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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32화 (3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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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가 이어진 지 2주째, 백색 산맥을 타고 겨울의 바람이 찾아왔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파고드는 계절. 사람들은 한 해의 끝이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했다.

농민병들의 마음은 어느 샌가 집으로 향했다. 겨울을 날 충분한 식량은 있나? 가족들은 뭘 하고 있을까? 도적들이 아직 잔존해있다는데 그건 괜찮을까? 그들은 모닥불에 여럿이 모여 자신들의 불안한 마음과 외로움들을 녹여갔다.

“전쟁이 언제쯤 끝날까? 적들은 바로 눈앞에 있잖아. 왜 공격을 하지 않는 거지?”

“그러게. 아직 추수하지 못한 곡식들이 들판에 있는데… 빨리 집에 돌아가야 돼.”

“저번에 싸웠을 때 죽은 사람도 많잖아. 이번 도적들은 만만치 않은 것 같아.”

“단순한 도적들이 아니라 용병들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 더 힘을 내야지. 우리가 져서 저런 놈들이 풀려나면 우리 고향에 무슨 짓을 하겠어?”

그때, 새롭게 온 병사가 끼어들었다.

“기사 나리들이 그러시던데. 실은 저들은 도적과는 관련이 없고, 그냥 빌헬름 공을 백작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이래.”

새로운 병사의 난입에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자넨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디서 왔나?”

“여기 반대편. 순찰을 하다가 길을 잃었지. 몸 좀 녹이고 가려고 왔어.”

새롭게 온 병사는 모닥불로 다가가 손을 녹이며, 입김을 후- 후 불었다. 자신들과 별 다를 바 없이 허름한 복장에 손질도 제대로 되지 않은 무기. 병사들은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을 풀었다. 같은 처지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아까 그 이야기나 마저 해보게. 아르투르 경의 포고에 따르면 빌헬름이 프레드릭의 배후였다고 하던데.”

“어떻게 알겠어? 귀족 나으리들이 거짓말하는 게 한두 번이여야지. 오히려 아르투르 경이 백작님과 결혼하고 싶어서 꾸민 소문이란 말도 있어. 내가 모시는 기사 나리는 그렇게 믿더라고.”

그의 말에 엘베르 마을 출신 병사가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르투르 경은 그런 분이 아니야. 평민들과도 같이 어울리고, 공정한 재판도 치러주신다고. 나는 그분을 믿네.”

새로 온 병사는 쓰게 웃었다. 비웃음과 연민을 담은 채.

“아저씨. 나이도 있으면서 왜 이렇게 순진해? 결국 나으리들이 바라는 건 다 똑같아. 더 많은 권력과 명성. 우리 같은 천것들에겐 사실 아무 관심도 없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고. 그리고 위치가 달라지면 사람도 변하는 거야. 이제 아르투르 경은 영주 대리고 백작님의 약혼자라고.”

그의 말에 다른 병사들도 모두 쓰게 웃었다. 하기야, 맞는 말이었다. 귀족들은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했다. 핑계를 대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평민들의 눈에서, 귀족들은 야망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들을 내다 버릴 수 있는 냉혹한 자들이었다. 높은 명성, 더 많은 영토, 가문의 영광 같은 것들을 위해서라면 아랫것들이 어떻게 되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도 대부분의 귀족은 그랬다.

“결국 우리로선 그놈이 다 그놈이라고. 우리 같은 민초들을 신경써주는 귀족의 존재는 거짓말이라고. 꿈에서 깨어나. 아저씨.”

새로 온 병사의 냉소적인 말에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 한 명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면 빌헬름이 되나, 아르투르가 되나 우리랑은 관련 없는 싸움인 거네?”

병사들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아주 위험한 말이었다. 그 말을 했던 병사도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말은 이미 내뱉어진 후다. 새로 온 병사는 주변을 둘러봐 들은 사람이 있나 보더니, 마지막 말을 한 병사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조심해야지. 가족들에게 무사히 돌아가려면. 모두 버티자고. 동지들. 난 본대로 복귀할게.”

새로 온 병사는 어색한 침묵을 깨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막사들 사이를 걸어가다가, 다른 병사 무리가 길어지는 싸움에 대해 토로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자 그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새롭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퍼뜨렸다.

이 싸움은 우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실은 아르투르 경도 똑같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명예로운 기사의 이야기보다 농민들에게 훨씬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전투 한번 없이 대치만 이어져 지루함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이야기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병사들 사이에 싸움에 대한 의구심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싸움에서 마음이 떠나니 기강이 풀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눈앞의 적들은 공격해올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즐기고 있으니, 자신들도 그렇게 하지 못할게 뭔가?

“야, 근무 시간에 낮잠 자면 어떡해.”

“뭘 걱정해. 재들도 자고 있잖아. 싸움은 안 벌어진다고.”

그 때 낮잠을 자던 보초병은 등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느껴 황급히 일어났다. 왜소한 농민보다 체격이 두 배는 될법한 거구의 기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변명 거리가 있나?”

아르투르의 싸늘한 목소리에 보초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용서해주십쇼! 나리! 제가 그만 방심했습니다!”

“들을 것도 없군. 끌어내서 목을 베도록.”

“나리!”

아르투르를 호위하던 두 기사가 보초병을 억세게 붙잡고 끌고 갔다. 보초병은 살려 달라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때, 카밀이 다가와 아르투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혹시 제가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끌려가는 보초병을 보고 있던 아르투르는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해보게.”

“그를 참하기보다는, 채찍형으로 끝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자네는 이번에도, 내가 평민들의 사정을 몰라준다고 말할 셈인가?”

아르투르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카밀을 바라봤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아밋서텐으로써 군대의 조직력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자를 벤다면 당장은 기강이 유지되겠지만, 결국 사기는 더 떨어질 겁니다. 지금 병사들이 싸우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경에 대한 신뢰와 애정 때문입니다. 경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면 그들은 더는 경을 위해 싸우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경계에 태만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신체 일부를 자르거나 채찍형이면 경고로는 충분합니다. 이들은 경께서 보시던 투지 있는 군인들이 아닙니다. 단지 내년에 풍년이 들기만을 바라는 평범한 농사꾼들이지요. 강인한 정신력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아르투르는 혀를 차며 카밀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안건을 넘겼다.

‘이런 군대로 무슨 전쟁을 치를 수 있단 말인가?’

아르투르는 프레드릭을 토벌하면서 농민병들이 보인 용기에 놀랐었다. 그들은 사자처럼 용맹히 싸우며 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용사들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싸움이 빨리 끝나기만 바라는 유순한 양들이 되어있었다.

‘빌헬름이 도적단의 배후라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 거야. 혹은 믿더라도 사실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르투르는 막사에 틀어박혀 더 정교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데 집중했다. 병력들의 사기가 더 떨어지기 전에 결판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다.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못 보던 사람들이 야영지를 은밀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휘관 막사를 찾아다니며 은밀한 제안을 하고 다녔다.

“위르마넨 가문의 진정한 가주이자 도파뉴 백작인 빌헬름 공을 대신해 카른 남작께 인사를 전합니다. 전장에서 이탈하신다면 차후의 죄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포상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빌헬름 공은 내가 전장에서 물러나면 얼마를 주실 생각인가?”

“마을 한 개와 피오렌 금화 500닢입니다. 만약 빌헬름 공과 함께 싸워주신다면 그 두 배입니다.”

두건을 쓰고 찾아온 밀정은 그가 가져온 상자를 내려놓았다. 남작이 상자 뚜껑을 발로 차자, 번쩍이는 빛이 새어 나왔다. 카른 남작의 눈동자에 금화의 빛이 반사되어 번쩍인다.

“내 명예치고는 너무 싸군. 머튼 남작령을 주신다면 협력하겠네.”

“딱 제안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을 요구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머튼 남작령의 주인은 카른 남작이십니다.”

그는 빌헬름의 친필 사인이 담긴 영지의 증서를 넘겨주었고, 카른 남작은 받아들여 만족스럽게 펼쳤다. 자신은 이제 남작령 두 개를 다스리는 유력 영주였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건방진 애송이의 밑에서 명령을 받는 게 구역질이 났거든. 나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아 떠나겠네.”

만프레드가 푼 첩자들은 아르투르의 군대를 전투 한번 없이 와해시켜갔다.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귀족들은 맹약을 잊고 새로운 기회를 좆기 시작했다.

“철군이라니? 적을 앞에 두고 그게 무슨 소리요?”

한창 작전 지도를 보고 있던 아르투르에게, 카른 남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전해온 소식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전선도 소강상태지 않소. 영주 대리. 우리 병력의 물자도 모자라고, 병력도 더 필요해 보이오. 영지로 돌아가 병력을 보충하고 오겠소. 게다가 아직 토벌하지 못한 도적들도 있고.”

아르투르는 순간 카른 남작을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보일 따름이었다.

“양해 부탁드리오. 위르마넨 가문이 도적단 토벌을 늦게 해서 신경써야할 게 너무 많거든. 마침 60일의 소집 기한도 끝나가는 참이 아니오? 더 복무해야 한다면 돈으로 지불하겠소.”

아르투르는 생각에 빠졌다. 이득 없는 싸움에서 빠지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무기를 뽑아 저들을 베어버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지만, 아르투르는 눈을 내리깔며 충동을 가라앉혔다. 저들을 벨 명분이 없었다. 일 년에 60일. 그것이 봉신이 영주에게 제공해야 하는 군사적 의무였다.

‘자기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돌아가겠다는 영주를 막을 방법은 없어. 나는 기사지, 산적은 아니야.’

그 사이, 카른은 아르투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르투르는 그의 뒤를 노려볼 뿐, 별다른 방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그 날 이후 남아있던 귀족들도 하나둘 핑계를 대며 군대를 물렸다. 군영을 떠나가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낮아졌다.

참다못한 아르투르가 귀족들을 향해 일갈했다.

“적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오. 이 땅이 살인자의 손아귀에 넘어가도 좋다는 거요? 그러고도 당신들이 기사고, 고귀한 핏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떠나가는 자들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못 들은 척 하거나, 아르투르에게 냉소를 내보였다. 그의 무력이 두려워 대놓고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는 너도 결국 백작이 되고 싶은 것일 뿐 아니냐. 내가 왜 네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결국 아르투르의 곁에 남은 것은 알튼 남작을 비롯한 소수의 기사들뿐이었다. 그들은 아르투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여기거나, 그에게 매료된 이들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 프레드릭에게 친지를 잃어 빌헬름을 증오하는 자거나.

알튼 남작은 떠나가는 귀족들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쓸모없는 겁쟁이들아! 아르투르 경이 너희들의 영지를 구해줬거늘 너흰 은혜를 이렇게 저버리는 것이냐! 도움을 받았으면 되갚아야 할 것 아니냐!”

그는 큰 목소리로 일갈하고는, 아르투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소. 경. 용기 있는 동료 한 명이 겁쟁이 열 명보다 낫소.”

아르투르는 고개만 끄덕이고, 우울한 표정으로 텅 빈 막사들을 바라봤다. 기존 병력의 절반도 되지 않은 숫자만 남았다. 금괴 기사단과의 군사적 균형은 완전히 깨어진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서 말했다.

“바이스부르크로 철수합시다.”

아르투르가 처음으로 내리는, 후퇴 명령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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