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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9화 (2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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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밤, 아르투르는 크리스티안이 주둔 중인 성에 도착했다. 온종일을 쉬지 않고 달려온 에쿠잘루스는 조금 지치긴 했지만,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카밀이 나와 아르투르를 안내했다. 그들은 도적들을 심문하던 지하 감옥의 밀실로 갔는데, 크리스티안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 세 사람만이 있는 밀실에서, 그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배후에 대한 건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만큼 심각한 안건이었다.

“도적들이 술술 불더군. 그들을 지원하는 '나으리'가 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그와 접촉하는지 물어보고, 우리가 먼저 도적들로 위장하고 접선책과 만났지. 그리고 그 접선책을 잡아와서 확인한 걸세.”

“좋아. 접선책은 어디 있나?”

카밀이 손뼉을 치자, 보초병들이 수갑에 묶인 건장한 사내를 데려왔다.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숨을 쉬고 있었다. 몸 곳곳에 구타의 흔적이 가득했고, 손톱도 빠져 있었다. 카밀은 차가운 물을 뿌려 그를 깨웠다.

“일어나라.”

“어-푸푸푸.”

의식을 찾은 사내는 연신 숨을 몰아쉬다, 아르투르의 시선을 올려다봤다.

“허억, 허억, 허억. 아르투르 경 아니시오? 나를 풀어주셔야 합니다. 나는 귀족이니 신변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몸값을 지불할 권리가 있단 말이오.”

아르투르는 못 미더운 눈길로 그를 쳐다본다.

“게다가 나는 기사 작위도 있단 말입니다. 명예로운 분으로 이름이 높지 않으십니까?”

“하는 짓은 도적인데, 기사라고? 이름이나 대봐라.”

“오스카 폰 자크링겐. 현 자크링겐 백작의 오촌 조카입니다.”

“자크링겐 가문이 이번 일에 연결되어 있나?”

“아니, 그건 아닙니다. 제가 빌헬름 경을 개인적으로 모실 뿐이죠.”

아르투르는 신원 확인을 위한 질문을 던졌다. 자크링겐 가문의 족보는 어떻고, 가문원들의 성격은 어떠한지, 자크링겐 성을 묘사해보라는 등의 질문이었다. 실제로 자크링겐 가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아니면 지어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오스카가 증언한 바가 아르투르가 아는 사실들과 일치하자, 그는 오스카의 수갑을 풀어줬다.

“젠장, 네 이놈. 내가 뭐라고 했나! 감히 귀족을 고문해? 아르투르 경. 이 자를 처벌해주십시오. 포로의 고문은 금지된 일 아닙니까.”

수갑에서 풀려난 오스카는 카밀을 가리키며 씩씩대었지만, 아르투르는 벽에 삐딱하게 등을 기댄 채 말했다.

“오스카 경. 그대는 전장에서 싸우다 사로잡힌 명예로운 포로가 아니오. 비열한 수작질이나 획책하다 생포된 것이니 포로의 권리도 없소. 내가 호의를 베풀 때 내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시오. 빌헬름이 왜 프레드릭을 지원한 거요?”

“뻔한 일 아닙니까. 주군께서도 위르마넨 가문의 일원으로써 작위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원래 도파뉴 백작령은 두 형제가 사이좋게 나눠 가져야 했는데, 선대 백작이 그것을 모두 독차지하고 주군을 내쫓았으니 이제 그분도 정당한 몫을 되찾고자 했을 뿐입니다.”

아르투르는 팔짱을 꼈다.

“그래. 선대 백작과 빌헬름의 우애가 깊었다는 건 알겠소. 그런데 미치광이에게 군사와 자금을 대줄 이유로는 부족해 보이는데.”

오스카는 한동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카밀이 몽둥이를 들어 올렸지만 아르투르가 손을 내밀어 저지했다.

“경도 알아두셔야 겠지요. 주군께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자 하신 겁니다. 수천의 군대가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소녀 백작이 자진해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도였습니다.”

아르투르는 기가 차올라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니까 당신 주군이란 사람은 프레드릭이 도적단을 이끌고 영지를 난장판으로 만들면, 봉신들이 그녀를 저버릴 거라고 본 거군. 그때 당신 주군이 나타나 영지의 구원자 행세를 하려던 거고.”

“정확히 보셨습니다.”

아르투르는 분노로 일그러졌고, 번개같이 오스카의 뺨을 후려쳤다. 거센 피가 튀며 그가 입에서 부러진 이빨들을 뱉어냈다.

“이런 미치광이들을 봤나! 당신은 기사라는 자가, 주군이 그런 짓을 하는 걸 보고도 가만있던 거요?”

오스카는 침묵을 지키며 고개를 숙였다.

“…. 경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우린 손 잡아서는 안될 악마를 키워 버렸죠. 맹세하건대,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를 줄 알았더라면 결코,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카밀이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이래서 내가 나으리들을 싫어해. 남들 인생 조져놓고 내 의도가 아니었다, 한마디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지.”

“미치광이 프레드릭이 한 짓을 알고 있다니 긴말 않겠소. 당신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거요. 당신이 인간으로서 쥐 털 만큼의 명예라도 남아있다면,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시오. 그래서 당신 주군의 다음 계획은 뭐요? 경이 더 이상 기사가 아니라면 살려둘 이유도 없다는 걸 명심하시오.”

오스카는 무기력한 목소리로 답했다.

“계책으로 작위를 되찾는 일이 실패했으니, 창칼로 빼앗으러 오시겠지요.”

“추방자에게 군대가 어디 있다고 백작령을 침공할 수 있단 말이오?”

“경. 모두가 당신처럼 명성을 위해 움직이는 건 아닙니다. 명성은 우리 귀족들에게나 중요하죠. 하지만 돈은 누구에게나 유용합니다. 지금쯤 금괴 기사단의 병력이 영지의 남쪽 경계를 침공하고 있을 겁니다.”

“뭐라 - ?”

아르투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케이가 들어왔다.

“마스터! 바이스부르크에서 온 급보입니다! 백색 산맥의 관문이 공격받고 있답니다! 적들은 수천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르투르는 굳은 표정으로 케이의 보고를 들었다.

***

아르투르가 이끄는 백작령의 기병대가 남쪽 관문에 도착했을 때, 이미 관문은 함락되어 있었다. 포효하는 곰의 깃발이 불타고, 금괴를 치켜든 기사가 그려진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프레드릭의 난 때문에 남부 경계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터라 수천의 병력이 접근하는데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었다. 아르투르는 기병대를 이끌고 관문을 돌파해오는 병력을 바라봤다.

적군의 행렬은 말까지 완전무장한 중기병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라 중무장 보병들이 오와 열을 맞춰 행군했다. 어림짐작해도 2천은 넘어 보였다. 하나같이 잘 훈련되고 무장 상태가 훌륭한 정예군이었다. 행렬의 중간쯤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황금 갑옷을 입은 사내가 흑마를 타고 있었는데, 아르투르와 눈이 마주쳤다.

황금 갑옷의 기사는 멈춰 서서 아르투르를 바라봤는데, 아르투르도 그를 바라본 채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과 적개심을 동시에 느꼈다. 둘은 흥미를 가지고 서로를 쳐다보다, 아르투르가 말머리를 돌림으로써 첫 대치는 끝이 났다.

“후퇴 깃발을 들어라. 기병대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야. 크리스티안, 영주들에게는 전 병력을 소집해 바이스부르크로 모이라는 전령을 보내게.”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내 생각엔 영주들이 우리 편으로 가세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쪽도 정당한 명분이 있잖아. 이쪽 군주는 신망을 잃었고.”

“그렇다면 영주들을 설득하는 일은 내가 맡지. 크리스티안, 자네는 기병대를 이끌고 먼저 돌아가게.”

두 사람은 역할 분담이 끝나자 지체 없이 말을 달렸다. 아르투르는 사흘 만에 전 백작령을 돌면서 모든 기사와 영주들을 소집했다. 그는 빌헬름이 프레드릭을 사주해 난을 일으켰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번 전쟁이 도적단 토벌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런 불의에 타협한다면, 그대들은 더 이상 기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오. 우리는 누가 이 영지의 혼란에 책임이 있고, 그 죄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소.”

카른 남작이라는 영주는 이렇게 말하며 합류를 거부하기도 했다.

“아르투르 경. 그래 봐야 자네도 자네가 백작이 되기 위해 싸우는 것 아닌가? 무능하기론 아델라이데 백작도 마찬가지다. 위르마넨 가문의 다툼에 우리 가문이 끼어들 이유는 없어 보이는군.”

아르투르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럼 누가 옳은지 가려봅시다. 결투를 신청하는 바요. 날 패배시킨다면 그대가 소집에 응하지 않는 걸 후일 처벌하지 않겠소.”

“결투도 소집도 거부한다면?”

“그럼 빌헬름이 교수형 당할 때 당신도 그 옆에 같이 걸리겠지.”

아르투르의 위협에 영주를 모시던 기사들이 칼을 뽑았고, 병사들이 석궁을 겨눴다.

“난 혼자서 백 명도 상대해봤소. 스무 명쯤이야.”

아르투르는 웃어 보이며 여명을 뽑았고, 여유롭게 영주를 바라봤다. 반면 기사와 병사들은 모두 한창 긴장한 채 영주의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는 손을 거둬 무기를 내리도록 했다.

“배짱 한번 두둑하시군. 내가 졌소. 결투는 해보나 마나일 테니 의미는 없을 거요. 생략합시다.”

“현명한 판단이셨소. 날 따르면 질 일은 없을 거요.”

아르투르가 프레드릭을 진압하며 보여준 용기와 지혜의 결과로, 백작령의 남은 모든 군세가 모여들었다. 숫자는 대략 3천에 달했다. 그중 절반은 농민 징집병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전문 전투 인력이었다. 금괴 기사단도 숫자는 비슷했기에, 전력은 얼추 맞춰진 셈이었다.

‘하지만 적들이 기병이 더 많고, 보병 질이 뛰어나. 이건 내 개인기량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

아르투르는 각오를 다지며 병력을 모아 진군했다. 그 결과, 양측의 군세는 바이스부르크 앞에서 마주했다. 금괴 기사단은 미리 언덕에 야영지를 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투르도 돌격하는 대신 반대편 언덕에 야영지를 꾸렸다. 결국 두 군대가 사이에 평원을 둔 채 각자의 언덕에서 마주 보는 형세가 됐다.

대치 첫날, 금괴기사단의 전령이 찾아와 수뇌부 간의 회담을 제안했다. 아르투르는 알튼 남작과 함께 그들을 마주하러 나갔다. 상대편에선 황금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와 음울한 인상의 중년의 남자가 나왔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승마 솜씨를 보며 단박에 숙련된 무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두 해 말을 타본 솜씨가 아니었다.

네 사람은 서로 말소리가 들리되 무기는 닿지 않을 거리에서 말을 멈춰 세웠다. 물론, 문명인들 간에 교섭을 위해 나왔다가 공격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자와는 누구도 교섭하길 바라지 않으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젊은 기사였다. 그는 흉갑만 금칠을 한 게 아니라, 온몸의 갑옷이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투구에는 한껏 깃을 낸 깃털이 달려있었고, 허리춤에는 보석이 세 개나 박힌 비실용적인 장검을 차고 있었다.

‘이놈은 뭐하는 놈이길래, 기사가 이따위 걸 입고 다녀?’

“만나서 반갑군! 아르투르 경. 나는 금괴 기사단의 단장 만프레드다. 이쪽은 우리 고객이신 빌헬름 폰 위르마넨 공. 곧 도파뉴 백작이 되실 분이지.”

“금괴 기사단? 탁월한 작명이구만. 기사가 맞긴 한 건가?”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 용병단의 주축은 너 같은 방랑 기사들이다. 어떤 면에선 네 동지지. 명예 대신 돈을 좆는 다는 게 다르지만.”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그게 산적과 다를 게 뭔가.”

“음, 사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점에선 별 차이가 없군. 하지만 너도 명성과 영지를 위해 사람을 죽이잖아. 인정하라고. 우리 기사들은 결국 사람을 죽여서 뭔가를 얻는 족속들이야.”

“네 궤변은 그쯤 듣지. 회담을 제의한 이유가 무엇이냐?”

만프레드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저런, 쌀쌀맞긴. 우린 같은 처지라고 친구. 우린 모두 잘 나가는 아버지를 뒀지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이지. 하지만 능력은 좋고, 야망은 넘치지. 충분히 친구가 되어 볼만한 조건 아닌가?”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겠다.”

“이야기나 좀 들어보지 그래? 우린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아.”

아르투르는 대답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에게 친구란 신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평생 용병과 친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야, 이봐, 이봐! 알겠어. 빨리 말할게. 돌아와.”

아르투르는 고개만 돌려 만프레드를 바라봤다.

“빨리 말해라.”

그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빌헬름이 말했다.

“어떤 보상을 받으면 조용히 떠나주겠나?”

“당신 목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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