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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35화 (3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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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성벽 너머를 바라보며 불탄 공성 병기들을 바라봤다. 지난 돌격의 성공이 일궈낸 결과였다. 기사 한 명이 화친의 표시로 오른손을 들어 올린 채 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호화로운 깃털 장식을 박은 투구가 반짝였다.

‘전쟁터에 저런 걸 입고 다니는 녀석이 누구인지는 뻔하지.’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타고 만프레드를 마주하러 나갔다. 만프레드의 군마도 에쿠잘루스만큼 덩치가 컸지만, 갈기가 거친 흑마여서 두 말은 대비가 되었다. 서로 눈을 부딪치며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번엔 불필요한 항복 권유가 아니길 바라는데.”

만프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양측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하러 왔다.”

아르투르는 팔짱을 꼈다. 이야기를 해보라는 듯.

“- 일 이야기부터 하자고. 네가 피오렌 금화 2만 닢만 지불하는 것이 어떠냐. 위르마넨 가문의 재정이라면 충분히 낼 수 있을 거야. 분할 납부도 괜찮다.”

아르투르는 호기롭게 웃었다.

“용병질도 신용이 있어야 오래 할 텐데, 지금 와서 편을 그렇게 쉽게 바꾸면 장사 오래 하겠나?”

“그건 우리 고객님, 빌헬름 공 탓이야. 분명히 소귀족들과 도적들만 무찌르면 된다고 하셨거든. 백작군이나 너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어.”

“그래? 이상하군. 당연히 백작군을 쓰러뜨려야 이 영지를 점령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쨌든, 거절한다.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공성 병기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야. 우리 기사단엔 훌륭한 공성 기술자들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만들 자원이야 여기에서 징발하면 그만이고.”

“날 바보 취급하지 마라. 콘도티에레. 네가 내 군대의 약점을 노렸듯, 나도 네 군대의 약점을 안다. 너희는 훌륭한 병사들이지만 큰 피해가 생길 싸움은 항상 피하더군. 당연하지. 죽고 나서 돈이 무슨 소용이겠어?”

만프레드는 속으로 아차 했다. 스무 살짜리 애송이에게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놈, 그 사이 거기까지 생각한 거냐.’

“너흰 이미 몇 차례고 우릴 전멸시킬 기회가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왜? 그때마다 큰 피해를 각오해야 했거든. 너희 병사들에게 이기는 건 두 번째 문제야. 살아남아서 다음 달 보수를 받는 게 제일 중요하지. 위험한 싸움을 시키고 싶거든 그만한 돈을 줘야만 하고. 그러니 너흰 공성전은 못해.”

만프레드가 항변했다.

“우리 군대는 베테랑들로 이뤄져 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이길 수 있고, 이겨야 돈을 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 네 생각처럼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다.”

“바로 너희 군대가 베테랑이라서 공성전을 피할테지. 전쟁을 한 번이라도 겪은 놈은 알 거다. 공성전은 결국 시체로 산을 쌓아 성을 함락시키는 싸움이란 걸. 수지타산이 안 맞는 싸움이야. 인당 금화 백 닢씩 뿌린다면 모를까.”

“빌헬름은 우리의 노고에 대해 추가적인 보수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럼 우린 공성전을 시도할 수도 있어.”

“그래. 그럼 해봐. 평지에서도 날 마주 보지 못한 놈들이 성벽 위에 있는 날 어쩔 생각인진 모르겠다만.”

만프레드는 노기 어린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점차 목소리가 높아졌다.

“- 제길. 네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어. 성을 공격하지 않고 영지를 돌며 약탈을 할 거다. 바이스부르크는 버티겠지만 소귀족들의 장원이 우리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을까? 농민들은 또 어떻고?”

아르투르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경고하는데, 네 부하들이 민간인들에게 손댔다간 목숨으로 책임져야 할 거다. 그러니까 부하들 관리 잘해. 너희가 도적질을 시작하면 네 목을 얻기 전까지 일체의 협상은 없을 거다.”

“아르투르 백작 각하. 냉정하게 생각해보자고. 금화 2만 닢을 주는 게 싸게 먹히겠어? 아니면 우리를 싸워서 내쫓는 게 싸게 먹히겠어? 솔직히 못 낼 돈도 아니잖아.”

“백작가 금고에 금화 2만 닢이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영지를 복구하는데 들어갈 자금이야. 식량도 사들여야 하고, 내년엔 세금도 못 거둬. 불탄 마을도 복구해줘야 한다. 너희 같은 하이에나 떼한테 줄 것 없다고.”

만프레드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아르투르가 그의 말을 끊었다.

“나도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고 싶다. 이 땅은 휴식이 필요해.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러니 네게 평화를 제안하마. 빌헬름을 넘기고, 이 땅을 즉각 떠나라. 그렇게 하면 너희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겠다.”

만프레드는 아르투르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가 농담이 아닌 것을 알고는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겨?”

“도련님, 도련님.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모르시면 어떡해요. 네가 뛰어난 기사이고 지휘관인 건 알겠다. 하지만 전략적인 시각은 떨어지는군. 이번 전투로 넌 단지 패전을 피했을 뿐이야. 승전한 게 아니라고. 여전히 네 군대는 성 밖으로 나올 수 없지만, 우리 군대는 자유롭게 네 영지를 돌아다닐 수 있어. 그런데 네가 대승이라도 거둔 것처럼 행세하니, 웃기지 않을 수 있겠어?”

아르투르는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도 맑은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임마. 너희 이미 졌어.”

아르투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개소리야 - ?”

“내가 부른 지원군이 도착했거든. 지금쯤이면 퇴로도 끊겼을 거야. 그러니 빌헬름을 넘기면 무사히 보내준다는 건 후한 제안인 거야. 너희가 거절했으니 다음번 협상 땐 조건이 더 까다로워 질 거다.”

만프레드는 의아해졌다.

‘원병? 무슨 소리야?’

“생각할 거리 하나만 주지. 빌헬름은 레무리아에 있는 자기 인맥을 활용해 너희를 고용한 모양이던데, 나라고 인맥이 없겠어? 추방된 백작가 차남이 아는 사람이 많겠어? 페르넬의 사생아가 아는 사람이 많겠어?”

아르투르는 빙긋 웃었다.

“민간인을 약탈하면 목숨으로 책임져야 할 거라는 내 경고, 부하들에게 잘 전하고. 얼른 항복 문서 만들어서 가지고 와. 시간을 오래 끌수록 항복 조건이 가혹해질 거다.”

만프레드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처음엔 아르투르의 허세인가 싶었지만, 그의 눈은 또렷한 자신감과 강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놈의 감정은 표정만 바라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구지? 누구야. 지금 누가 그를 도우러 올 수 있다는 거야? 세 왕은 서로 싸우기 직전이고, 유력 가문들은 어느 왕을 모실지 저울질하고 있어. 어줍잖은 영주 한두 명으론 우리 용병단을 이길 수 없고.’

그때, 바이스부르크의 동쪽 언덕에서 묵직한 진격 나팔이 들려왔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평선에서 나타난 까만 점들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일렬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천 명의 기병이었다.

‘기병만 천, 아니 이 천 이상이다!”

기병들의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끝없는 장창의 숲이었다. 그들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들의 움직임은 모두 절제되어있고, 철저히 통제 아래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시꺼먼 갑옷 위로, 검은 건틀렛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만프레드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묜시뇰의 검은 군단….”

아르투르는 호쾌하게 웃었다.

“항복 조건을 다시 가져오라고. 친구.”

만프레드는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갔을 때, 금괴 기사단은 이미 집합을 완료하고 전투 대형을 갖춘 뒤였다. 그들이 백작군을 상대할 때 보였던 여유는 없었고, 모두 잔뜩 긴장해 지평선에 나타난 적들을 마주 봤다.

수천 명의 병력이 모두 만프레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의 대장에게 상황에 대한 대책을 요구한 것이다. 이제 어쩔 셈이냐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만프레드도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얼굴을 굳혔다.

‘검은 군단을 상대로 이길 순 없어. 더 좋은 항복 조건을 받아내는 게 최선이다. 제기랄, 도대체 언제 도착한 거지? 우리 정찰병들은 뭘 한 거고?’

배치를 끝낸 검은 군단의 규모는 금괴 기사단의 두 배, 혹은 세 배는 될 법했다. 기마 궁수들이 좌우로 퍼져 금괴 기사단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강철 같은 규율을 자랑하는 군단의 장창병들이 앞으로 전진했다. 두 군대 사이의 거리는 꽤 남아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 금괴 기사들은 압박을 받았다.

‘우리가 공격을 받기 시작하면, 전멸까지 몇 시간이나 걸릴까?’

만프레드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곤, 고통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백기를 올려. 내가 항복하러 가겠다.”

***

만프레드는 금괴 기사단의 깃발을 들고, 검은 군단의 지휘 막사를 찾아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은 장신의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고 꼿꼿이 선 군주는 오만한 표정으로 만프레드를 내려다봤다.

그의 양옆에는 금발의 거구의 기사인 아르투르와 갈색 머리의 귀공자인 레오폴트 백작이 앉아있었다. 만프레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양손으로 깃발을 들어 바쳐, 복종의 뜻을 표했다.

“만프레드 폰 아르길락이 고귀한 묜시뇰, 페르디난트 오'데르만 공을 뵙습니다. 부디 저와 제 부하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하며, 항복의 의사로 저희 군단기를 바칩니다.”

페르디난트는 강철같이 단단하고 단검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만프레드는 잔뜩 고개를 숙인 채, 명이 내려지길 기다렸다.

“아르길락 공은 너를 아들로 인정한 적이 없다. 사생아 주제에 감히 공작 가문의 이름을 사칭하지 말아라. 너는 출생을 모르는 용병일 뿐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천한 콘도티에레를 뭐라고 부르시든 묜시놀 전하께 달린 일입니다.”

페르디난트는 팔걸이에 손을 올린 채 한창 그를 내려다봤다. 그의 머릿속에선 수십 가지 정치적 계산이 순식간에 오갔다. 그는 곧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파뉴 백작, 그대의 영지를 침입한 자들이니 그대가 처우를 결정하라.”

“고귀한 묜시놀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르투르는 페르디난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곤, 만프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읊어라. 새 항복 조건을.”

“일전에 말씀하신 제안을 받아들여 빌헬름을 즉각 인도하겠습니다. 또한 전쟁 배상금으로 피오렌 금화 2만 닢을 내겠습니다.”

“4만 닢.”

“…백작 각하.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그 정도 배상금을 내려면 저희는 가진 장비들까지 팔아야 합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한층 차가워졌다.

“5만 닢.”

말문이 막힌 만프레드는 당장에라도 아르투르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라면, 이 자리에 결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전쟁 배상금으로 피오렌 금화 5만 닢을 내고, 빌헬름을 인도하겠습니다.”

“동의한다. 그럼, 다음 안건이군. 몸값은 얼마나 낼 수 있지?”

“예?”

만프레드는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피오렌 금화 5만 닢이면 작위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더 달라고?

“전쟁 배상금은 너희가 침공했으니 지불하는 것이고, 지금 너희는 전부 포로 신세나 마찬가지잖나. 몸값은 지불해야지.”

만프레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비록 사생아 출신의 용병 기사일지언정, 자신이 이뤄낸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불패의 용병단을 일궈낸 그의 명성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강력한 영주들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갓 백작이나 된 녀석에게 이런 꼴을 당하다니.

하지만 그는 고개를 더 숙여 보였다.

“피오렌 금화 2만 닢을 지불하겠습니다. 다만, 보유하고 있는 현금이 부족하므로 자산을 매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아르투르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받아들이마. 전쟁 배상금 5만 닢은 즉각 지불하고 몸값 2만 닢은 1년의 유예기간을 주겠다.”

“관대한 협정에 감사드립니다. 백작 각하.”

만프레드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르투르가 도파뉴 영지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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