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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36화 (3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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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드는 힘이 풀렸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죽지 않아 안도한 것인지, 지불해야 할 막대한 배상금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뒤로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항복했으면 조건이 훨씬 좋았을 텐데.”

만프레드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으며, 표정을 찌푸린다.

“누구 놀리나? 저 원군은 어디서 데려온거야? 대체 대공에게 뭘 주기로 한 거냐?”

“특별한 보상을 약속한 건 없는데. 그저 내 상황을 전하고, 그분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을 설명했을 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의 대공이 고작 그런 이야기에 움직였다고?”

아르투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삼촌과 내가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혈육의 정은 있거든. 가족끼리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어때서?”

만프레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가더니,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족, 가족이라.”

만프레드는 허탈하게 웃으며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넌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다. 아르투르. 부러울 정도군. 혼자서 백 명을 베는 용력을 타고난 것도 모자라, 사생아임에도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고?”

아르투르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얼마 전까지 땅 한 조각 없이 떠돌던 방랑 기사였다만. 그리고 날 때부터 내가 잘 싸운 줄 알겠군.”

“훈련을 받는다고 너처럼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런 사람은 아주 드물지. 그리고 유산을 받지 못한 사생아가 너만 있는 줄 아냐. 너는 우리 사생아들 가운데선 최고의 행운아다. 쳇. 네가 왕실과 친분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물러났을 텐데.”

만프레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사적인 이야기나 할 사이는 아니지. 약속한 금액들은 어떻게 지불할 거냐?”

“배상금은 바로 지불하지. 내 부관이 빌헬름과 용병단의 금고를 가져오고 있어. 몸값 2만 닢도… 유예 기간 없이 바로 사비로 지불하마.”

만프레드는 자신의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황금 깃털 펜으로 장문의 글을 써내려갔다. 작성을 마친 후, 그는 두루마리의 아랫단에 밀랍 덩이를 떨어뜨린 후 금괴기사단의 문장이 새겨진 인장 반지를 찍었다. 두루마리를 돌돌 말아서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정교한 백조 조각상을 꺼내 아르투르에게 건넸다. 그것을 건네는 만프레드의 표정은 고통스러워보였다.

“제기랄. 내가 이거 하나 모으려고 10년 간 진짜 개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일해서 네놈 손에 들어갈 줄 알았으면 차라리 펑펑 즐기면서 사는 거였는데 말이지. 망할 빌헬름 새끼.”

아르투르는 만프레드가 내민 두루마리와 조각상을 받았지만 의아한 눈빛이었다.

“이걸로 뭘 하라고?”

“무식하긴. 예금 증서와 계좌의 증표다. 두 가지를 가지고 피오렌치아에 있는 황금 백조 은행을 찾아가라. 그러면 내 계좌에서 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다. 네가 직접 가기 싫으면 사람을 보내도 되고. 두 가지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돼.”

아르투르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와 조각상을 가져가면 은행이란 곳에서 금화 2만 닢을 준다고? 사기를 치려거든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만프레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라이. 이 무식한 새끼.

“은행이란게 있단다. 자세한 건 네 숙부한테 물어봐라. 배상금을 제때 지불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어. 용병단 자금은 고갈 됐으니 내 비상금을 주는 거다. 양해 바래.”

“네가 찾아서 가져와야지.”

만프레드는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레무리아 반도로 돌아가면 난 한동안 밖으로 다시 못 나올 거야. 이번 원정에서 유능한 부하들이 많이 죽었다. 그런데 승리는커녕 용병단의 재정을 고갈 냈으니 날 싫어하던 놈들이 내게 책임을 물을 거란 말이지.”

만프레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당연히 내 개인 계좌에서 메꾸라는 요구가 있을 거야. 그 전에 너한테 넘기는 거다. 몸값을 내놓으라며 용병단의 성채로 쳐들어오는 너를 보고 싶진 않거든. 난 더는 네놈과 싸우고 싶지 않아.”

아르투르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연히 만프레드가 자신을 증오하거나, 적어도 미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놈은 그냥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난 네 동료를 수십 명이나 죽였다. 그러면 당연히 내게 복수심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유명 용병단의 콘도티에레라는 자가 내가 두려워서 꼬리를 마는 건 아닐 테고.”

만프레드는 풋, 하고 웃었다.

“미쳤나? 너랑 전장에서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놈이야. 그리고 우린 복수 같은 건 관심 없어. 죽고 죽이는 일에 예민해서야 용병으로 일 못해. 그건 프로답지 못한 거지. 이제 와서 네게 복수한다고 나한테 뭐가 생기는데? 부하네 유가족들 동전 한 닢이라도 더 챙겨주려면 그 시간에 돈 될 의뢰를 찾아야지.”

만프레드의 부관이 거대한 흑마를 끌고 왔고, 그는 안장을 딛고 올라탔다. 아르투르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다음번엔 적이 아닌 사이로 만났으면 좋겠군. 우린 차이점보단 공통점이 많거든. 또 만나면 술은 내가 사지. 그럼.”

만프레드의 흑마가 푸레질을 하고, 그는 부관과 함께 자신의 진영을 향해 달렸다. 아르투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만프레드의 뒤를 바라봤다. 만약 자신이 만프레드의 처지였다면 기필코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적의도 내보이지 않은 채 떠나갔다.

“특이한 놈이군.”

한편, 본진으로 돌아가는 사이 부관이 만프레드에게 물었다.

“콘도티에레, 저 자를 호의를 가지고 대하시는군요.”

“여태까지 뭘 본 거냐. 파올로. 저런 괴물은 적이 아니라 친구로 둬야지. 게다가 놈은 분명히 존중받을 만한 남자야. 자진해서 어려운 길을 가고, 당장의 고난에 굴복해서 자신의 뜻을 꺾지 않지. 그건 우리 같이 약아빠진 놈들은 결코 못 할 일이야.”

만프레드의 부관, 파올로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능력은 출중할지 모르나, 결국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입니다. 장담하건대, 언젠가 크게 당할 겁니다. 결국 뜻을 꺾거나 스스로가 믿는 명예에 배신당해 죽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도 놈의 운명이겠지. 하지만 놈은 어떻게든 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리와는 결이 다른 놈 같거든. 시간이 답을 알려줄 거다. 우리는 텅 빈 금고를 어떻게 메꿀지나 생각해보자고.”

그 날 저녁, 금괴 기사들은 빌헬름을 인도했고 수레에는 금괴를 가득 실어 가져왔다. 금괴 기사들은 번쩍이는 금괴를 건네주며 눈물을 흘렸다. 동료들이 전장에서 쓰러졌을 때조차 무심하게 지나치던 이들이, 큰 소리로 울며 떠나갔다.

아르투르와 케이는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채 떠나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세상엔 참 별사람들이… 다 있네요.”

“…동감이다”

배상금의 지불이 끝나자마자, 금괴 기사들은 도망치듯 영지를 떠났다. 금괴 기사들의 철수가 확인되자 페르디난트는 아르투르를 불러들여 말했다.

“잘했다. 이제 도파뉴 백작령은 네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것을 잡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지. 네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구나. 축하한다. 아르투르.”

강철의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아르투르는 그가 웃는 모습을 좀처럼 본 적이 없다고 떠올렸다.

“이미 소피 부인과 이야기를 끝내놓았다. 약혼식을 준비하거라. 영지를 얻게 된 것을 축하한다.”

아르투르는 대답을 보류하고 싶었다. 그는 아직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결혼한다는 것과 영주가 된다는 것은 모두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겨난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어딘가에 정착하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나온 대답은 반대였다. 도파뉴 백작이 될 기회는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던 탓이다.

***

다음 날 아르투르와 아델라이데 백작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결혼식은 아델라이데 백작이 성년에 이르는 3년 뒤에 치르기로 했다. 약혼의 증인으로는 페르디난트 대공과 소피 부인, 도파뉴 주교가 서명했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소피 부인은 각 집안의 어른으로서 예물을 교환했다. 이 조치를 두고 호사가들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아르투르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예물이 교환되고, 혼인 당사자들은 서로 약혼반지를 교환했다. 타오르는 붉은 보석이 박힌 금반지였다. 소녀 백작은 기쁨에 찬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르투르 경. 기꺼이 당신께 저와 제 가문의 미래를 맡기겠습니다. 부디 저를 받아들여주세요.”

그녀의 표정과 달리 아르투르는 조금 떨떠름했다. 결코 이 상황이 싫지는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불현듯, 아발로니아에 있는 고대의 호수를 찾아가 보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떠올랐다.

‘됐어. 날 정쟁에서 구하기 위해 하신 의미 없는 말씀이셨을 뿐이야. 난 이제 영주가 될 거고, 그런 낡은 유언에 따를 이유는 없겠지. 삼촌이 후원해주고 있는 지금이 내 세력을 가질 절호의 기회다.’

아르투르가 아델라이데와 정식으로 약혼하자, 소피 부인은 기꺼이 전권을 가진 섭정 자리를 내주었다. 아르투르는 영지의 안과 밖에서 사실상의 도파뉴 백작으로 대우받았다. 외부의 귀족들은 왕의 사생아가 묜시놀의 지원 아래 새롭게 세력을 일군 것이라고 해석했고, 영지 내부 사람들은 그들의 영웅이 영주가 된다는 소식을 기뻐했다.

“아르투르 백작 만세! 아델라이데 백작부인 만세! 두 분의 통치가 계속되기를!”

“백인을 베어 넘긴 아르투르 백작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백작 각하 만세!”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케이는 카밀에게 물어봤다.

“아저씨, 그럼 아델라이데 백작님이 어른이 되면 통치권이 다시 넘어가는 건가요?”

“그렇진 않을 것이다. 보통 여자 영주들은 남편에게 실권을 넘기게 되거든. 이제부터 네 마스터는 도파뉴 백작이 된 것이라고 봐도 된다. 게다가 그 꼬마 아가씨가 너희 마스터에게 푹 빠진 모양이니, 영지의 실질적인 주인은 결정된 셈이지.”

“헤에, 그럼 이제 우리도 백작의 신하들이 되는 거네요.”

“너흰 그렇겠지. 난 아니지만. 난 어떤 귀족에게도 충성하지 않거든.”

“엥? 그러면 아저씨는 뭘 할건데요?”

“글쎄다…. 두고 봐야지.”

약혼식이 끝나자, 아르투르는 영지 전역으로 전령을 보내 모든 봉신들을 소환했다. 그는 큰 재판이 열릴 것이라고 공고했다.

- 모든 위르마넨 가문의 봉신들은 사흘 내로 바이스부르크로 모여라. 소환에 응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적으로 간주하겠다. -

상과 벌을 내릴 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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