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8화 (2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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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부인은 길게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정중한 어조로 되물었다.

“아델라이데가 그대를 남편으로 모실 테니, 바깥일을 경에게 의존하게 되겠죠. 그러면 사실상의 전권을 가지게 될 겁니다.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아르투르 경. 아이가 성년에 이르기 전까지 제가 섭정을 맡을 뿐이니까요.”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지체 높은 귀부인을 대하는 예의로는 실격이었다.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였다.

“그겁니다. 아델라이데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죠. 그러니 이번 일에 책임을 지셔야하는 분은 부인이십니다.”

“- 책임이요?”

소피가 황당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프레드릭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책임 말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씀 드릴까요? 머튼 남작가가 멸문하고 수만의 영지민들이 죽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섭정에서 물러나셔야한다는 겁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소피 부인의 모욕감으로 붉게 물든다.

“세상에,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나는 경에게 여덟 살이나 어린 아름다운 신부와 대영주의 직위를 선물하고자 했는데, 내 호의를 모욕으로 되갚는 겁니까? 사생아들은 은혜도 모르는 건가요?”

소피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아르투르는 표정을 지운 채 그녀를 직시했다.

“위르마넨 가문이 제게 은혜를 베푼 겁니까? 아니면 제게 은혜를 입은 겁니까? 부인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자가 미치광이 도적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소피는 기가 막힌 목소리로 답했다.

“기사라면, 명예를 아는 남자라면 위기에 처한 숙녀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폭도들을 무찌르는 일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대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그리고 반란이 더 크게 번졌다면 내게도 다른 생각이 있었어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아델라이데는 단순한 귀족집 아가씨들이 아니라, 수십만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영주와 영주의 섭정이죠. 당신들은 봉신들을 보호해줘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 일을 대신 했구요.”

아르투르는 힐난하는 어투로 말했다.

“어쩌자고 직할군을 바이스부르크에 내버려둔 겁니까? 진작에 군대를 보냈더라면 한참 전에 프레드릭을 잡았을 겁니다. 정말 잘못된 결정 이였습니다. 소피 부인.”

“어떻게 도적단을 처리할 지는 섭정인 내가 결정할 일이에요. 나는 아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겁니다. 이런 식으로 굴 거라면 당장 나가보세요. 도파뉴 백작과 결혼하고 싶은 구혼자들은 아주 많으니까요.”

소피는 눈을 부르르 떨며 아르투르를 노려봤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태평했다.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아실 텐데요. 부인.”

소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위르마넨 가의 봉신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나도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봉신과 가신 간의 주종 관계는 쌍무적인 의무를 지는 관계지, 누군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위르마넨 가문이 봉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했으니, 그들이 위르마넨 가문에 충성할 이유가 있을까요?”

소피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른 대 가문의 자제와 결혼시키면 그만입니다. 경에게 결혼을 제의한건 순수히 그대의 용기에 대한 포상이었지, 그대를 대신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걸 아셔야겠군요.”

아르투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아줌마는 나를 너무 무시하고 있군.

“부인, 저는 궁정에서 사생아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권력 관계라면 지독할 정도로 많이 봤습니다. 아델라이데 백작이 다른 대가문의 자제와 결혼하면, 즉시 권력이 그쪽으로 기울겠죠. 그렇게 되면 소피 부인은 완전히 힘을 잃을 거고, 아델라이데 백작의 정치적 역할도 대단히 줄어들겠죠.”

아르투르는 말을 한동안 쉬고 이었다.

“반면 저를 사위로 들이면 당신은 계속 가문의 어른으로 행세할 수 있을 테죠. 백작도 남편에게 종속되지 않을테구요. 동시에 가문을 지킬 파수꾼을 얻는 셈이니, 백작에겐 저만한 결혼 상대가 드물 겁니다. 그래서 그런 판단을 내리신거겠죠. 부인.”

소피는 침묵했다. 자신이 의도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눈앞의 젊은 기사는 예상한 것보다 정치적으로 예민했다.

“솔직히 털어놓죠. 전 이런 복잡한 머리싸움을 싫어합니다. 사실, 당장은 권력에도 큰 관심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조건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뭐라고 써 넣건 제가 가문을 장악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부인, 저를 뇌까지 근육으로 찬 바보로 보지 마십시오. 만약 제게 더 많은 역할을 기대하신다면, 부인은 권력을 내려두셔야 합니다. 스스로도 아시지 않습니까. 섭정이 벅찬 역할이란 것을요.”

소피는 조용히 눈을 내리 깔고, 날카롭던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슬퍼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게 되면, 내 딸을 보호할 사람이 없어요.”

“그건 적절한 구혼자를 찾으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부인을 존중 할 만한 사람으로 말이죠. 어차피 그 때가 되면 부인은 권력을 잃습니다. 이미 프레드릭의 난에서 부인의 권위는 손상 됐어요. 남은 문제는 아델라이데 백작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가 되겠죠.”

소피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채, 긴 침묵을 유지했다. 아르투르도 시선을 탁자로 내리깔았다.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흐르던 긴장감이 풀렸다. 소피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 나는 영지를 다스릴 능력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어려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꽃으로 자랐죠. 항상 저희 부모님은 제게 남편을 잘 모시고, 애들을 잘 기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쳤어요. 이번 일은 완전히 제 능력 밖이었다구요. 사별한 전 남편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백작을 모시던 가신들이 이야길 했을 텐데요. 왜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소피가 고개를 저었다.

“기사장 오토와 집사 모리츠, 전부 성을 굳건히 지켜야할 때라고 이야기했어요. 나는 그들의 조언에 따랐을 뿐입니다.”

아르투르는 순간 표정을 찌푸렸다. 머저리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지만 최종적인 결정권은 결국 섭정에게 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런 방침을 승인했던 건 부인이시죠.”

소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맞습니다. 나는 아녀자일 뿐이에요. 잘못된 조언을 듣고도 분별할 능력이 없었죠. 오직 제 딸을 지켜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죠.”

아르투르는 그제야 팔짱을 풀며, 한층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피를 바라봤다. 평생 칼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과부라면 그럴 수 있었다. 스스로의 잘못과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게 영주 대리의 권한을 주신다면, 영지가 안정화되는 일을 돕겠습니다. 물론 합당한 보상도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결혼 문제는 향후 상황을 보고 다시 논의해봅시다.”

소피는 대답 없이 아르투르를 바라보다,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아르투르 경. 백작의 섭정으로 그대를 전권을 쥔 영주 대리로 임명하겠습니다. 백작의 신변에 관련된 사안을 제외하면 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보상에 관해선 그대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해주십시오.”

아르투르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었다.

“생각을 바꾸셨군요. 승낙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당신의 말은 무례했지만 사실이었으니까요. 적어도 겉과 속이 달라서 약속을 쉬이 저버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야말로 되묻고 싶습니다. 왜 이 자리에서 바로 결혼을 승낙하지 않은 겁니까? 방랑기사인 당신에겐 이보다 더한 출세는 없을 텐데요.”

“영주가 된다는 건 더 큰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죠. 언젠가는 의무를 져야겠지만, 아직까진 해보고 싶은 일이 더 많군요.”

소피는 아르투르의 말에 맑은 미소를 지었다.

“도파뉴 백작령보다 큰 꿈을 꾸고 있군요. 야심 있는 사내라…. 그 말을 들으니 그대가 더 사위로 탐이 나는군요. 아델라이데는 혼기가 차면 분명히 매혹적인 외모를 가지게 될 겁니다. 조금만 지나면 구혼자들의 편지가 줄을 이을거에요.”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지금도 구혼자들은 충분히 많을 텐데요. 위르마넨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회를 마다할 남자는 없을 겁니다. 신중히 고르시죠.”

소피는 방긋 웃는다.

“그 많던 구혼자 중 한 사람도 우리를 도우러오지 않더군요.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들어요. 아르투르 경. 아이도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구요. 부디 그대도 꼭 고려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르투르는 웃음으로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터 영주 대리의 권한을 행사하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부터요.”

아르투르가 영주 대리가 되자마자 한 일은 집사 모리츠와 기사장 오토를 불러 문책하는 일이었다.

“소피 부인한테 군대를 성 안에만 웅크리고 있으라는 멍청한 조언을 한 게 사실인가?”

두 사람은 편치 않은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집사 모리츠가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오토. 넌 기사장 자리에서 해임한다. 집사 모리츠, 부인께서 자네를 각별히 신경 쓰시더군. 가문의 오랜 종복이라면서 말이야.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네. 앞으로 그런 멍청한 일은 하지 말게.”

“ - 일평생 위르마넨 가문을 모셔온 나를 사생아 따위가 해임할 수는 없다!”

오토는 벌떡 소리를 지르며 허리춤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는 곧장 검을 뽑고자 했지만, 아르투르의 노려보는 시선에 주춤했다. 흡사 맹수의 눈빛을 떠올리게 하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 칼을 뽑으면 결투 신청으로 알겠네.”

오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만 우물쭈물 대다가, 허겁지겁 방 안을 나가버렸다. 백인을 벤 아르투르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였다. 모리츠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유지했다.

“영지의 현황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당장 일부터 시작하지.”

아르투르는 집사 모리츠의 도움을 받아 정력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영지 곳곳에서 들어오는 보고와 지원 요청을 종합했다. 치안이 불안한 곳에는 직할군을 파견해 질서를 바로 잡도록 했고, 겨울을 날 식량이 부족하다는 곳에는 바이스부르크의 식량창고를 열어 무상으로 제공했다.

“식량을 나눠주는 건 좋지만, 빚으로 달아두셔야 합니다.”

예산을 관장하는 모리츠는 식량창고에서 빠져나가는 밀 주머니들을 보며 말했다.

“멍청한 소리. 영주가 영민들을 보호해주지 못해 농사를 못 지은 상황이니 마땅히 이쪽에서 제공해주는 게 맞아.”

프레드릭의 난이 남긴 상흔이 깊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는 이따금 말을 타고 나가 직접 상황을 보고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밤낮 없이 책상에 앉아 보내야했다. 케이에게는 자신의 심부름을 거들게 하며 글공부를 시켰다.

“네? 기사가 글도 배워야하나요? 글을 배우면 겁이 많아진다고 하던데요.”

“뇌까지 굳어버린 근육으로 차 버린 기사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지식은 또 다른 종류의 힘이다. 배워놔.”

케이는 굳이 글을 배우고 싶진 않은 눈치였지만, 마스터가 하라니 따라서 하긴 했다. 실은, 행정 업무를 보고 있는 아르투르도 죽을 맛이었다. 자신은 도저히 책상 체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할, 차라리 야전 지휘가 쉽겠어.’

그렇게 아르투르가 바쁜 일상을 보내던 나날 와중, 케이가 한 장의 편지를 가져왔다.

“크리스티안 경이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아르투르는, 케이의 목소리에 헛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잠깐 쉬고 있었다. 그래, 이리 줘 보거라.”

케이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편지를 건넸다. 아르투르는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마스터에게 짜증을 내던 종자치고는 정말 큰 발전이었다!

아르투르는 의례적인 보고겠거니 하면서 생각 없이 편지를 읽어가다가, 의자를 박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쿠잘루스를 데려와라. 크리스티안을 만나러 간다. 프레드릭의 배후로 짐작되는 인물을 찾았다는군.”

“그게 누군데요?”

“- 현 백작의 추방된 삼촌. 빌헬름 폰 위르마넨이라는군.”

케이가 그 이야길 듣더니 털털하게 웃었다.

“있으신 분들 집안은 정상적인 곳이 없네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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