비켜주었고 두 사람은 걸어가 접견실 끝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장신의 청년과 소녀 백작이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홀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창을 꼿꼿이 세운 채 일렬로 정렬하고 있었다.

“프레드릭의 난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다. 우선 영주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자와 전투 중에 탈영한 자들은 앞으로 나오라.”

열댓 명 정도 되는 귀족들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은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소집을 무시하거나, 맹세를 저버리고 달아났지. 명백한 충성 서약의 위반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 젊은 귀족이 앞으로 나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변론하겠습니다. 우선, 위르마넨 가문은 미치광이 프레드릭에게서 저희들을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빌헬름 공 역시 위르마넨 가의 일원이었고, 따라서 충성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이 점을 헤아려주십시오.”

“충성 맹세는 아델라이데 백작에게 이뤄진 것 아닌가?”

“그랬지요. 하지만 송구하게도 백작께서는 제때 저희를 보호해주지 못하셨습니다. 본디 주종 관계란 상호 간의 의무로 이뤄진 것이란 점을 아실 것입니다.”

아델라이데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매우 긴장했다. 중요한 자리인 것을 알기에 귀족들을 보며 애써 의젓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결정권자는 아르투르였다. 그는 팔걸이에 턱을 기대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뭐라고 반박하지?’

아르투르는 상석에 앉아있는 페르디난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의 시선에 페르디난트의 차가운 얼굴에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이제는 남에게 묻는 것을 피하지 않는구나.”

“경험자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 제 부족함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으니까요. 삼촌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페르디난트는 작게 웃고는 아르투르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네 행동이 영지에 미칠 결과를 생각하고, 무엇을 얻고 잃게 될 지를 생각해보아라. 무엇이 공정한가가 중요한 바가 아니다.”

아르투르는 삼촌의 말을 듣고 숙고해봤다. 이들을 크게 벌한다면 가혹한 처사로 여겨질 것이다. 분명히 이들을 먼저 저버린 건 위르마넨 가문이었으니까. 신임 영주의 첫 판결로서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볍게 처벌한다면 영주의 소집령을 거부하거나 탈영해도 좋다는 선례를 남기는 셈이 된다. 또한 자신을 끝까지 따라준 영주들도 불만을 가질 것이었다. 결국 둘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야했다.

“인정한다. 분명 위르마넨 가문이 그대들을 보호하는데 있어 미흡했지. 그렇다고 그대들이 의무를 방기한 것이 용납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이 가진 영지의 절반을 10년 간 회수하겠다. 그 기간 동안 그대들의 충성심을 지켜보겠다. 충성심을 증명하는 자들은 영지를 돌려받을 것이다.”

아르투르는 무릎 꿇은 귀족들에게 되물었다.

“이의 있는가?”

“지당하신 판결입니다. 백작 각하.”

변론을 제기한 젊은 귀족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른 귀족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그들이 보기에 새 백작은 충분히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따라 가문의 복권이 이뤄질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졌다.

“다음 놈들을 데려와라!”

아르투르가 외치자 검은 군단의 병사들이 수십 명의 사람들을 쇠사슬에 묶어 질질 끌고 왔다. 앞선 이들과 달리 이들은 귀족이 받는 예우를 받지 못했다. 병사들은 이들을 거칠게 대했다.

“빨리 빨리 움직여! 굼벵이 자식들아!”

그들을 내려다보는 성 내의 시선도 매서웠다. 소녀 백작은 경멸의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배신자들이 왔군요.”

이들은 전투 중에 아르투르를 배신했거나, 빌헬름과 내통한 자들이었다. 빌헬름은 초췌한 얼굴로 행렬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조카와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그의 표정은 초췌했지만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그 자리는 내 것이었어야 한다. 왜 너희가 앉아 있는 것이냐?”

아르투르는 여명의 검집을 혁대에서 풀어 바닥에 짚은 채, 빌헬름을 내려다봤다.

“네가 이곳에 앉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빌헬름 폰 위르마넨.”

“자격? 자격이라고? 나는 마지막 남은 위르마넨 가문의 남자다. 나보다 도파뉴 백작에 자격 있는 인물은 없어! 이 땅은 내 선조들이 일궈낸 곳이다. 수백 년간 우리 가문이 통치해왔다고! 내 선조, 내 아버지가 다스리던 땅이다! 너 같은 잡종보다는 훨씬 더!”

“네게도 자격이 있었겠지. 하지만 네가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너는 그 자격을 잃은 것이다.”

“웃기지 마. 그깟 평민 놈들 죽은 게 뭐가 대수라고! 내가 우리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란 말이다!”

빌헬름은 아르투르를 향해 퉤- 하고 침을 뱉었고 아르투르는 고개를 옆으로 숙여 피했다. 호위 기사들이 달려들어 빌헬름을 두들겨 패다가, 아르투르가 손짓을 하자 물러섰다.

“넌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 납득할 수 없다. 누가 신의 뜻에 걸 맞는지 가려보자. 결투 재판을 요구한다.”

그가 결투 재판이라는 말을 내뱉자, 아르투르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그 때 아델라이데가 아르투르의 옷깃을 잡았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이미 저 자의 죄는 명백해요. 결투를 통해 진위를 가리지 않아도 됩니다.”

소녀 백작의 본심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말란 것에 가까웠지만, 아르투르는 조심히 그녀의 손을 떼어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그는 위르마넨 가문의 피를 이었고, 자신의 신변에 관해 스스로를 변호할 자격이 있소. 결투 재판이 가장 공정한 재판이니 그렇게 치루겠소. 여봐라, 놈의 쇠사슬을 풀어주고, 원하는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주어라.”

간수가 다가와 그의 쇠사슬을 풀어주고, 결투 준비를 도왔다. 케이는 아르투르가 흉갑을 입는 것을 도와준 후, 자신의 자리로 물러났다. 아델라이데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실까? 빌헬름은 싸움을 잘하는 기사라고 들었단 말이야.”

케이는 입가에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시죠. 아가씨. 전 가끔 마스터가 인간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홀로 백인을 베어 넘기신 분이니 한 명 정도는 뭐…”

빌헬름이 전신 갑옷을 입고 거대한 방패를 든 것에 비해, 아르투르는 흉갑만 입고 오른손에 여명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갑옷이 빈약해보여….”

“마스터가 그러는데, 일 대 일 결투에선 경무장이 나은 경우도 많다 그러셨어요.”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봤다. 성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심판으로 나선 사람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자, 빌헬름은 장검을 휘둘렀지만, 아르투르는 가볍게 피해낸 후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내려베었다. 빌헬름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막았다.

칼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빌헬름은 방패를 쥔 왼손이 아려왔다.

‘뭐가 이렇게 힘이 세!’

빌헬름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아르투르는 오른편으로 날렵하게 돌아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허벅지를 베었다.

“으아아!”

빌헬름은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무릎을 꿇었고, 아르투르는 다가와 무릎으로 빌헬름의 턱을 걷어찼다. 빌헬름의 입술이 터져나갔고, 부러진 이빨들이 튀어나왔다. 그는 손에서 무기를 놓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슬 퍼런 여명의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재판의 승자로서 네 처우를 정하겠다. 너는 수천 명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고, 가문의 어른임에도 아델라이데 백작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를 꾸몄다. 즉각 목숨을 뺏어 마땅하지만, 위르마넨 가문의 일원임을 감안해 지하 감옥에 평생 가두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빌헬름은 상처를 입은 허벅지를 감싸며, 망연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청중들은 아르투르의 판결이 적절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아델라이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르투르 경. 이번만큼은 내 권한으로 빌헬름에게 사형을 선고하겠습니다.”

아르투르와 빌헬름은 모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좌중의 사람들도 모두 웅성거렸다.

“… 친족살해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이오. 아델라이데 백작. 사람들은 두고두고 삼촌을 죽인 당신의 잔인함과 무정함을 말할 것이오.”

아델라이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그 악명이 저를 지켜 줄 테니까요. 아르투르 경. 부디 결투를 끝내주세요. 만약 제게 그를 벌할 권한이 없다면, 당신의 약혼녀로서 부탁하겠습니다. 저 자의 머리를 제 결혼 선물로 먼저 주세요.”

아르투르는 자신이 열두 살짜리 소녀를 대하고 있는 것이 맞는 지 의아했다.

“- 아델라이데, 그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요? 친족살해는 가장 무거운 죄업 중 하나요.”

“네,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요. 친족살해자는 인간들의 경멸과 신의 저주를 받는다면서요. 하지만 삼촌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저를 그렇게 했을 거란 걸 알아요.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려 빌헬름을 바라봤다. 당사자의 뜻이 그렇다면 딱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라고 빌헬름을 곱게 봐서 살려두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남길 유언 있나?”

“- 아델, 아델, 살려다오. 부디 목숨만은 -”

여명의 칼날이 번뜩였다. 사람들은 큰 탄성을 내질렀다. 아델라이데는 피가 튄 아르투르의 얼굴을 짜릿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처형을 마친 아르투르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고, 빌헬름의 뒤편에 있는 죄수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아닌 지 두려움에 떨었다.

붙잡혀 나온 이들 가운데는, 성 내에서 일하던 자들도 많았다. 빌헬름이 체포되며 그가 소지하고 있던 서신들도 모두 압수했다. 그러자 충격적인, 어쩌면 당연한 진실이 밝혀졌다. 성 내에 수많은 내통자들이 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심지어 가문의 집사와 전임 기사장도 있어 아델라이데와 소피 부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우린 당신들을 믿었는데! 일부러 내게 틀린 조언을 했던 거군요!”

소피 부인은 몸을 바르르 떨며 그들을 노려봤다. 아르투르도 그제서야, 왜 백작의 직할군이 진작에 프레드릭을 해치우러 출정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어쩐지, 미치광이 도적 한명이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수 있던 게 이상했어. 당신들이 주범이었군. 일부러 백작의 직할군을 내보내지 못하게 하고, 정보를 제공해 토벌대가 패퇴하게 하다니, 도대체 뭘 약속 받았길래 그런 짓을 한 거냐?”

집사 모리츠는 이를 악물더니, 무언가 입을 열었다.

“소피 부인, 저는 사실 당신을….”

여명의 칼날이 번뜩였다.

“신의를 저버린 배신자의 변명은 듣고 싶지도 않다. 그냥 죽어라.”

이후 배신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변명을 늘어놓거나, 모든 것을 내려두고 용서를 청했다. 드물지만 오히려 성을 내거나 체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그들은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추방령이 내려졌다. 재산과 영지는 모조리 몰수되어 백작가에 귀속되었다.

반면 본디부터 빌헬름을 따라온 부하들에게는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그들은 개인의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그대들은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자에게 충절을 바쳤을 뿐이니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새로운 영주를 섬길 기회를 주겠다. 그것이 싫다면 이 영지를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

배신자들의 목은 창대에 걸려 프레드릭의 난에 대한 전모와 함께 각 마을로 보내졌다. 마침내, 미치광이 프레드릭의 난에서 시작된 분란이 끝이 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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