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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31화 (3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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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만프레드는 아군의 피해를 점검했다.

“미복귀자 보고 드립니다. 기사가 스물셋, 무장 기병이 서른, 보병 백 이십입니다. 포로의 숫자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콘도티에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보고를 하는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 그는 금괴 기사단의 아밋서텐 역할을 하고 있는 만프레드의 부관이었다.

“적들의 피해는 어때?”

만프레드는 투구를 벗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훤칠한 키의, 조각상 같은 얼굴을 지닌 흑발의 미남이었다.

“아군 저격수들에 의해 무장이 빈약한 보병들이 대거 사살되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입은 것 이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악마 자식만 아니었어도 단번에 끝나는 전투였는데. 아군 피해가 심하구만. 알았어. 나가봐. 야습의 가능성이 크니 보초들 두 배로 늘리고.”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만프레드는 청년이 나가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망했어, 망했다고! 빌어먹을 방랑 기사 한 놈 때문에!”

분명히 처음에는 간단한 의뢰였다. 빌헬름과 함께 영지로 진격해 도적들을 소탕하고, 반항적인 소영주 몇몇을 손봐주면 되는 쉬운 의뢰. 서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용병대 중 하나인 금괴기사단에겐 분명히 매우 쉬운 의뢰였다.

‘그런데 벌써 죽은 기사가 스물 셋이야! 이대로면 내 지도력이 위험해. 더 이상의 손실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만프레드는 복잡한 상념에 빠졌다.

‘그래, 당장은 괜찮아. 용병단을 그동안 잘 이끌어와서 내 편이 많거든. 하지만 피해가 더 늘어나면 내 입지도 위협받을 거야. 용병단 자체도 약체화될 거고.’

‘이런 싸움을 벌일 줄 알았더라면 이번 의뢰는 맡지도 않았을 거야. 피오렌 금화 3만 닢에 눈이 멀어버렸어.’

하지만 이미 의뢰를 수락한 이상, 반드시 성공시켜야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었다.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다는 금괴 기사단의 명성도, 자신에 대한 부하들의 충성과 신뢰도, 또 더 높이 올라가려는 자신의 야심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놈을 어떻게 잡으면 좋단 말이지? 혼자 있으면 방법은 많아. 석궁 세례를 퍼붓거나 갈고리를 던져서 묶으면 돼. 문제는… 어떻게 놈을 홀로 나오게 하냐는 거지.’

만프레드는 막사 안을 서성였다. 방법이 없나? 어떻게 하면 되지? 내가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맞설까? 아냐, 그건 너무 위험해. 나도 몇 번의 일기토를 이겨 승리한 적이 있지만, 저 괴물 상대론 역부족이야.

그때, 묘안이 떠올랐다.

“가만, 놈을 잡을 수 없다면 놈과 싸워주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만프레드는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돌아와라! 아밋서텐! 네게 지시할 것이 있다!”

***

같은 시각, 아르투르도 자신의 막사 주변을 서성였다. 부상자들의 비명으로 자꾸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전투는 분명 자신들의 승리였다. 자기가 죽인 적병만 칠십이고, 적들은 공포에 질린 반면 아군은 용기 있게 싸웠다.

그런데 아군의 피해가 더 심했다. 적의 석궁수들은 무장이 빈약한 농민병들을 노려 볼트를 퍼부었고, 금괴 기사단의 보병들은 조직력을 앞세워 아군 보병대열을 무너뜨린 것이다.

‘게다가 놈들은 후퇴할 때도 등을 보이지 않았지. 차분히, 순서대로 퇴각했어. 잘 훈련 받은 진짜 군대다. 어설픈 놈들이었으면 단번에 내가 무너뜨렸을 거야.’

반면에 아르투르의 군대는 절반은 아예 농민병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영주들 밑에서 모여든 급조된 병력이었다. 애초부터 하나의 군대로 조직된 금괴 기사단과는 조직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장의 차이도 심각하다. 적들은 말단 보병도 흉갑 정도는 입고 나오는데, 농민병들은 천 쪼가리가 고작이다.

“으아아아악!”

지휘 막사 근방에 있는 의무 막사에서는 환자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갑옷을 입었으면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을 상처도 무장이 빈약한 자들에겐 치명적이었다. 군의도 부족하고 약재도 부족하니, 저들 중 대다수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살아남더라도 평생 갈 장애를 가지고 살겠지.’

아르투르는 씁쓸한 마음과 후회가 몰려왔다.

‘냉정해야 한다. 아르투르. 죽은 이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다면, 승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모든 면에서 열세야. 어떻게?’

정면에서 싸우기엔 역량이 부족하고, 복잡한 작전을 수행하기엔 군대의 훈련도가 낮아서 무리였다. 결국 아르투르는 기존의 수단에 의존하기로 했다.

‘지금보다 내가 더 잘 싸워야 해. 더 압도적인 존재감을 적과 아군 모두에게 보여야 한다. 그게 유일한 승산이야.’

***

다음 날, 금괴 기사단은 야영지에 공사를 시작했다. 목책을 만들어서 이어붙이고, 언덕에 말뚝을 박았다. 카밀은 진지 구축을 방해하기 위해 궁수들을 인솔해 공격했다. 그러자 석궁을 든 용병단 저격수들이 기다렸다가 귀신같이 아군을 쏘아 맞혔다. 용병단의 석궁은 일반적인 석궁들보다 사거리도 길고 정확했다.

“젠장할, 저놈의 석궁은 어떻게 활만큼 사거리가 나와?”

사람을 쏘아죽이며 밥을 먹고 사는 용병 석궁수들에 비해, 아군 궁수들은 토끼나 맞춰봤을까 싶은 농민 궁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카밀이 훈련시킨 장궁병들은 충분히 그들에게 비견할 만 했지만, 수가 너무 적었다.

“후퇴하라!”

카밀이 후퇴를 명했고, 아르투르 군의 궁수들은 많은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아르투르는 첫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면적인 공격 계획을 꾸려봤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공략 방법이 없었다. 진지 공사를 하는 적의 병력은 일부고, 주력부대는 언제고 응전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아군이 진격하는 즉시 그들이 대응할 것이다. 탄환의 비가 쏟아지면 갑옷이 빈약한 아군 보병들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틈으로 적의 기사들이 돌격해오고, 보병대가 뒤를 받쳐주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고지를 점령했군.’

아르투르는 자신의 군대로는, 당장 저들을 무찌를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를 유도해야 해.’

그가 택한 두 번째 방법은 기병대를 이끌고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프레드는 정찰 기병들이 공격당해도 후퇴만 지시할 뿐, 응전하지 않았다. 보급 병력들이 공격받더라도 대응하지 않았다.

“나오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거다!”

“걱정 마시지. 군영 안에 세 달치는 있거든.”

그 사이, 금괴 기사단은 야영지를 간이 요새로 만들어냈다. 야영지를 둘러싼 울타리와 목책들은 아군 궁수들을 보호하고 있었고, 공격자의 접근은 어려운 반면 수비자가 나가기에는 쉬운 환경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계속해서 그들의 보급로를 끊는 한편, 직접 목책 앞으로 가서 도발을 하기로 했다.

“용병 쓰레기들아! 언제까지 웅크리고만 있을 셈이냐! 이리 나와 싸우자!”

“너희 금괴 기사들은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내들인가 보구나.”

“만프레드! 대장 간의 결투로 이 싸움을 끝내자!”

아르투르의 조롱에도 금괴 기사들은 멀뚱히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이 노련한 용병들은 실력 차가 확연한 상대에게 싸우러 나와 목숨을 헌납하는 일은 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아르투르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할 줄 아는 욕은 그게 전부냐! 금발의 애송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엉덩이도 튼실하겠군! 따먹어주고 싶은데!”

“우리 대장이 겁이 좀 많아. 덕분에 오래 살고 있지. 백날 거기서 우리 대장은 그래도 안 나올 거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만프레드는 자신에 대한 농담을 듣더니, 종자에게 손짓했다. 그의 종자가 육중한 석궁을 가져다주었고, 그는 목책 위에 석궁을 거치하고 곧장 아르투르에게 탄환을 날렸다. 탄환은 통상적인 석궁보다 두 배는 빠르고 강력했다.

아르투르는 침착히 탄환의 궤적을 읽은 후, 그것이 지나갈 장소에 여명을 휘둘렀다. 탄환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떨어졌다. 금괴 기사들은 휘파람을 불고, 만프레드는 박수를 쳤다.

“저기 대장은 칼을 쓰는데, 우리 대장은 석궁이나 쏘고 말이야! 비겁하다!”

금괴 기사들은 만프레드를 보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 어린 조롱이라기보다는, 유희에 가까웠다.

만프레드는 피식 웃었다.

“지들도 안 나가면서 말은 많아요.”

만프레드는 두 번째 탄환을 발사했다. 아르투르는 이번엔 재차 날아오는 탄환을 둘로 갈라버렸다. 대륙에서 몇 명이나 보일 지 알 수 없는 묘기였다.

“이야. 대단하구먼. 기사 대신 광대를 하는 게 어떠냐? 여기가 네놈 묘기 보이러 온 곳인 줄 알아?”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의 대답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기사란 본디 무인이며, 화끈한 근접 전투를 선호한다. 그러니, 싫건 좋건 자신보다 뛰어난 무기술을 보이는 자에겐 마땅한 경의를 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놈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당황하셨구만.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가 쫄 줄 알았나? 지금 넌 검술 대회에 나온 게 아냐. 전쟁터에 나와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 중에 네놈의 그… 얌전한 욕설에 열 받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 한방 더 쏘기 전에.”

아르투르는 황당함을 느꼈다. 기사 간의 싸움에서 원거리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명예롭지 못한 행위였다. 자신은 다치지 않고 적만 쓰러뜨릴 수 있는 비겁한 무기를 어떻게 고귀한 이들의 싸움에 사용한단 말인가? 그런 자는 적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분명히 내가 자란 궁정에서는 그랬지. 거기에 용병 기사 따위는 없었다고.’

세 번째 탄환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그것을 쳐내고자 했지만, 주의가 흐트러진 탓에 행동이 늦었다. 탄환이 아르투르의 어깨 갑옷을 뚫고 들어가 겨드랑이에 박혔다.

아르투르는 이를 악물고, 말을 돌려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 금괴 기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우리 대장이 백인을 벤 아르투르를 이겼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습을 봐라!”

“백인을 벤 아르투르를 이긴 만프레드 대장 만세!”

진영으로 돌아온 아르투르는 응급 처치를 받았다. 상처가 깊지 않아 탄환을 뽑은 뒤 붕대를 감는 것으로 응급 처치를 마무리했다.

“이런 비겁한 새끼들.”

케이는 아르투르에게 붕대를 감아주며 말했다.

“달리 말하면 똑똑하게 싸우는 것 아닐까요. 마스터와 칼싸움을 해서는 무조건 진다는 걸 알고 있는 거잖아요. 도적들은 아무리 싸워도 못 배우더만.”

“그래 봐야 명예도 모르는 하찮은 용병들일 뿐이다! 꼴에 기사라고 대접해준 게 잘못이지.”

케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평범한 기사 나리들이었다면 마스터의 도발에 문을 열고 나왔겠죠. 그리고 나는 아무개 가문의 누구다. 하고선 한 합, 잘 싸우면 두 합 만에 목이 날아갔을 거고요. 자기가 불리한 방식의 싸움을 피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케이의 말은 아르투르가 모두 알던 내용이었다. 몇 차례고 병법서와 아버지가 전술을 지도하며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언제나 유리한 방식으로 싸울 것. 하지만 그동안은 그저 나아가 맞붙어 싸우는 것으로 충분했었기에,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전 마스터가 마음만 먹으시면 더 잘할 거라고 봐요. 마스터가 고집이 좀 있어서 그렇지 배울 땐 정말 빠르게 배우시는 것 같거든요?”

그 날의 공방 이후로도, 만프레드는 자리만 지켰다. 시간이 더 지나자, 금괴 기사단은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주사위 도박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중에는 짐승들을 잡고 매춘부들을 불러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다름 아닌 아르투르의 병력들이 보는 앞에서.

‘내 병력들을 방심시킬 수작이야.’

카밀이 정탐을 하고 오니, 아르투르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적의 최정예들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투르의 군대가 돌격해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아르투르는 계속 기병대를 이끌고 적들의 보급을 차단하는 한편, 영지 외부로 전령을 급파했다.

‘결국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지.’

만프레드가 전투를 회피한다면, 자신도 쓸 수 있는 카드가 있었다.

‘지금은 네 뜻대로 휘둘려주지, 마음껏 날뛰어봐라, 하지만 결국 시간은 내 편이 될 것이다. 만프레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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